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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레이니데이 /정재운

  • 정재운
  •  |   입력 : 2021-12-30 19:15:25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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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너 같은 애를 부르는 말이 따로 있대”
- 이 말로 하여금 내가 남들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 어둑한 하늘빛 색이 왕팡의 눈두덩이에 내려앉아 있었다
- “언니, 내 이름 뜻 향기로운 사람인데 … 냄새난다고 맞았어”

1. 안다, 기억이 시작될 무렵부터

구금비 씨가 바깥의 궂은 일기를 알아차린 것은 그녀의 딸, 신은비 양이 길쯤한 배추 잎사귀를 찢어내고 있을 때였다. 은비는 오른손에 쥔 포크수저로 고춧가루 듬성하게 묻은 김치를 찍어 비틀어댔다. 배식 아주머니는 다른 친구들에겐 모두 잘게 잘린 김치를 주면서 왜 나한테만 넙데데한 걸 얹었을까, 은비는 갸웃거리지 않았다. 그건 은비도 알 만큼 안다는 얘기였다. 엄마 금비 씨만 몰랐다. 은비가 알고 있다는 것을. 사실, 은비가 알아차린 건 꽤 오래 전의 일이었다. 누군가 그게 언제부터였냐 묻는다면, 은비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기억이 시작될 무렵부터?”

2. 상대가 김치이기 때문

은비가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 기억이 시작될 그 어린 시절부터 은비는 어린이집에 다녔고, 그때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그리고 차별이란, 이 다름에서 오는 것이라는 걸. 금비 씨는 은비를 맡김으로써 본인의 노동을 팔 수 있었다. 박한 도매금으로 매겨진 그녀의 노동은 하루하루 매진이었다. 먼지 털 기운도 모두 빠져나간 후에라야 금비 씨는 은비를 찾으러 갈 수 있었다. 은비는 떨어져 있던 시간을 만회하려는 듯 금비 씨의 품을 파고들었다. 깊은 숨을 들이켤 때마다 맡아지는 엄마냄새는 시큼털털했다. 금비 씨는 바디샤워로 꼼꼼하게 씻었지만 그때뿐이지 오래 가지 못했다. 바디샤워향이 엄마냄새가 아니었던 적 없던 것처럼 이 냄새 또한 엄마냄새라고, 은비는 눈을 감았다. 금비 씨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눈감은 은비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었다. 그늘진 얼굴을 내려 보며 금비 씨는 속으로 새기고 또 새겼다. 자신이 할 일일랑 열심히 버는 것밖에 없다고.

은비가 김치를 잘게 자르는 데에 성공했다. 포크수저와 젓가락이 일군, 오직 도구만으로 이룬 쾌거였다. 은비의 젓가락질 수준은 교실에서 최고였다. 많은 친구들이 손가락 자리가 고정된 교정용 젓가락을 사용하고 있었다. 초등학생쯤이나 됐는데 말이다. ‘유치원 후배들 보기 부끄럽지 않은가?’ 은비는 당당히 물었다. 그런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못지않은 것 같다. ‘젓가락질 따위 때 되면 누구나 하는 거잖아. 한국인이라면…….’ 생각이란 걸 좇다보니 이상한 데로 괴어들었다. 은비는 찢어낸 김치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돈. 그것이 전부가 될 수 없음을 모를 리 있나. 전부라 여길 만큼 벌 방법도 알 리 없다. 금비 씨는 아는 걸 까먹지 않는 것조차 힘겨웠다. 그래서 그런지 금비 씨는 중얼거리는 습관이 붙었다. 지금도 그녀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중얼거리고 있다. ‘최소한, 최소한의, 최소한이야…….’ 고개를 드는 바람에 아이의 얼굴엔 그늘이 걷혔다.

은비는 다른 친구들이 천대하는 김치를 남기는 법이 없었다. 그것도 먹기 싫은 것을 먹듯 삼켜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반찬보다 바지런히 씹었다. 꼭꼭 씹다보면 어떤 음식이든 그 고유한 맛이 나온다고, 엄마가 그랬다. 뭐, 은비가 또래들 사이에서 별나게 엄마 말을 잘 듣는 아이라거나 착한 아이라는 건 아니다. 다만, 상대가 김치이기 때문이었다.

3. 사십 살이 다 돼도 모르는 것을

그렇다면 은비는 김치만의 고유한 맛을 알고 있는가하면 그것까진 잘 모르겠다. 과연, 여덟 살짜리가, 적어도 삼사학년은 되어야 알까말까 한, 아니다. 사학년이라고 뭘 알겠는가. 사십 살이 다 돼가는 금비 씨조차 모르는 것을… 실은 금비 씨도 김치를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할 턱이 있나. 공장에서 매일 같이 치대고 담그는 것이 저 김치인 것을.

