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계 아일랜드인 저자 대표작
-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은유
- 당대 영국 권력 배짱있게 조롱
- 익명 출간되고 금서 지정도

- 고국 아일랜드 수탈하는 英 비판
- 인간의 속물 꼬집고 약자 편들어
- 여성 혐오 성향도 소설에 드러나

거짓이 진실을 가리는 세태를 읽어낸 작가가 세상 앞으로 경고장을 띄웠다. 풍자 문학이다. 당대 권력을 도마에 올려야 하니 강심장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스위프트도 배짱깨나 두둑했던 모양이다. 영국 황실이 얼마나 기분이 나빴으면 이 고전에 금서라는 낙인을 찍었을까. 어린이 모험 동화로 유명한 이 소설, 원래는 1726년 성인을 대상으로 출간된 풍자소설이다. 인간을 까발려 거울 앞에 세운 원전은 21세기에도 살아남았다.

표류하던 걸리버는 소인국(릴리펏) 해안에 상륙한 후 잠이 든 사이 온몸을 결박당한다. 소인국인들이 걸리버를 살펴보는 중이다.

스위프트는 영국계 아일랜드인이다. 작품 성향이 어떨지 감이 잡힌다. 그는 ‘통 이야기(1704년)’ 같은 풍자성 작품을 발표해 일찌감치 강성을 드러냈다. ‘걸리버 여행기’는 그에게 풍자 문학 대가라는 지위를 안긴 대표작.

책 서두부터 능청을 부렸다. 이 여행기는 진짜이고, 저자는 레뮤얼 걸리버(Gulliver)라며(물론 독자는 거짓말임을 알았다). 편지를 끝내며 출간일과 얼마 차이 나지 않는 일자(1727년 4월 2일)를 박았다. 걸리버란 이름부터가 풍자 풍이다. Gull(바보)+Ver(진실). ‘진실을 말하는 바보’란 뜻. 책 내용엔 당시 집권한 영국 휘그당을 비꼰 대목이 많아 불똥 튀겠다는 안팎 우려가 컸다. 육필 원고를 저자 친구가 베껴 출판사에 넘겨 걸리버란 이름으로 출간했지만 원저자가 누군지는 온 런던 사람이 알았다. ‘뜨거운’ 초판본이 출판사 안에서 좀 식었다. 못마땅했던 저자는 1735년 판본에서 원위치시켰다.

초판본 표지.

동화는 소인·거인국 모험담(1, 2부)인데 원전 그대로는 아니다. 원본은 1~4부로 360여 쪽. 초판이 출간 3주 만에 1만 부가 팔렸으니 인기 폭발. 후대 평가는 엇갈렸다. ‘허영의 시장’을 쓴 영국 소설가 윌리엄 새커리(1811~1863)는 “스위프트는 생각이 지저분하고 상스러운 말을 마구 내뱉는 자”라며 욕을 퍼부었다. ‘동물 농장’ 작가 조지 오웰(1903~1950)은 칭찬 일색. 그게 다 3, 4부 때문이다.

1부는 소인국 편. 앤틸로프호 선상 의사인 걸리버는 표류하다가 소인국(릴리펏)에 닿는다. 성인 키가 15㎝인 소인국인을 본 ‘산악 인간’ 걸리버는 너그러운 마음이 솟구쳤다고 저자는 쓰지 않았다. 깽판 치고 싶은 욕망을 애써 누르는 걸리버였기에. 인간 마음속 비열함에 대한 은유다. 소인국 밧줄 곡예 얘기는 풍자 전형이다. 이 나라에선 고관 자리를 밧줄 곡예로 결정한다. 많은 도전자가 낙상하거나 목숨을 잃는다. 부정하게 고위직에 오른 자, 출세욕에 눈먼 인사, 능력·합리가 사라진 정치인에 대한 야유다. 소인국에선 당파 트라멕산-슬라멕산이 싸움질이다. 이 대목에서 독자는 당시 영국 여야인 토리당과 휘그당을 떠올리게 될 수밖에. 저자 익살 실력도 만만찮다. 걸리버가 소인국을 떠날 때 그곳 암수 양·소를 데리고 와 영국에서 새끼를 쳐 팔아서 돈을 벌었다니! 손톱만 한 양·소를 보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나.

2부는 거인국 모험담. 걸리버는 인도행 상선 어드벤처호를 탔다가 웬 섬에 남겨졌다. 거인국(브롭딩낵)이다. 걸리버는 농부 집으로 붙들려가 애완 인간이 된다. 거인국 침대가 길이 20m 정도이니 거인 체구가 감이 잡힌다.

스위프트는 여성 혐오론자였는데 그런 성향이 1부 소인국 편에서 드러났다. 황후궁에 야밤에 불이 나자 걸리버가 오줌을 눠 진화하는 대목이 그렇다. 영국 앤 여왕이 이런 묘사에 화가 나 스위프트 인사(人事) 때 물을 먹였다고 한다. 거인국 유모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데 소인 걸리버는 이때 본 유방을 ‘구역질 나는 물건’이랬다. 스위프트는 이런 여성 혐오 성향을 끝내 고치지 않았다.

