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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29>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왕’ 외 5편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

‘비극’ 품을 줄 아는 자만이 비로소 ‘희극’의 가치 안다

  • 서부국 서평가
  •  |   입력 : 2021-10-28 19:29:01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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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천연극 즐겼던 고대 아테네
- 디오니소스 대제전 매년 개최
- 비극경연에 많은 극작가 도전장
- ‘아가멤논’ 쓴 아이스킬로스 등
- 3인 비극 대표작가로 명성 누려

- 크고 작은 전쟁 치러온 시민들
- 디오니소스 극장으로 몰려들어
- 슬프고 잔혹한 주인공 운명에
- 분노하고 탄식하며 마음 달래

아르고스 고향 집 앞에 남편이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우뚝 섰다. 트로이 전장에서 10여 년 만에 무사히 돌아온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이다.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환영사를 쏟아내는데 끝맺는 말이 왠지 섬찟하다. “이제 뒷일은 잠도 정복하지 못해온 내 마음이 신들 도움으로 적절히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매년 봄 고대 그리스 아테네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비극 경연이 열렸다. 반원 마당이 합창대 무대인 ‘오르케스트라’, 중앙엔 제단이 자리 잡았다.
뭘 처리한다는 말일까. 남편이다. 아내가 한에 사무쳤다. 아가멤논이 딸 이피게네이아를 산 제물로 바쳤기 때문. 그리스 연합군 함대는 트로이 원정을 앞두고 아울리스 항구에 발이 묶였다. 여신 아르테미스가 역풍을 보내 출항을 막자, 아가멤논은 딸을 희생한 대가로 출전한다. 여기서 던지는 질문. 아가멤논은 애국자인가, 딸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인가.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마땅한 응징을 한 게 아닐까.

고대 아테네인들은 이런 질문을 받았다. 원형극장에 오른, 인기 높은 장르인 비극을 통해서이다. 비극 작가 3명이 명성을 누렸다. 들머리 얘기는 ‘맏형’인 아이스킬로스가 쓴 ‘아가멤논’에 나온다. 단독 작품은 아니다. ‘오레스테이아(오레스테스(아가멤논 아들) 이야기란 뜻.) 3부작’ 중 1부다. 2부 ‘코에포로이’(제주(祭酒)를 바치는 여인들), 3부 ‘에우메니데스’(자비로운 여신). 줄거리는 그리스신화에서 왔다. 아테네 관객은 내막을 잘 알기에 애매한 대사를 척척 알아듣는다. 클리타임네스트라 대사도 그렇다. ‘극적 아이러니’다. 무대 위 등장인물은 아직 모르는 상태지만, 관객은 긴장해 극에 빠져든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시민은 노천 연극을 즐겼다. 해마다 3월 말~4월 초 아테네 주관으로 공동체 결속을 다지는 디오니소스 대제전이 열렸다. 비극 경연은 가장 인기를 끄는 부대 행사. 온 아테네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승하는 영예를 누리고자 많은 극작가가 도전장을 던졌다. 기원전 458년, 아이스킬로스는 13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월계관을 썼다. 이때 수상작이 ‘오레스테이아 3부작’.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 중 유일하게 남은 3부작이다.

이 3부작 중 1부 ‘아가멤논’은 얼핏 보면 치정 살인극 같다. 귀향한 남편이 아내와 정부 아이기스토스 손에 참살당하니까. 하지만 관영 경연 대회에서 우승한 작품이다. 시사하는 바가 없을쏜가. 디오니소스 대제전은 시민축제이면서 한편으론 권력 의지가 실현되는 장이었다. 당시 아테네는 융성기를 맞았다. 이런 시대 배경 아래 시민은 타국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찾았다. 그들은 안락한 객석에 앉아 ‘폭풍이 치는’ 무대 위를 보며 안도·우월감을 즐겼다. 위정자 덕에 보호받고 선진 문화를 누린다는 인식이 그것. 비극 우승작 속엔 권력 의자가 일렁인다. ‘시민이여, 우리를 따르고 복속하라.’ 비극 공연은 은밀한 통치 수단.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죄로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고 있다.
인파가 아크로폴리스 내 디오니소스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렇다고 관객이 죄다 정치에 놀아난 건 아니었다. 크고 작은 전쟁을 직접 치러온 그들. 자신들 삶과 달라 보이지 않은 비극 속 주인공을 보면서 속을 풀었다. 슬프고 잔혹한 운명을 대리 체험하면서 자기 삶을 돌아봤을 터이다. 울고 웃고 분노하고 탄식하면서 디오니소스 극장은 거대한 공동 씻김 터가 됐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가 실현되는 신성한 장소. 현대인이 잃어버린 곳이다.