금비 씨의 공장에서 하루 생산하는 김치는 4톤이었다. 그렇게나 많이 만든다고? 믿기 힘든 무게 같겠지만, 날이 차가워지는 가을부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물량이 늘어나니 모르는 사람한텐 사십 톤이래도 믿을 것이다. 자기 사업에 자부심 강한 사장을 똑 빼닮은 반장의 독려 멘트 속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 이 ‘4톤’이었다.

“자자자자,”

‘짝짝짝짝!’ 네 번의 박수소리와 함께 네 번의 ‘자’가 터져 나오면 그때부터 자동으로 ‘4톤’이 따라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자자자자, 얼마 안 남았어요! 오늘도 달립시다! 4톤을 향해! 아자아자!” 그렇게 달리기 위해 공장은 사위가 어둔 새벽부터 분주했다. 속이 꽉 들어찬 배추들로 빈자리 없이 빼곡하게 채운 박스가 공장 안으로 하차하면, 잎사귀에 맺힌 이슬이 걷히기도 전에 배추들은 새벽조원들의 손을 탔다. 기계처럼 허리를 굽혔다 펴는 그들은 박스에서 배추를 뽑아내 식칼로 밑동을 쳐냈다. 무심하지만 불필요한 동작이 없는 그 손길을 지나면 배추는 운반 장치에 실려 절임통으로 떨어졌다. 그 사이, 자동절단기의 톱니가 배추를 반으로 길게 잘랐다. 대형 절임통에선 허리까지 올라오는 바지랄까 장화랄까 부르기 고민되는 그것을 입은 작업자가 층층이 배추를 쌓았다. 벽돌과 벽돌 사이 시멘트를 바르듯, 잘 쌓인 배추 위에 또 다른 작업자가 소금을 뿌리며 농도를 맞추면 이날의 염장이 끝났다. 여기까지가 고된 일과의 전부였으면 좋겠지만, 그제야 보통 사람들의 출근길이 열릴 시각이었다.

그즈음 금비 씨도 눈 비비는 은비를 떠밀어 학교에 보내고 공장에 도착했다. 아침을 들러 간 새벽조원들은 식후에 휴게실에서 한 시간 가량 오수에 빠졌다. 그 사이, ‘화이트맨’으로 변신을 마친 금비 씨가 전날 절여놓은 배추의 세척작업에 들어갔다. 작업복, 앞치마, 고무장갑 할 것 없이 온통 흰색으로 감싼 뒤, 마스크걸이가 달린 모자까지 쓰고야 화이트맨으로의 변신 완료였다. 금비 씨는 온통 여탕인데, 왜 ‘맨’이 붙나 의문을 가진 적도 있었다. 하긴, 바이오맨도 후뢰시맨도 모두 남자들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질 않나. 여기도 새벽조가 물러간 자리엔 오직 여인들의 힘으로 공장이 돌아갔다. 거긴 베트남에서 올라온 응언이나 중국에서 건너 온 왕팡도 있었다. 왕팡이 공장에 온 첫 날, 작업복을 갈아입고 나온 그녀가 모델처럼 한 바퀴 뱅그르르 돌더니 한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온니들, 화이트맨!”

눈만 빠끔히 내놓으니, 맨인지 우먼인지 누가 알까. 갓 스무 살을 넘겼던 응언도 왕팡도 이제 어른어른 삼학년이 가까워왔다. 이곳의 언니들은 다들 순순히 나이를 부르는 법이 없었다. 학년, 반으로 일컬었다. 금비 씨도 한참 오지 않을 것만 같은 사학년이 어느새 코앞이었다.

사학년이 되면 알게 될까? 김치의 맛을? 모르면 어떡하나? 그럼 금비 씨는 자기도 모르면서 은비에겐 왜 그렇게 얘기해왔던가? 꼭꼭 씹으면 뭐든지 고유한 맛이 난다고. 그 이유까진 알 길 없으나, 어쨌든 은비가 먹기 싫은 김치를 꼭꼭 씹듯이, 금비 씨도 곱씹기 싫은 것을 새기고 또 되새기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딸내미 손에 우산 하나 쥐어줄 정신도 없이 일터로 향했던 발자국에는 그날 하루치의 되새김질 된 다짐이 뚝뚝 묻어있었다.