거인국에서 걸리버는 개미 인간 ‘그릴드릭’으로 불리며 유료 구경거리 신세다. 그러다 황실에 들어가는 행운을 잡는다. 거인들은 지성인이었다. 특히 국왕은 걸리버에게 영국이 채택한 입법 사법 행정을 포함해 다양한 체제를 캐물었다. 걸리버 종족에 대해 국왕이 평가를 내렸다. “너희 동족 대부분은 자연이 땅 위에 기어 다니도록 허용한 벌레 중 가장 자그마하고 해로운 족속이다.” 스위프트는 국왕 입을 빌려 당시 영국과 유럽 사회에 스민 악(惡)을 비판한다. 단두대에서 목이 날아가는 시절, 스위프트처럼 당차게 글쓰기가 쉽잖다. 조롱 속 새 같은 압박에 눌려 살던 걸리버는 드디어 거인국을 벗어난다. 그 탈출 대목은 사실과 상상, 거짓과 진실이 겹쳐 이 소설 백미를 이룬다. 20세기 후기 근대주의 작풍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

3부에선 아일랜드를 수탈하는 영국을 빗댔다. 바다에 버려진 걸리버가 맞닥뜨린 곳은 날아다니는 섬(라퓨타).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 ‘천공의 섬 라퓨타’나 제임스 카메론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떠다니는 섬이 여기서 나왔다고 보면 된다. 이 거대한 섬(총면적 40㎢)이 추진력 없이 비행한다니 우주를 지배하는 중력 법칙에 엿 먹였다(저자 속셈=불량 동전 주조를 눈감아준 아이작 뉴턴을 향해 간접 욕하기). 라퓨타인은 걸리버와 체격이 비슷하다.

인간을 줄였다 늘였다 다시 원래 크기로 돌려놓은 스위프트다. 소인국·거인국·라퓨타에서는 크기가 인간을 갈랐다. 저자는 약자를 편든다. 그에겐 ‘인간다움을 결정짓는 이성’이 존재한다며 힘을 실어준다. 이곳 지배 계층인 라퓨타인은 선하기는 한데 사색을 즐기며 건망증이 심해 누군가 입 주변을 쳐줘야 정신 차린다. 3부엔 학자에 대한 야유가 가득하다. 학자들이 온갖 물건을 대화할 때 단어 제시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대목은 ‘언어가 진실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명제로 읽힌다. 라퓨타 국왕은 섬을 타고 떠다니며 아래 육지(발리바비) 신민을 다스린다. 아일랜드를 겁박해온 영국을 떠올리게 한다.

‘걸리버 여행기(1726년 초판)’ 3부 삽화 지도엔 ‘한국해(Sea of Corea)’라고 표기돼 있다.

3부엔 일본이 개신교를 탄압하는 나라로 나온다. 18세기는 서양과 교류하기 시작한 일본에 유럽 국가가 관심을 키우던 시기. 당시 초판본 삽화 지도에 ‘Sea of Corea’ 표기가 보인다. 이미 이때 국제 사회에서 동해가 한국해(韓國海)로 불렸고 당연히 독도가 우리 땅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 고전은 한국민이 사랑할 만하다.

걸리버는 4부에서 선장이 된다. 이번엔 이성을 가진 말[馬]을 만난다. 그들은 야만인 인간 ‘야후’(지금은 없어진 포털 야후가 이 이름을 땄다)를 지배하는 나라 ‘후이늠’에 산다. 걸리버는 자신을 거두어준 말을 주인으로 섬기며, 사회·문명을 비판하는 대화를 나눈다. 이 과정에서 판사 정치인 의사 과학자 비평가 귀족 학자의 속물근성이 까발려진다. 걸리버와 망자가 나누는 대화도 흥미롭다. 성현 영웅 악당이 저승에서 소환돼 ‘청문회’가 벌어진다. 알렉산더 대왕, 한니발, 카이사르와 브루투스, 호메로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걸리버는 이들을 만나 위선과 거짓이 가득한 현세를 확인하며 영국으로 돌아가길 거부한다. “우리 하급자가 저 숭고한 위엄을 지닌 고위직 인사들을 마땅히 존경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으나 실상은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별로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스위프트식 풍자와 독설은 달리 말하면 이상사회를 좇는 갈망이다. 문인이면서 영국 성공회 사제였던 스위프트는 유토피아를 꿈꾸며 이랬다. “세상에 타락이 슬그머니 들어오는 것을 단계별로 감지하고 모든 단계마다 인류에게 끊임없는 경고와 가르침을 주어 이를 막을 겁니다.” 그가 후학인 이마누엘 칸트(1724~1804)가 쓴 ‘실천이성비판’(1788년)을 봤다면 무척 위안을 얻었으리라. 생전·사후에 풍자가 지나치다며 욕먹고, 자기 이익이 깎이면서도 세상 부조리에 끝까지 맞섰던 스위프트에게 박수를!

서평가·세상관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