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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의 부산 가요 이야기 <39> 시계와 평생을 살았던 정향

시계방 사장님으로 가수 활동 ‘투잡’… 격동기 부산을 애절하게 노래

  • 이동순 시인
  •  |   입력 : 2021-12-19 18:55:44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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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전 만주서 시계 수리공 생활
- 日 고베서 피란 생활 중 가수 데뷔
- 휴전 후 민중의 삶 노래 담아 히트
- 가수들 서울로 떠나도 부산 지켜
- 노래로 근현대 생활상도 잘 표현

1990년대 후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부산에서 음반 수집을 하며 가요사 연구에 몰두하던 김종욱 씨의 초청을 받아 여러 지인과 부산을 방문했다. 그는 부산역 부근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과연 소문대로 많은 음반을 수집해서 한쪽 벽은 각종 음반으로 가득했다. 식당 안은 이미 왁자지껄한 잔치 분위기였다. 나는 한 쪽 구석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낯익은 지인들은 이미 술이 거나한 상태였고, 저마다 우리 가요와 특히 부산노래에 대한 평소의 견해를 주고받는 친교의 자리였다. 가장 흥미로운 순서는 나이가 지긋하고 관록이 느껴지는 아코디언 악사와 기타리스트 둘이 이끄는 옛 가요곡 메들리 연주였다.

시계와의 인연을 업으로 삼았던 가수 정향의 대표곡 앨범표지.
평소 아코디언 연주에 관심이 많은 나는 악사의 손가락 운지(運脂)를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건반을 쓰다듬듯 손가락이 부드럽게 타고 넘는 악사의 연주는 아름다웠다. 이윽고 잠시 연주를 쉬는 틈에 김종욱 씨가 그날 참석한 분들의 면면을 소개했다. 벽 쪽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한 노인에 대해 한참 소개했는데 뜻밖에도 그분이 바로 가수 정향(丁響, 1928~2019) 선생이었다. 6·25전쟁으로 모두가 고통과 좌절에 빠졌던 시기에서 1960년대까지 50여 곡의 가요작품을 발표해서 상처받은 겨레의 마음을 위로 격려해주었던 바로 그 주인공 정향이었다.

본명은 정천석, 1928년 경북 고령 출생으로 12세에 고향을 떠나 만주 길림성으로 가서 소년 시절을 보내고 해방 직후인 1946년 친척이 살던 부산으로 돌아와 정착했다. 그 시절에 기타와 노래에 심취했으며 시계방에서 일했다고 한다. 정천석이 시계와 가까워진 계기는 만주 시절부터이다. 친구의 시계방에서 일을 돕다가 유난히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재빨리 기술을 터득해서 모두 배웠다. 부산에 와서도 시계방에서 일을 했는데 이후 광복동 극장 앞에서 가게를 얻어 독립했고, ‘명성시계방’이란 간판도 달았다. 시계는 그에게 운명적 도구였다.

해방 직후 해군 군속으로 근무하던 허민과 친구가 되어 가요콩쿠르대회도 함께 출연해서 입상을 하는 등 가요에 꾸준한 관심을 가졌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일어나 일본으로 옮겨가 살게 되었고, 고베에서도 역시 시계방을 운영하며 노래 공부를 계속했다. 그때 정천석의 가게를 드나들던 가수 고운봉, 작곡가 김용대 등과 친교를 맺었다. 그들은 노래에 소질이 있던 정천석을 일본의 극장 쇼에 출연하도록 이끌었고, 그 무대에서 ‘신라의 달밤’ ‘가거라 삼팔선’ 등을 부르도록 했다. 그들이 정천석에게 가수로서의 예명도 지어주었다. 가객으로서의 기운을 최대한 살려가란 뜻으로 ‘소리 향(響)’을 붙여서 정향이 되었다.

그 무렵 일본에서는 악극 ‘신부 없는 잔치 집’이 인기리에 공연되었는데 이 작품은 극작가 유치진의 희곡 ‘시집가는 날’을 각색한 대본이다. 이 대본은 일제 말 총독문학상을 받은 친일적 성향이라 내용의 흐름을 바꾸어 ‘맹진사댁 경사’란 제목으로 다시 개작한 작품이다. 이것이 재일동포사회에서 악극으로 무대에 올랐는데 정향은 이 공연에서 다리를 저는 신랑 배역을 맡았다. 이 공연을 관람한 일본의 오케태평레코드 김태운 사장이 분장실로 찾아와 취입 제의를 해서 가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때 정향의 나이 24세였다. 일본의 오케태평레코드에서 ‘이국의 밤’ ‘울고 십년 울어 십년’ 등이 수록된 독집앨범을 발간했다.