4. 꼭꼭 씹느라 턱이 바쁘다

은비는 김치처럼 다른 것도 꼭꼭 씹는 편이었다. 그래서 일학년 사반의 점심시간엔 은비 주변만 조용했다. 은비는 그게 다 자신의 꼭꼭 씹는 습관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내 턱은 너무 바빠서 말할 새가 없지!’ 그러나 점심시간이 끝나고 수업시간에도 은비에게 장난을 걸거나 귓속말을 하는 친구는 없었다. 쉬는 시간에도, 체육시간에도 은비는 침묵에 에워싸여 있었다. 침묵 속에서 은비는 질긴 공상을 이어갔다. ‘점심시간이 아닐 때에도 모두들 꼭꼭 씹기 바쁜 턱을 가졌으면…….’ 모두라고 했으니, 선생님들도 예외는 아니다. 오물오물 씹기 바쁘니 하기 싫은 공부를 가르칠 이도 없을 테다. 훗날 어떤 존재가 되고 싶다 생각해본 적은 없지마는 은비는 턱이 바쁜 선생님을 대신해 수학선생님이 되는 상상에 잠시 빠져보았다.

“여기, 열심히 달리느라 배가 꺼진 마을버스 한 대가 기름을 먹으며 쉬고 있어요. 그 사이, 먼저 출발했던 버스들이 운행을 마치고 돌아오기 시작하네요. 한 대, 두 대, 세 대째나 돌아올 때까지 차고지를 나가는 버스는 한 대도 없었어요. 실컷 배를 채운 버스가 따사로운 볕에 그만 잠이 들었지 뭐예요. 누가 잠든 버스 좀 깨워줘요!”

“선생님, 그래서 문제가 뭐예요?”

“음, 지금 차고지엔 모두 몇 대의 버스가 있는 걸까요?”

그러면 골똘하느라 잠시 턱이 덜 바빠진 녀석 하나가 이렇게 토를 달지 모른다.

“선생님, 전 버스 같은 거 안 타는데요?”

은비는 저도 아이지만, 순진함을 가장한 아이들의 공격이 무서울 때가 많았다. 그들은 깊은 생각 없이 사람과 세상에 대해 지껄이곤 했다. 문득, 은비가 처음 그 단어를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너 같은 애를 부르는 말이 따로 있대.”

은비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얼른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튀김?’ 그건 은비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어서, 당시엔 그냥 잘못 알아들은 채로 넘어가고 말았다. 무어라 불렸든 굳이 엄마한테까지 그 말과 뜻을 물어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이 튀김이었다면, 그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겠는가. 맛있는 튀김과 반대로 ‘퉤퉤’ 침을 뱉는 것만 같았던 표정은 은비로 하여금 자신이 남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걸 다시금 각인시켰다.

가만 생각해보니 모두가 꼭꼭 씹느라 바쁜 턱을 가진다면, 공부는 일기 쓰기나 독서장 숙제로 많은 것들이 대체될지 모른다. 은비는 자기더러 어떻게 부르건 글씨 하나는 저희들보다 훨씬 반듯하게 쓸 줄 안다고 생각했다. 한 번은 머릿속에 들어있던 우스운 발상을 행동으로 옮긴 적이 있었다. 일부러 책상 끝 아슬아슬한 자리에 독서장을 놓고 쉬는 시간 내내 기다렸다. 십 분간의 쉬는 시간이 한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지던 그쯤, 책상 사이를 운동장처럼 뛰어다니던 말썽쟁이 하나가 은비의 독서장을 치고 지났다. 독서장은 공중을 붕 날아 바닥에 떨어졌다. 활짝 날개를 펼치듯 떨어진 노트를 주운 녀석은 절로 감탄을 흘리고 말았다. 그것은 은비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우와, 어른 글씨 같다!”, “어디? 어디?”

독서장이 은비에게 오기도 전에 뭐든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사내 녀석들이 은비의 독서장을 둘러쌌다. 터져 나오는 감탄이 조금이라도 오래 이어지길 바라며, 은비는 일부러 제 독서장을 빨리 낚아채지 않았다. 그때, 앙칼진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근데 은비 독서장에는 왜 선생님이 아무 말도 안 남겨놨지?”

아이들은 그러고 보니 그렇네, 하며 웅성거렸다. 워낙 아는 게 많은 은비라지만, 그것만은 몰랐다. 선생님이 독서장에 꼭 몇 자라도 빨간색으로 확인을 남긴다는 사실을. 하다못해 ‘참 잘했어요’처럼 의미 없는 말이라도 없었다. 턱은 꼭꼭 씹느라 바쁜 거라지만, 선생님의 손가락은 무엇으로 바쁘기에 은비의 독서장에만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걸까?

