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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의 부산 가요 이야기 <40> 부산 대중음악사 속 가수 허민

남포동·종로 코믹한 풍경 그린 노래… 전후 일상회복 열망 담아

  • 이동순 시인
  •  |   입력 : 2022-01-02 19:30:02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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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복남에 발탁돼 1954년 데뷔
- 독특한 떨림 창법 절절함 가득
- 참화 속 활기 전한 ‘다방아가씨’
- 지역 정서 담은 ‘마음의 부산항’
- ‘백마강’과 함께 대표적 히트곡

오래 전 서울의 정희성(鄭喜成) 시인이 긴급한 용무로 전화를 걸어온 적이 있다. 그는 대표작 ‘저문 강에 삽을 씻고’로 유명한 1970년대의 대표시인이다. 평소 연락을 자주 나누지 않는 분이 전화를 걸어온 까닭은 어떤 일에 대한 긴급지원 요청이다. 자기가 예전에 즐겨 부르던 노래 ‘다방아가씨’의 가사 전문을 좀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웃으며 서로 환담을 나누었고, 즉시 정리해 보내드리겠다고 했다. 정 시인은 어떤 모임을 앞두고 거기서 좌중을 압도할 계획으로 이 노래를 특별히 선택했지만 정확한 가사가 떠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긴급 요청을 해왔고, 내가 노랫말을 정리해서 보냈더니 감격의 답신이 왔다.

1950년대 중반의 대표가수 허민.
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으로 가수 허민(許民, 1929~1974)이 불렀던 이 ‘다방아가씨’란 노래는 1955년 대구 서라벌레코드에서 발표한 아주 코믹하고 이색적인 가요 작품이다.

허민은 당시 대구에 잠시 머물며 음반을 취입했다. 1절은 서울 종로 뒷골목의 많고도 많은 다방과 그 내부 풍경을 그렸다. 2절은 부산 남포동 거리를 신나게 달리던 시내버스와 차장 아가씨의 풍경을 다룬다. 3절은 서울의 백화점에서 양품을 판매하는 점원 아가씨의 코믹한 풍경을 다루고 있다.

6·25전쟁 직후의 참담한 정황이었음에도 그런 비극의 그늘은 전혀 드리워져 있지 않다. 오히려 밝고 활기차며 즐겁고 낙천적인 장면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전쟁의 비극을 오히려 그 반대의 활기찬 풍경으로 묘사해냄으로써 전쟁 이전의 평화와 안정으로 복귀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을 담아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전쟁으로 빚어진 엄청난 파괴와 혼란, 무질서 속에서 전쟁 이전의 밝고 활발하던 일상으로 속히 되돌아가고 싶은 갈망과 염원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가요팬은 이 코믹하고 명랑한 노래를 틈날 때마다 흥얼거리며 기분을 전환시키곤 했는데 뜻밖에도 정희성 시인이 이 노래를 기억하고 가사를 요청해왔던 것이다.

가수 허민에 대해서는 프로필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의 약력이 정리된 것은 부산의 작고한 가요연구가 김종욱 씨의 노력 덕분이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가수 허민의 외동딸 허경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로부터 부친에 대한 자세한 이력을 들을 수 있었다. 허민의 본명은 허한태(許漢泰), 1929년 경남 김해 출생으로 1974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마산상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국문과를 다녔지만 전쟁으로 학업은 마치지 못했다. 재학 시절부터 노래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가수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도미도레코드 전속시절에 발표한 곡 ‘마음의 부산항’. 허민이 직접 작사한 이 노래는 항구도시인 부산의 정서를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허민이 가요계와 맺은 첫 인연은 1950년대 초반 부산에서 열린 남조선가요콩쿨대회였다. 여기서 입상한 허민은 도미도레코드 설립자 한복남에게 발탁돼1954년 데뷔곡 ‘페르샤 왕자’(손로원 작사, 한복남 작곡)를 발표했고, 이때 한복남이 예명을 허민이라 지어주었다. 이후 ‘마음의 부산항’ ‘백마강’ 등을 연속으로 히트시켰다.

