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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탄생 100주년 그를 회고한다 <10> 정호웅 교수·문학평론가

주제 관통하고, 권력층 꼬집고…다양한 ‘삽입시’로 작품성 높여

  • 정호웅 홍익대 교수
  •  |   입력 : 2021-11-07 19:12:19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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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시·영시·자작시 여러 ‘詩’ 활용
- 주제 압축하고 효과적으로 전달

- 3편의 소설에 인용한 ‘적막강산’
- 그의 소설의 핵이자 길잡이 역할
- ‘8월의 사상’에선 직접 시 창작
- ‘노예’ 등 역사 반영한 단어 통해
- 자기부정 넘어 새로운 주체 진화

‘삽입시’라는 게 있다. 소설 수필 희곡 시나리오 등의 산문문학에 삽입된 시를 가리키는 말인데 소설에 가장 많이 나온다.

■ 작가 이병주하면 ‘삽입시’

   
경남 하동군 북천면 이병주문학관에 보관돼 있는, 만년필을 든 작가 이병주 초상화.
우리 현대 소설사에서 삽입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작가는 이병주이다. 중·단편 중에 삽입시가 없는 경우는 있지만, 이병주 문학의 대종을 이루는 장편 가운데서 삽입시가 들어 있지 않은 작품은 보지 못했다. 이병주 소설의 특징을 들라면 나는 이 삽입시를 먼저 꼽겠다.

이병주 소설에 담긴 삽입시는 다양하다. 지은이가 누구냐에 따라 크게 작중인물이 지은 자작시와 작품 밖 시인이 지은 시로 나눌 수 있는데, 뒤에 있는 것이 훨씬 많다. 작중인물의 자작시는 물론 작가 이병주의 창작이다. 한글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한시와 영시도 적지 않다. 이병주는 한시도 영시도 지을 수 있는 희유한 능력의 문인이었다. 작품 밖 시인이 지은 시는 우리 옛 선비의 한시, 현대시, 프랑스 시, 스페인 시, 영미 시, 중국 한시, 일본 시 등 동서고금에 두루 미친다.

이병주 소설 속 삽입시의 기능은 여러 가지다. 등장인물의 취향, 가치관, 미의식 등을 드러내기도 하고 갈림길에서 결단을 보여주기도 한다. 더 나아가 작품 주제를 압축해 담아내기도 한다. 여백이 많기에 지면을 환하게 열어 글자 빽빽한 산문의 답답함을 줄이는 기능도 있다.

우리는 이병주 소설 속 삽입시를 통해 그 시와 관계된 작중 인물과 깊이 만날 수 있다. 시 언어는 산문 언어보다 덜 규정적이기에 상대적으로 열려 있는 특별한 만남이다. 독자는 이들 삽입시와 함께 동과 서, 그리고 먼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상상의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길에서 우리는 시공의 울을 넘어 생동하면서 빛나는 시적 정신과 감각을 만나 새로워지고 풍성해진다.

   
이병주 선생이 남긴 원고. 그는 육필로 달빛이 스민 인간사의 골짜기를 이야기로 비추며 도도한 강물처럼 풀어냈다.
■ 심혼을 울린 ‘적막강산’

이병주 소설에 인용된 삽입시의 대표는 백석의 절창 ‘적막강산’인데 해방공간 종합 잡지인 ‘신천지’(1947)에 발표됐다. 고향인 북한에서 정주 오산학교 시절 은사 조만식을 도와 정치판을 누비던 때이므로 삼팔선 남쪽 서울에서 간행되는 잡지에 시를 투고할 형편이 아니었다. 절친한 문우인 소설가 허준이 아니었다면 이 빼어난 시는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벗 백석에게 이를 받아 소중히 지녔던 허준이 ‘신천지’에 투고했다. 작품 뒤에 붙어 있는 한마디, ‘이 詩稿는 내가 以前에 가지고 있던 것이다. 許俊’에서 이런 사정을 알 수 있다.

오이밭에 벌 배채 통이 지는 때는/ 산에 오면 산 소리/ 벌로 오면 벌 소리 // 산에 오면/ 큰 솔 밭에 뻐꾸기 소리/ 잔 솔 밭에 덜거기 소리 // 벌로 오면 / 논두렁에 물닭의 소리/ 갈 밭에 갈새 소리 // 산으로 오면 산이 들썩 산 소리 속에 나 홀로/ 벌로 오면 벌이 들썩 벌 소리 속에 나 홀로 // 定州 東林 九十여里 긴긴 하로 길에/ 산에 오면 산 소리 벌에 오면 벌 소리/ 적막강산에 나는 있노라



화자는 시인의 고향인 평북 정주에서 북쪽 동림까지 90여 리를 산을 넘기도 하고 들을 건너기도 하며 ‘긴긴 하로 길’을 걷고 있다. 길 주위 산과 들에는 자연의 이치를 따라 생명의 소리가 여기 솟고 저기 울려 활기찬 소리의 잔치판이 펼쳐졌다. 이 흥겨운 잔치판 속에 서니, 마음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한 화자의 마음은 더욱더 쓸쓸해진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적막강산에 나는 있노라’, 숨죽인 신음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화자가 느끼는 ‘적막강산의 쓸쓸함’에는 이민족의 식민지배 아래 눌려 살아야 했으며 급속도로 진행되는 자본주의적 근대화 소용돌이 속에서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하늘 끝을 떠돈 젊은 시인의 삶과 문학이 압축되어 있다.