은비의 점심시간이 다 끝나가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꼭꼭 씹자. 금비 씨는 그렇게 꼭꼭 씹고 되새기다보면 영양소가 고루 쌓일 거라고 했다. 그녀도 그렇게 되새기는 노동의 가치, 의미가 새록새록 쌓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있다. 그러나 갈수록 그녀가 실감케 되는 것은 돈의 가치, 위력뿐이었다.

5. 청춘이 기억하는 언어들

구금비 씨가 꿈꾸었던 세상은 누구나 저만이 가진 향기를 아뜩하도록 뿜어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녀가 공장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왕팡이 자취를 감추었다. 마스크에 가리었지만 누구보다 쌩글쌩글 자주 웃던 그녀였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사라졌어도 수소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루이틀은 몸살이 났나 싶어 기다렸고, 그 뒤론 “역시 짱꿜라 아니랄까봐” 하는 얘기가 아무렇지 않게 돌았다. 그녀를 향해 관리자가 했던 유일한 말은 이것이었다. “배가 불렀지, 어디 궁해보라고, 지 까짓게 어딜 가겠어.” 금비 씨도 한 사람의 노동자일 뿐, 왕팡의 주소를 알아낸다거나 팔을 걷어붙일 깜냥은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녀의 귓전에 왕팡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온니들, 화이트맨!”

왕팡의 집으로 향하는 마을버스에 몸을 싣고서부터 금비 씨는 차창에 머리를 찧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하질 않으면 번다한 생각들을 내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건 왜 물어보냐는 반장의 뜨악한 표정부터, 막상 왕팡을 맞닥뜨렸을 때 할 말도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 빠진 사람 몫을 고스란히 나눠 안은 남은 자들의 고충을 대변하기 위한 행차인가? 아니면, 이주여성노동자들의 빤한 삶을 목격하기 위해서? 봉고보다 조금 큰 덩치의 버스는 검은 매연을 뱉어내며 산복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사념이 거기까지 괴어들자 금비 씨는 뒤늦게 자신의 처지를 돌아볼 수 있었다. ‘은비한테 오늘 늦을 거란 얘기도 못했는데…….’

금비 씨는 전날 절여 놓은 배추의 뿌리 부분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밑동 잘린 배추들은 총 세 번의 세척 과정을 반복했는데, 기계가 아무리 발달해도 마지막 세척의 과정만은 꼭 사람의 손을 타야했다. 속을 뒤집어서 한 장 한 장 씻어주는 과정이 오전 내내 반복됐다. 뒤집어 차곡차곡 쌓아올린 배추에서 물이 빠지길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점심을 뜨러 이동했다. 구금비 씨가 바깥의 궂은 일기를 알아차린 것은 그녀의 왼뺨으로 한 방울의 비가 긋고 지났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턱이 절로 위로 들렸다. 컴컴한 색의 구름이 덩치를 부풀리고 있었다. 하늘은 금세 먹빛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금비 씨는 중얼거렸다. ‘원래 하늘이 무슨 색이었지?’ 푸르렀던 모습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며칠… “며칠만 더 있다가…….” 왕팡은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녀는 고개를 외로 돌렸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금비 씨도 고개를 돌렸다. 그때 보았던 하늘도 푸른색은 아니었다. 다저녁의 어둑선한 하늘빛과 꼭 같은 색의 어둠이 왕팡의 왼쪽 눈두덩에도 내려앉아 있었다. 왜… “대체 왜…….”라는 무기력한 말이 금비 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왕팡은 대답 대신 물었다.

“언니, 내 이름요, 무슨 뜻인 줄 알아?”

“으응? 몰라.”

“향기. 향기로운 사람…….”

“…….”

“근데 냄새난다고 맞았어.”

금비 씨는 벌건 것들로 채워진 식판을 내려 보며 ‘비정규직 철폐’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왜?’라는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막 단어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김치지짐이를 찢을 때는 ‘외국인노동자 인권’이라는 말이 쏜살같이 지나갔고, 김치찌개를 뜰 때는 ‘총파업’이라는 말이 앵앵거렸다. 대체 웬 말들이냐? 금비 씨는 어디 먼 나라의 언어처럼 들리는 그 말들이 던지는 생경함에 어리둥절했다. 그때의 왕팡도 틀림없이 어리둥절했으리라. “한국 사람들은 다 김치냄새 좋아하는 줄 알았어.” 어리둥절함이 걷힌 자리에서 금비 씨는 왕팡처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어디 먼 나라의 언어처럼 들리지마는, 실은 그것들 모두 금비 씨의 청춘이 기억하는 언어들이었다. 다 잊어버렸다지만, 데자뷔처럼 생기하는 그 말들에 ‘화이트맨’이라는 단어도 포함시켜야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멍이 삭을 며칠 후엔 꼭 화이트맨으로 변신하겠다던 그녀의 모습은 더는 볼 수 없었다. 금비 씨도 다시 그녀를 찾진 않았다.

