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일곱 도매상 점원으로 ‘입성’
- 가게 내면서 틈틈이 문학 공부
- 첫 기고 등 국제신문과도 인연
- 도매상서 만나 근면·인내 배우며
- 평생 친구 된 옆 가게 상인들 등
- 시장 일상 잔잔히 풀어낸 글들
- 작가가 파는 머플러처럼 ‘포근’
국제시장은 필자가 처음 본 ‘어마어마하게 큰 시장’이었다. 경남 김해에서 살다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부산에서 살게 됐는데,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국제시장은 멀지 않았다. 대신동의 학교에서는 하교 길에 보수동을 지나 구경하러 갔고, 휴일에는 초장동 언덕의 집에서 부평동을 지나 놀러 다녔다. 걸어서 시장까지 가는 동안 늘 두근거렸다. 활기찬 목소리로 어깨를 부딪치며 걷는 사람들, 가게마다 빼곡하게 들어찬 물건, 볼거리 먹을거리가 풍성한 시장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이후 자라면서 어떤 화려한 백화점이나 쇼핑센터를 봐도 국제시장을 처음 봤던 만큼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필자에게는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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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중구 국제시장 3공구 B동 2층 덕성상회에서 만난 정희선 작가. 그는 남편과 함께 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
국제시장의 세월이 70여 년에 이른다. 부산은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던 시장이다. 그곳에서 50여 년 동안 장사를 한 정희선 씨가 수필집 ‘국제시장’을 냈다. 표지에 ‘굳세게 살아온 시장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반백년 남짓 살아낸 나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놓여 있다. 어떤 글을 담은 책인지 부제가 다 말해주는 듯하다. 정희선 수필가를 국제시장에서 만났다.
■ 국제신문이 안내한 문학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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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시장- 정희선 / 수필과비평사 / 2021 |
한파를 주의하라는 생활안전문자를 받은 날, 국제시장으로 향했다. 추워서인지, 코로나19 탓인지, 세월의 변화 때문인지 예전만큼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길가의 가게마다 ‘돌아가는 길에 사가야지’하는 생각이 절로 들만큼 값싸고 좋은 물건이 즐비했다. 물건 구경에 빠져 가게를 연신 기웃거렸다.
국제시장 3공구 B동 계단 앞에서 정희선 씨가 환한 웃음으로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면 내처 걸어갔을 것이다. 그의 가게는 2층에 있다.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계단을 올랐을까. 계단을 올라서자 화려하고 따뜻한 세상이 펼쳐진다. 정희선 씨는 스카프, 머플러, 숄, 손수건, 부채 등을 판매하는 도매업을 하고 있다. 겨울철이라 가게에는 머플러와 숄이 가득 진열돼 있다. 밖은 찬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안에는 꽃이 활짝 핀 것 같다. 예쁘고 포근한 꽃. 보기만 해도 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다.
정희선 씨는 1951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 열일곱살 때 국제시장 메리야스 도매상 점원으로 일하면서 부산 사람으로 살아왔다. 첫 자취방이었던 대청동 된비알의 작은 다락방에 살면서 아랫동네까지 내려가 긴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어 먹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다. 어린 나이에 힘들었겠다고 말했더니 “시골에서 부모님 도와 일하던 것에 비하면 힘들지 않았다”는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결혼하고, 가게를 내고, 장사를 하면서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에도 배움의 갈망을 잊어버린 적은 없었다. 가게에 손님이 뜸할 때마다 책을 읽었던 그가 문학을 정식으로 접한 것은 국제신문 덕이었다. “2004년에 국제신문에 ‘영도다리, 주민입장 생각을’ 이라는 글을 투고 했는데 오피니언 면에 실렸어요. 신문을 본 남편이 제가 문학공부 하는 걸 인정해줬어요.”
2005년 초여름, 국제신문에서 연 문학강좌를 들었다. “마침 여름 비수기로 접어들고 있어서 운 좋게 강좌를 들으러 다닐 수 있었지요. 강좌에 참여한 사람들과 만나면서 시인과 친구도 되고, 그 친구 안내로 동인 활동도 하고요. 동인들이 저도 몰래 제 글을 ‘지구문학’에 응모하면서 수필 부문 신인상을 받고 등단했어요.”
방송통신대 ‘낟가리 문학상’, ‘현대문학사조’에서 시로 시인상과 수필로 문학작품 우수상도 받았다. 장사를 하면서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자신의 문학 세계를 하나하나 쌓아올렸다. 2015년에 수필집 ‘국향과 어머니’를 내고 2021년에 시집 ‘몽돌’과 수필집 ‘국제시장’을 냈다. “올해 책을 두 권이나 낸 건, 코로나19 영향입니다. 매상이 10분의 1로 떨어질 정도로 고객의 발길이 뜸해진 건 애가 타지만, 글 쓸 시간이 많아졌던 겁니다.” 코로나의 역설이다.
■ 장사하고, 책 읽고, 글 쓰고
수필집 ‘국제시장’에는 부산에 와서 정들이며 살았던 지난 세월, 시장에서 일하면서 보고 겪은 일, 고향과 가족에 대한 마음, 늘 주변을 돌아보는 불심과 시선 등을 잔잔하게 풀어냈다. 우리의 일상은 사소하다. 오늘을 사는 동안 어제의 일은 어느새 기억 저편으로 밀려나면서 점차 잊힌다. 하지만 글로 기록하는 순간 그 일상은 빛나고, 그 속의 자신을 되돌아보며 마음그릇은 더 커진다. 수필 한 편 한 편을 읽는 동안 정희선 씨의 따뜻하고 넓은 마음이 그가 팔고 있는 머플러처럼 포근하게 와 닿았다.
책 속의 ‘국제대학 동기들’에서는 시장사람들이 나누는 정을 보았다. 국제시장에서 일하면서 앞 가게, 옆 가게, 그 옆 가게 도매상의 점원으로 만나 평생 친구가 된 동기들 이야기다. 정희선 씨는 한 술 더 뜬다. 그는 이렇게 썼다. “국제종합전문대학 경영과 출신이라고. 우리가 배운 과목은 사회와 바로 접목되는 정직·근면·인내·친절·계산 등이며, 어느 대학에서도 내놓고 가르치지 않는 종합과목을 이수했다고. 그것도 취직하기 어려운 도매상에서 4, 5년씩 고생해 돈 벌며 현실 공부를 치열하게 한 덕에 모두가 잘 살고 있다고.”
정희선 씨는 가게 앞에서 사진을 찍을 때 수필집 ‘국제시장’ 표지로 만든 액자를 들었다. 얼핏 책 표지가 아니라 국제시장 홍보액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만약 제가 문학을 하지 않았다면 평생 장사만 하다가 가지 않겠어요? 살아가는 이야기, 마음에 고인 많은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것은 가장 큰 기쁨이에요.” 그의 말을 생각하며 다시 거리로 나섰다. 이 시장 곳곳에 박힌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지 새삼 깨닫는다. 정희선 씨에게는 국제시장이 글밭일지도 모른다.
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