‘페르샤 왕자’는 6·25전쟁 직후의 격동기 혼란 속에서 삶의 안정을 희구하는 대중의 피로한 심리에 안정과 위로를 부여해주려는 음반 제작자들의 따뜻한 기획과 배려가 담겨져 있다. 이것은 동시대의 비슷한 노래들인 ‘홍콩아가씨’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샌프란시스코’ ‘하늘의 황금마차’ ‘베싸메무쵸’ 등의 경우와 같이 엑조티시즘, 곧 이국의 정취에 흠뻑 젖어들게 하는 효과를 자아낸다. 그 공간에는 멋진 신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 기대 심리로 가득 채워져 있다.

또 다른 대표곡 ‘백마강’은 식민지시대의 노래 ‘꿈꾸는 백마강’과 유사한 테마지만 그 비감한 분위기와 짙은 역사성은 오히려 농도가 더욱 짙다. 달빛이 휘영청 밝은 백마강을 배경으로 고란사 쪽에서 종소리가 들려오는데 이런 드라마틱한 분위기는 나그네의 애수를 강하게 자극시킨다. 그 종소리는 무너진 백제 왕업의 처연함으로 이어지고 삼천궁녀의 슬픈 설화성으로 확장된다.

이 노래 1절의 가장 강렬한 대목은 ‘구곡간장이 찢어지는 듯’하다는 대목이다. 그 애달픔은 2절에서의 계백장군 설화로 연결돼 비장함을 한층 증폭시킨다. 철갑옷으로 무장한 계백장군은 최후의 결전장인 황산벌 전투를 앞두고 자신의 칼로 가족들과 작별한다. 이 처참한 설화성과 백제군의 비극적 패전이 서로 맞물려 역사적 슬픔의 정서는 극대화되고 있다.

가수 허민의 맑은 공명과 여운이 느껴지는 듯한 개성적 떨림의 창법은 너무도 절절한 분위기로 가요팬을 몰입시킨다. 허민의 음색과 창법을 허스키 보이스로 해설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고전적 맑음과 애절함을 듬뿍 머금고 있는 유장한 가창이다. 도입부 ‘백마~가앙에~’ 대목에서 길게 뽑아내는 환기의 창법은 ‘고요한 달밤’을 이끌어내는 간절한 호소력으로 직결되어 이미 국운이 기울어진 백제 왕조의 비극성을 한껏 극화시킨다.

허민의 발표곡 중에서 부산 테마를 담은 곡은 단연 ‘마음의 부산항’이다. 도미도레코드에서 발표한 이 노래의 작사자는 놀랍게도 허민 자신이다. 국문과 출신 음악인답게 시 창작에도 전문적 식견을 가져서 부산지역 정서의 고유성을 잘 압축하고 정리해내고 있다.

1절에서는 ‘등대불 깜빡이는 부산항’이 등장하는데 그곳에서는 종일 ‘슬픈 뱃고동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늘 이별을 재촉하는 소리였다. 얼마나 많은 이별이 이곳 부산항에서 펼쳐졌던가. 일본으로 향하는 관부연락선을 타고 떠난 사람은 두 번 다시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항구를 빠져나간 여객선이 오륙도 부근을 지나는데 그 대목에서 작가는 ‘궂은비’라는 드라마의 상투적 도구를 끌어들인다. 그런데 이것이 노래의 적절한 효과를 자아낸다.

2절에서는 부산항을 떠나던 날의 장면이다. 가족과의 애달픈 이별 앞에서 시적 화자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송도 쪽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곳은 짙은 안개로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불안하고 불투명한 미래시간의 빛깔과도 같다. 타국에서 살아가는 시간은 한숨과 탄식의 나날이었다. 기억 속에 등장하는 부산항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운명적 실루엣이다. 고통과 질곡의 세월을 겪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가리라는 다짐을 굳게 지니고 있다. 도미도레코드 음반라벨 D102번의 앞뒷면으로 ‘흙냄새 고향’과 함께 녹음된 노래 ‘마음의 부산항’이 지니고 있는 생활문화사적 가치는 바로 이런 대목에서 확인되고 있다.

가수 허민의 전체 발표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그가 꾸준히 가수생활을 계속하지 못한 까닭은 뜻밖에 맞닥뜨린 지병과 가족사의 굴곡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1950년대 부산의 대중음악사를 정리할 때 가수 허민은 자기시대를 풍미한 매우 중요한 가수로 반드시 기록된다.

시인·가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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