‘다 좋아할 줄 알았지? 아냐. 나만해도 꾸역꾸역 먹고 있는 걸. 이 벌건 것들… 우린 화이트맨이 아니야. 퇴근 때 한 번 봐, 보라고. 벌건 양념에 푹 절인 우린 레드맨이야.’

금비 씨는 체하지 않도록 꼭꼭 씹었다.

6. 금비에게만은 언제나 새로운 은비다.

은비에게 ‘신’이라는 성씨를 붙인 것은 전적으로 금비 씨의 감각이었다. 그녀의 이름에 ‘구’가 붙었으니(혹시나 해서 덧붙이는데, 구금비 씨의 성이 ‘옛 구(舊)’를 쓰는 것은 아니다!), 은비의 삶이 저와는 전적으로 달랐으면 하는 소망으로 ‘새로울 신(新)’을 붙인 것이었다(그 같은 한자를 성씨에 사용하는지, 그래도 될는지 모르지만 성명학 따위가 금비 씨 청춘의 언어를 구성할 리는 없으니 아무렴 어떠랴!). 그러나 개명신청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도뿐이 아니었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자기들과 이름만 비슷해졌지, 눈코입은 여전히 낯선 모습 그대로인 은비의 새로운 성을 받아들이려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금비에게만은 은비는 언제나 새로운 은비였다. 금비는 은비에게 드리울 오래된 그늘일랑 그늘은 죄 걷어버리려 했다. 설령 그것이 사랑했던 사람의 성씨라 할지라도 말이다.

벌건 것이 묻어 경계를 넓힌 입술이 움직임을 멈췄다. 뭔가를 잔뜩 문 채 콧김을 내쉬었다. 꼭꼭 씹다보면 그렇게 턱이 아프기도 한 법. 너무 바삐 씹었나, 금비 씨는 멍하니 벽에 붙은 시계를 올려다봤다. 그러곤 누가 세게 등을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몸서리치며 다시 맹렬하게 턱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비 씨는 작업반장에게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해도 되겠냐고 머리를 조아렸다. 씨알도 먹히지 않는지, 반장의 목소리가 냉랭하다. 금비 씨는 급한 마음에 반장의 손을 덥석 잡았다가 뜨거운 걸 만진 것처럼 얼른 놓았다. 반장의 노기는 일시적으로 놀람에 치였으나, 금세 그 자리를 짜증이 대체했다. 그런 반장의 표정은 사장의 복심이 되어 완장을 차기 전부터 지금까지, 지긋지긋하게 보아왔다. 거인이 함부로 눌러 빚은 것처럼 납작하고 길기만 한 얼굴은 하관까지 빤 탓에 그를 보는 누구든 어떤 나라를 떠올리게 했다. 저 멀리, 가본 적 없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칠레라는 나라를. 거기에 생산량을 핑계로 직원들을 잡도리할 때면, 그는 밀려오는 짜증으로 가파른 안데스 산맥을 일으켜 세웠다. 그 압도적인 길이는 직원들이 외면하고 싶어도 시야의 끄트머리 어드메엔 꼭 들어오기 일쑤였다. 자전하는 지구처럼 아예 고개를 돌려버리지 않는 이상. 금비 씨의 수그린 고개가 허리까지 내려온 이유도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야, 안 그래도 손 없는 공장에서, 정말 이러기야?” 반장이 거기까지만 나왔어도 금비 씨의 숙인 허리는 언제라도 더 곱아들 수 있었다. 까짓것 꿇으래면 무릎쯤 뭐가 어렵다고… 괜히 쓸데없는 속말까지 뒤엉키고 있는데, 반장이 입을 뗐다.

“자기도 왕팡처럼 허파에 바람 들었어?”

금비 씨는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뭘 봐?”

은비는 그 말을 하지 못한 것을 두고 몇 날 며칠을 앓았다. ‘뭘 봐!’ 단 한 마디를 하지 못한 은비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줘…’라고 했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다음 수업 때에 맞추어 선생님이 들어오시지 않았다면 독서장이 은비에게 돌아올 수 있었을까. 손바닥으로 교탁을 두드리는 선생님이 “왜 이리 소란하죠?”라고 물었다. 아이들의 대답이 없자, 반장 쪽으로 고갤 돌려 턱짓을 했다. 반장은 은비에게 손가락을 쭉 뻗으며 답했다.