이병주는 그의 소설 세 편(망향, 산하, 세우지 않은 비명)에서 ‘적막강산’을 인용했다. 언제 어디서 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가 이병주의 심혼을 깊이 울린 게 틀림없다.

이병주 소설에서 ‘적막강산’은 역사의 폭력에 치여 소중한 것들을 잃고 기다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지경까지 이른, 그리하여 불모의 의식 캄캄한 절망에 갇힌 사람의 어둡고 무거운 내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 ‘적막강산’에 감응하여 수시로 읊조리는 그 사람은 이병주가 30년 가까운 긴 창작활동 내내 집요하게 파고든 작가 자신이며 동시에 1920년 전후에 태어나 역사의 우여곡절 험로를 몸부림치며 걸은 같은 세대 지식인들이다. 이 점에서 ‘적막강산’은 이병주 소설의 핵이자 독자를 이병주 소설의 중심으로 안내하는 길잡이다.

‘적막강산’에 놓여 휘청대는 이병주의 인물 중에는 이 상황을 감당하지 못해 주저앉고 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견뎌 일어서 나아간다. 교육자, 학자, 작가, 혁명가, 테러리스트 등이 되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기획하고 반성하며 일구어 나가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병주 문학은 적막강산의 문학이면서, 그 적막강산의 상황을 벗어나고자 고투하는 능동적 정신이 이끄는 ‘탈 적막강산’의 문학이다.

■ 자기부정에서 새로운 주체로

이병주 소설에 들어 있는 삽입시의 또 하나 대표 작품은 단편 ‘8월의 사상’에 나오는 작중인물의 자작시이다. 제목은 없다. ‘8월의 사상’은 주인공 이력이 작가의 그것과 똑같으니 허구를 거의 들이지 않은 자전적 소설이다. 이 자전소설의 한복판에 놓인 제목 없는 자작시에는 자기 부정의 비통한 목소리가 울리고 있다. 바로 작가 이병주의 육성이다. 모두 27행의 꽤 긴 시인데 몇 부분만 보자.



너는 도대체 뭐냐./ 용병을 자원한 사나이./ 제값도 모르고 스스로를 팔아버린/ 노예. // 먼 훗날 / 살아서 너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더라도/ 사람으로서 행세할 생각은 말라./ 돼지를 배워 살을 찌우고 / 개를 배워 개처럼 짖어라. // 헌데 네겐 죽음조차도 없다는 것은/ 죽음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를 지은 이는 “이지러진 청춘엔 이지러진 청춘의 철학이 있다. 그때의 내 철학의 단편을 주워보면”이라고 했는데, ‘그때’는 주인공이 중국 소주에서 군마를 돌보던 1944년에서 1945년 사이, 욕되게도 일본군 병정이 되어 침략 전쟁에 나섰다는 자신에 대해 견디기 어려운 모멸감으로 고통스러워하던 때이다. 그 ‘철학의 단편’이 모여 이루어진 이 자작시의 핵심어가 ‘용병’ ‘노예’ ‘죽음’ 등 섬뜩한 자기 부정의 말들인 것은 이런 사정의 반영이다.

일본의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에 동조하여 부귀영화를 누린 이들은 대체로 그 사실을 감추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내세워 책임을 회피하거나, 민족을 위한 자기희생적 친일이라는 허구의 논리를 조작하여 합리화했다. 자기 반성에 나아간 사람도 있지만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자신을 ‘용병’ ‘노예’로 규정, ‘죽음조차 없는’ 짐승의 자리로 추방하는 이 자작시의 단호한 자기 처벌의 윤리는 한국 현대사의 근본을 무찌르는 준엄한 잣대일 수 있다.

자기 부정 없이는 치욕의 과거로부터 그 과거에 갇힌 정신과 몸에서 벗어나 신생할 수 없다. 이병주 소설의 인물들은 ‘자기 처벌’이라고 불러 마땅한 전면적이고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해 나아간다. 그 나아감은 새로운 주체 세우기, 곧 신생일 터인데. 그 신생의 행로가 저처럼 역사를 증언하면서 역사를 넘어서는 크고 높은 이병주 문학을 이루었다.

이 밖에도 이병주 소설에 삽입시는 대단히 많다. 타락한 정치 권력의 폭력에 유린당한 인물의 원통한 사연을 증언하는 이병주 문학의 한 특성과 관련된 당나라 시인 이하의 작품들, 낮고 가난한 주변부를 택하여 자신을 소외시킨 시인들의 ‘영락에의 향수라고나 할 수 있는 미묘한 정열’을 예찬하는 작가 정신과 관련된 김종삼의 ‘날마다 추모합니다’ ‘실기’ ‘장편 2’ 등을 들 수 있겠다.


   
◇ 정호웅 교수는

▷홍익대 교수 ▷문학평론가 ▷ 저서 ‘대결의 문학사’ ‘문학사 연구와 문학교육’ ‘한국의 역사소설’ 등 ▷2021년 이병주국제문학상-이병주문학연구상 수상.


※공동 기획 : 국제신문·이병주문학관·상지E&A/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그린조이

※후원 : 하동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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