오레스테스 2부는 ‘코에포로이’다. 아가멤논 아들 오레스테스가 어머니와 정부를 죽여 앙갚음한다. 3부 ‘에우메니데스’에선 아테네 법정이 주 무대. 오레스테스 죄과가 가려진다. 극작가는 민주 법정을 보여주며 당대 선진 사회였던 아테네를 내세운다. “인간은 신이 펼쳐놓은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자신이 한 행동에는 책임을 져야지요. 신은 ‘피의 복수’를 방치합니다. 인간이 복수를 멈춰야 합니다.” 오레스테스가 이렇게 자각하는 순간 그를 추격하던 ‘복수의 여신들’은 온화한 여신 ‘에우메니데스’로 변신한다.

아이스킬로스는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란 작품도 썼다. 티탄 신족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금지된 불을 전하자, 제우스는 그를 바위에 묶는 벌을 내린다. 제우스는 예언자 프로메테우스가 자기 미래를 알려주지 않자 벼락을 쳐 그를 바위 더미 속에 묻어버린다. 독재(제우스)에 맞서는 자유 의지(프로메테우스)를 그렸다는 분석. 극본을 보면 ‘힘(폭력)’이라는 등장인물이 나온다.

   
스스로 눈을 찔러 앞을 못 보는 오이디푸스 왕에게 딸 안티고네가 안겨 슬퍼하고 있다. 풀크란-장 해리엇 작.
‘오이디푸스왕’은 후대에 프로이트가 이름값을 높여놓기 이전인 고대 그리스 시절 이미 절찬 비극이었다. 소포클레스 대표작. 테베왕이 된 오이디푸스가 신탁을 전해 듣는 장면으로 막이 오른다. 내버린 젖먹이 아들 오이디푸스는 장성해 얼굴 모르는 아버지를 죽인다. 게다가 남편 잃은 어머니와 결혼해 자식들을 낳는다. 진상을 모두 알게 된 오이디푸스왕은 눈을 스스로 찔러 시각장애인이 돼 방랑길에 오른다. 어머니이자 아내였던 왕비는 목매 죽자 비극은 잠시 멈춰 선다.

비극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소포클레스 극작 ‘안티고네’ 속으로. 오이디푸스가 남긴 혈육, 두 아들(폴리네이케스·에테오클레스)과 두 딸(안티고네·이스메네)은 참상을 겪는다. 두 아들은 창으로 서로 찔러 같이 죽는다. 문제는 시신 처리. 에테오클레스는 테베를 침략하는 폴리네이케스와 싸우다 전사했기에 경건하게 장례가 치러졌다. 하지만 크레온 왕은 배반자 폴리네이케스를 장례 지내주는 자는 돌로 쳐 죽인다는 포고령을 내린다. 여동생 안티고네는 이를 거역하고 들짐승이 뜯던 오라비 시신을 수습해 장례 치르다 잡혀 동굴에 갇혀 굶어 죽게 됐다. 안티고네는 묻는다. “지상(테베)이 세운 원칙만 따라야 하나? 죽은 이를 묻어야 하는 지하(저승세계) 법칙은 어겨도 되나?” 파국이 이어진다. 안티고네가 목을 매 자결하자, 약혼남인 크레온 왕 막내아들 하이몬도 뒤를 따른다. 어머니 왕비 역시 목을 매 아들과 저승으로 동행한다.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작가 중 ‘막내’ 격인 에우리피데스는 극작 ‘메데이아’를 썼다. 남편에게 배신당해 분노한 아내가 일으키는 비극. 메데이아는 콜키스 공주였다. 그리스에서 온 코린토스 왕족 이아손에게 반해 아버지와 조국을 배반하고 함께 도망친다. 추격해오는 오빠마저 죽였다. 메데이아는 결혼해 두 사내애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이아손이 코린토스 공주에게 새장가 들려 하자 복수극을 펼친다. 남편에게 고통을 주려고 예비 신부와 장인, 이아손 두 아들을 죽인다. 이 비극은 신의 후손인 메데이아가 두 아들 시신을 용이 끄는 수레에 싣고 코린토스를 떠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아이스킬로스 ‘아가멤논’에서 트로이 전쟁 제물이었던 이피게네이아가 에우리피데스가 쓴 희곡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에선 생존 인물로 나온다. 여신 아르테미스가 그녀를 빼돌려 크림반도 타우로이족 타우리케로 데려가 여사제로 삼았다. 이피게네이아는 이곳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훔치러 왔다가 붙잡혀 제물이 된 남동생 오레스테스, 친구 필라데스와 재회한 후 그들과 같이 고국 그리스로 돌아온다.

   
비극은 인간 감정을 낳는 어머니다. 비극을 품을 줄 아는 이는 기쁨이 가진 가치를 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올려다보는 빛이 더 환하다. 비극, 사귀어볼까나.

서평가·세상관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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