“은비 독서장 때문에 남자 애들이…….”

“거기 뭐가 쓰여 있었지?”

“아무것도 안 적혀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럴 리가 없지만, 아무것도 안 적혀있다면 뭘 보기 위해 그렇게 둘러싸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반장이 어깨만 으쓱 올리자, 선생님은 은비에게 눈을 돌렸다. 은비는 손에 들린 독서장을 가지고 나갔다. 독서장을 펼치던 선생님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아무것도 적지 않은 것은 선생님의 글씨였다는 걸.

“한국 사람이면 한국말을 알아들어야지”라는 선생님의 말이 은비의 심장을 찌르고 들어왔다. 학기 초, 은비는 담임선생님 란이 따로 질러진 독서장을 사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처럼 금비 씨가 은비의 가방, 신발주머니, 필통 등을 챙겼지만, 독서장 같은 건 챙기지 못했다. 은비 또한 제가 보기에 엄마는 독서장 말고도 신경 쓸 일이 많았다. 은비는 금비 씨가 준 푼돈을 아껴 정식 독서장보다 조금 싼 보통 공책을 독서장으로 장만했던 것이다. 이제 한 권을 다 채워간다. 은비는 조금만 더 버티자고 생각했다.

“들어가!”

금비 씨는 뒤돌아 작업대로 향했다. 그냥 조퇴처리 해버리라고, 일당에서 반 토막 내라고 겨우 할 말은 했다지만 분이 풀릴 리 없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왕팡을 올리다니, 장화 속으로 진땀이 흘렀다. 몸이 떨렸다. 분노하는 법쯤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금비 씨의 입에선 바람 빠지는 실소가 새나왔다.

폭이 넓은 스테인리스 판에 양념이 카펫처럼 두텁게 깔렸다. 이 양념은 오수에서 깬 새벽조원이 돌아가면서 만들었다. 물에 불린 태양초를 통마늘과 함께 거대한 기계의 주둥아리에 집어넣어 곱게 갈면, 숙성한 액젓과 끓여 식힌 해물육수를 부어 섞었다. 거기 채 썬 무와 파를 쏟아 붓고 한 시간 가량 섞어주면 이 붉디붉은 카펫이 완성되었다. 내리깔린 카펫으로부터 올라온 매운 공기가 공장을 메웠다. 스테인리스 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작업자들은 벌건 양념을 훔친 고무장갑으로 절인 배추의 속을 연신 드나들었다. 작업복 속은 너나 할 것 없이 젖어가기 시작해 작업이 끝날 무렵엔 흠씬 비를 맞은 것처럼 장화 밑바닥이 질척질척했다. 맨 앞에 선 사람이 듬성듬성 양념을 뿌리다시피 하면 중간 그룹이 섞어주고, 뒤로 갈수록 양념이 뭉친 곳은 닦아내고, 허연 부분은 색을 입히는 과정이 반복됐다. 무청과 배추를 골고루 섞어서 비닐에 넣는 마지막 단계까지 끝나면 반장이 공기가 들어가지 않게 비닐을 최대한 압박하고 꼬아서 케이블타이로 매듭을 묶었다. 볶음김치, 맛김치, 총각김치, 묵은지… 김치의 종류는 다양하기만 하지만 치대고, 치대고, 또 치대는 궁둥이들은 모두 같은 모양이었다. 한창 치대기에 여념이 없는 금비 씨는 모를 테지만 말이다. 다른 작업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반장한테 쪼이고, 사장의 부릅뜬 눈에 어디 남들 궁둥이 볼 겨를이 있어야지. 봤다면 틀림없이 소녀들처럼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금비 씨의 청춘 시절도 어디 분노와 투쟁의 언어로만 빼곡했으랴. 카심, 그와 나누었던 무언의 수다는 사랑의 언어가 아니었나! 그의 이름은 카심 토카레프. 금비와 카심의 수다는 일상의 언어로 옮아가기도 전에 끝을 맺고 말았다. 그는 금비, 은비의 곁을 떠났다.
7. 시간이란 것을 통과하면 웬만한 것은 다 알게 된다

점심시간이 끝난 아이들은 방과 후 돌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두어 시간 더 학교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점심시간 내내, 은비는 창밖에 눈을 던진 채 오물거리고 있었다. 말동무가 없어서 그 눈길이 창 너머를 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누가 묻는다면 은비는 얘기하겠지만 그렇게 물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유야 어쨌든 그 덕분에 은비는 일학년 사반에서 창을 길게 그어가는 빗줄기를 처음 발견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가장 오래 지켜보고 있을 아이도 다름 아닌 은비의 차지가 될 것이다. 은비는 알고 있었다. 아울러 시간이 지날수록 긴가민가하던 것 하나도 점점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리는 저 비는 아무리 기다려도 그치지 않을 거야!’