1950년대 부산 가요계를 대표하는 가수 정향(왼쪽부터), 작사가 천봉, 가수 방운아.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된 직후 정향은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의 귀국소식이 신문을 통해 알려지자 부산의 작사가 천봉, 가수 한복남 등이 집으로 찾아왔다. 정향은 당시 부산의 부평동에 거주했다. 여러 교섭과 제의 속에 한복남이 대표로 있던 도미도레코드와 전속계약을 맺고 ‘방랑일기’를 귀국 데뷔곡으로 발표했다. 이후 ‘원통해서 못 살겠네’(월견초 작사, 백영호 작곡)와 ‘여자의 마음’(김부해 작사, 박시춘 작곡)이 1957년 연속으로 크게 히트했다.

이 노래는 힘든 시기 민중들의 아프고 허전한 심정을 정확하게 담아냈다. 그 일로 정향을 탐내던 미도파레코드의 임정수 사장과 한복남이 크게 다투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가요곡이 대중의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되자 레코드사에서는 연속으로 녹음 일정을 잡아서 정향의 일과는 바쁘고 힘들었다.

도미도레코드 전속 시절에 정향은 부산의 동료가수 방운아 허민 신해성 남백송 박애경 등과 다정하게 친교를 나누었다. 휴전협정 조인 직후 부산에서 활동하던 대부분의 가수가 서울로 돌아간 뒤에 부산은 몹시 허전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정향은 부산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늘 해오던 시계 수리 및 판매업을 충실하게 유지했다.

가수 정향의 대표곡으로는 ‘무너진 청춘탑’ ‘돌아오라 춘희’ ‘여인탑’ ‘울고 싶은 인생선’ ‘허무한 인생선’ ‘달려라 이국열차’ ‘이국편지’ ‘이국의 밤’ ‘추억의 달밤’ ‘부두의 비화’ ‘나 여기 왔네’ ‘아득한 내 고향’ ‘포구의 인사’ ‘잊을 수 없어라’ ‘어머님을 찾아서’ ‘무정한 인생’ ‘향수에 우는 몸’ ‘사나이 반평생’ ‘뒷골목 청춘’ ‘항구의 부르스’ ‘방랑의 소야곡’ ‘고향 길 천리’ ‘칠일간의 부산항’ ‘여인탑’ ‘원한의 북행열차’ ‘성공하여 가겠어요’ ‘유랑열차’ ‘고향 가는 완행열차’ 등이다.

특히 ‘원한의 북행열차’와 ‘칠일 간의 부산항’의 노랫말은 격동기 부산이란 공간성의 위상과 역사적 배경을 실감나게 담아내어 들려준다. 가수 정향의 애절한 음색과 창법이 더욱 심금을 울리게 한다. ‘원한의 북행열차’는 부산역을 출발한 밤 열차가 아무리 달려가도 철조망이 설치된 휴전선을 통과할 수 없다는 실향민의 절망의식을 그리고 있다. ‘칠일간의 부산항’은 선박 수리를 위해 부산항에 머물게 된 외항선 선원들의 향락적 일과를 포착해서 작품을 구성했다. 모두 부산의 근현대 생활문화사와 관련해서 의미 있는 가요작품들이라 하겠다.



타향에서 우는 몸이 내 고향 진정 그리워/ 영도다리 난간위에 기대서서 슬피 우느냐/ 밤하늘에 북행열차 부산역을 떠나갔건만/ 눈물의 철조망을 넘을 길 없어/ 눈물의 철조망을 넘을 길 없어/ 기적마저 슬피 우네 이별의 북행열차

-‘원한의 북행열차’ 1절

잘 있었나 오륙도 하와유 부산항/ 바다에 시달린 마도로스 가슴을/ 한잔에 달래보는 선술집이다/ 포구에 잠든 배는 칠일 간 소리/ 마셔라 마셔 마셔 노래하고 춤추자 남포동 거리

-‘칠일간의 부산항’ 1절

시인·가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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