은비는 생각했다. 제아무리 긴가민가하던 것도, 알쏭달쏭한 것도 시간이란 것을 통과하면 다 벗어진다고. 멀끔한 꼴로 알아차리게 된다고. 하지만 여전히 불가해의 영토에 갇힌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것도 있다. 카심이 떠난 지 벌써 몇 해가 흘렀지만, 그것만은 이유를 모르겠다. 엄마는 왜 ‘그것’을 버렸을까. 은비의 동의 따위 받질 않고, 카심의 허락도 구하질 않고……. 분명 그것은 카심의 것이었다. 그가 몇 안 남긴 유품이었다.

유품? 일개 물건일 뿐이라 여길 순 없었나? 꼭 그 같이 무거운 의미의 딱지를 붙여야했던 걸까, 하고 은비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은비는 이미 사라져버린 ‘그것’을 두고 생각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카심이 금비 씨를 만나기 이전부터, 그러니까 그가 고국으로부터 가지고 온 자그마한 짐 가방 속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었다. 금비 씨도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르지 않았으리라. 왜냐하면 카심이 아니었다면, 카심의 그것이 아니었다면, 너무도 빨리 지나가버린 청춘시절의 금비를, 그녀가 내던 빛을 가둘 길은 아마도 없었을 터이기 때문. 그러나 이미 사위어버린 청춘의 소실점에 선 이즈음의 금비 씨에게 그와 관련한 유품 따윈 그녀의 딸, 은비에게 드리울 그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거기까진 은비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에 관해 금비 씨만 알고, 은비는 모르는 것이 있을까. 일학년 사반에서 제일 아는 게 많은 은비조차 결코 알 수 없고, 차마 닿을 수 없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8. 금비 씨만 알고, 은비가 모르는 것

반장은 금비 씨의 길을 쉽게 열어주지 않았다.

“하나만 묻자. 금비 씨, 그렇게 바삐 어딜 가?”

“지금 가야해요.”

“누가 가지 말래? 어디 가는지만 알자고오.” 금비 씨와 반장을 제외한 작업자들의 눈길, 손길은 여전히 스테인리스 판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깍두기에 벌건 옷을 입히기 바빴으나, 그 속도가 눈에 띄지 않게 느려진 것은 사실이었다. 말이 없는 금비 씨의 입만 좇던 한 작업자는 하마터면 그녀를 향해 소리칠 뻔 했다. ‘언니, 그냥 죄송하다고 해!’, ‘아무 말이든 하라고!’

금비 씨가 마스크를 끌렀다. 팽팽한 공기를 끊어낸 금비 씨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그들의 기대와는 퍽 달랐다.

“제가 반장님한테 그런 것까지 보고해야합니까? 네? 내가 공무원이라도 되나요?”

반장은 맥이 탁 풀린 사람처럼 턱을 떨어뜨렸다. 은비가 봤다면 한 마디쯤 쏘아주었을지 모른다. ‘아저씨, 꼭꼭 씹질 않고요!’

꼭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반장의 턱이 올라붙었다. 그래봐야 칠레가 어딜 가나. 그는 붉게 물든 고무장갑을 벗고 있는 금비 씨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이 누님이 미쳤나? 방금 얘기 사장님께 똑같이 전한다?”

그는 턱을 당겨 앞이마를 금비 씨 쪽으로 디밀었다. 미간에 굵은 줄이 패고, 매부리 콧등이 안데스처럼 융기했다. 그쯤 작업대의 궁둥이들은 모두 움직임을 멈추고 금비와 칠레로 눈길이 모였다. 금비 씨가 말했다. “밖에 비 오는 거 몰라?”

칠레가 갸웃했다.

“비켜.”

사고 당시, 카심이 누운 자리 근처에서 ‘그것’이 발견됐다고 했다. 현장의 동료들은 그가 산재 판정을 받는 데에 불리한 증언을 했다. 작업이 잠시 쉴 때마다 그는 그것을 들여다보거나 그것으로 풍경을 담곤 했다는 것이었다. 금비 씨는 의아했다. 그의 작업장은 아름다움과는 한참 거리가 먼 곳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품으로 돌아온 그것에는 아무런 풍경도 들어있지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그녀는 더디 깨달았다. 동료들의 증언이 진실인지 아닌지만 좇느라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프레임이 완전히 이지러져버렸다는 것. 비록 그들의 증언이 거짓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그의 죽음에 어떤 소이가 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작이다!’

뒤늦게 외치고 또 외쳤지만, 아무도 금비 씨에게 힘이 되어 주지 못했다. 이상을 위해 싸우는 줄로만 알았던 높으신 분들 역시, 한 불법체류노동자의 죽음 앞에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확률에 대해 말했다. 그녀만 공중에 붕 띄워놓고 모든 이들이 현실과 납작하게 밀착되어 있었다. 그녀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은비와 함께 생을 이어가기 위해. 그러기 위해선 ‘그것’부터 버려야했던 것이다.

9. 세상이 번쩍이고, 손이 하얗게 변하고

한참 동안 떨어뜨린 고개를 들자, 처마 끝으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은비는 무언가 큰 결심을 한 듯 한 걸음, 또 한 걸음 빗속으로 내딛기 시작했다.

금비 씨는 두방망이질치는 심장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와중에도 ‘이게 얼마나 오랜만에 타는 택시지?’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리곤 누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쫓아버렸다. ‘벌써 가버리진 않아야 할 텐데…….’ 우산을 쥔 금비 씨의 손이 하얗게 변했다.

눈꺼풀을 올리자, 하얗게 변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손이 눈에 들어왔다. “비켜”, “못 비켜”가 몇 차례 반복되던 것까진 또렷한데, 대체 그 뒤에 펼쳐진 상황에 대해선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칠레가 두 팔로 금비 씨의 어깨를 밀친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삽시간에 욕설들이 튀어나왔고, 아니 그보다 먼저 포기김치가 혜성처럼 공중을 날았다. 절박하게 내지르는 칠레의 높은 비명소리와 “가!”, “금비야, 가!”, “허파에 바람이 안 들면 죽지, 죽어!” 같은 외침들이 뒤엉켰다. 금비 씨는 뒤로 넘어지면서 질금 감았던 눈을 겨우 떴다. 삐기라도 한 듯 손목에 저릿한 통증이 지나갔지만, 그렇게 손바닥으로라도 짚은 것이 다행이었다. 흰 손바닥이 빠르게 붉은 빛을 찾는 걸 보니, 모든 것은 정상이었다. 금비 씨는 누가 뒤에서 그녀의 궁둥이를 밀기라도 한 것처럼 스프린트로 분해 공장을 빠져 나갔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세상이 번쩍였다. 하늘 어딘가 구멍이 뚫린 것 같은 소리가 뒤이어 따라왔다. 운동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저만치 먼 곳에 은비가 있었다. 은비는 번개가 칠 때마다 우뚝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작은 몸을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는 금비 씨의 목을 무언가 꽉 잠그고 놓아주지 않았다. 입을 떼면 금방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 아주 잠시간, 금비 씨는 은비를 부르지 못했다.

10. 둘의 하늘은

금비 씨는 거친 숨을 뱉으며, 은비의 어깨를 꽉 움켰다. 다행히 은비가 우산 없이 걸어온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다. 되돌아 둘이 운동장을 지를 길은 꽤 멀어보였다.

“비 맞잖아. 엄마 기다리질 않고.”

“엎질러진 물 대신 비로 채우기로 했거든.”

“응?”

“아냐. 그냥 괜찮다는 말이야.”

“은비야, 엄마한테는 그런 말 안 해도 되는 거야.”

“괜찮다는 말?”

“그래.”

“고마워. 와줘서.”

“그 말도 마찬가지.”

“몰랐어.”

“뭘?”

“엄마, 엄청 빠르다는 거.”

“빠르긴, 오늘도 엄마가 제일 늦었잖아.”

“아니야. 체육선생님보다 더 빠르겠던데?”

“비밀 지켜줄래? 실은 엄마 뒤엔 누가 있어. 화이트맨이라고… 가끔 급할 땐, 아까처럼 뒤에서 밀어줘.”

“믿어줄게.”

“그래. 고맙다.”

“그런 말 안 해도 돼.”

“응. 비야, 번개 칠 때 많이 무서웠지?”

“아니. 하나도 안 무서운데?”

“그럼 왜 그때마다 멈추고 하늘 올려다봤어? 엄마가 다 봤는데?”

“봤어?”

“엄마가 미안, 다음엔 꼭…….”

“하늘에서 카심이 사진을 찍어주거든.”

“응?”

“…… 또 번쩍일 땐 같이 찍을래?”

운동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세상이 번쩍였다. 금비은비는 “김치”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녹슨 우산살이 둘의 하늘을 만들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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