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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다형의 시 둘레길 <7> 요산 김정한 작가 만나는 길

자연의 이치 배우는 계절, 요산과 ‘민중의 아픔’을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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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 눈물 다룬
- 그의 소설 ‘사하촌’ 지팡이 삼아
- 작품 배경인 금정산을 걸었다

- 여전히 갑을관계 존재하는 사회
- 더는 고통 계속되지 않도록
- 상대방 어려움 공감할 줄 아는
- ‘사람답게’ 살아가리라 다짐한다

분기탱천한 시절도 가고, 우리의 젊음도 철이 들고, 크게 나부끼던 바람도 소소해졌다. 기세등등한 여름이 물러가고, 제 몸에 쟁인 과즙과 알곡을 추수하는 계절이 왔다. 내 생과 시의 알곡을 키질한다. 처져 앉는 것보다 검불이 더 많다. 가을은 가감승제의 계절이자, 땀 흘린 만큼 거두는 자연의 이치를 배우는 계절이다. 후회와 부끄러움으로 자신을 가만히 돌아보는 관조의 시간이다.
   
부산 금정구 남산동에 자리한 요산문학관. 오는 23일 시작하는 올해 요산문학축전 준비가 한창이었다. 왼쪽은 생가 건물.
철학가 데카르트는 “좋은 책을 만나는 것은 과거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라 했다. 독일의 소설가 장 파울은 “인생이란 한 권의 책과 같다”고 했다. 서재에 앉아 책을 뒤적이며 ‘일곱 번째 시 둘레길을 어디로 할까’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색에 잠긴 내게 작가 요산 김정한(1908~1996) 선생이 불쑥 소설 ‘사하촌(寺下村)’을 내밀었다. 나는 ‘사하촌’에 나오는 사람들이 저마다 ‘사람책’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하촌’ 속 사람책을 만나는 여정을 떠올려봤다

“책은 먼 마을로 가는 길이며 지붕이요, 우물이며 탑이요, 독자의 지팡이”(L. W. 리즈)라는 문장을 인터넷을 검색하다 만났다. 나는 요산의 소설 ‘사하촌’을 지팡이 삼아 소설의 배경인 부산 금정산으로 발품을 팔았다.

■ 민중 보듬는 소설 ‘사하촌’

   
요산문학관 요산 김정한 작가 흉상.
“타작마당 돌가루 바닥같이 딱딱하게 말라붙은 한가운데, 어디서 기어들었는지 난데없는 지렁이가 한 마리 만신에 흙고물 칠을 해 가지고 바둥바둥 떨고 있다. 새까만 개미떼가 물어댈 때마다 지렁이는 한층 더 모질게 발버둥을 친다. 또 어디선지 죽다 남은 듯한 쥐 한 마리가 튀어나오더니 종종걸음으로 마당 복판을 질러서 돌담 구멍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요산 김정한 소설 ‘사하촌’에서)

위의 글은 요산의 단편소설 ‘사하촌’의 서두 일부분이다. 요산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치열한 생존의 몸부림을 소설의 첫 장면에서 압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일본의 수탈이 가장 극심했던 1930년대, 요산은 개미 떼에 물어뜯기는 지렁이의 모습에서 일본인과 일본 앞잡이들의 수탈에 괴로워하는 조선인들의 현실을 보았을 것이다.

소설 ‘사하촌’은 보광사 스님과 관료 등 지배계층에 의해 억압받는 농민들의 삶과 저항의식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보광사의 권력을 등에 업고 부유한 삶을 살아가는 보광리 사람들과 보광사 땅을 소작하며 힘든 삶을 살아가는 성동리 사람들의 삶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국 참다못한 성동리 사람들이 보광사에 대한 항거를 일으키고, 아이들마저 보광사 절을 불태우러 가는 장면을 통해 지주와 관료의 부조리에 맞서는 민중의 저항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 금정산 품을 요산과 걸으면

소설 ‘사하촌’의 이야기는 단순히 기득권과 민중의 대립 구조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당시 우리 민족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과연 일제강점기 지주의 땅은 진짜 지주의 땅이라 볼 수 있는가? 우리의 강산은 도대체 왜 이토록 이상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일까? ‘사하촌’의 사람들은 과연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인가? 그 상대는 지주의 위치에 있는 보광사인가? 조선의 땅을 빼앗은 일본인가?

절이 극락왕생을 빌미로 땅을 시주받아, 시주를 한 불자를 소작농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불교 교리에 온당한 것인가? 힘없는 자의 등골을 빼먹는 세태가 비단 그때뿐이었겠는가! 이러한 일련의 일은 1930년대 소설 속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사회에서도 시대와 상황만 다를 뿐 갑과 을의 싸움, 을 간의 생존경쟁은 반복된다. 우리는 아픈 역사가 반복하지 않도록 ‘사하촌’ 속의 ‘사람책’을 지팡이 삼을 수 있을 것이다.

■ 요산문학축전 10월 23일 시작

시월에는 ‘변종들아 썩 물렀거라’ 라는 표어로 제24회 요산 문학축전(10월 23일부터 10월 30일까지)이 열린다. 요산문학관(부산시 금정구 팔송로 60의 6 / 남산동 662번지)은 요산 김정한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그는 금정산 자락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사하촌’은 실화(1990년 한겨레신문 요산 김정한 인터뷰 참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사하촌’이 조선일보 신춘문예(1936)에 당선되자 사찰의 비리를 폭로했다는 이유로 요산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뭇매를 맞고 두 달간이나 일어나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사람답게 살아가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와 타협한다거나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이 갈 길이 아니다.” (요산 김정한 소설 ‘산거족’ 일부)



위의 문장은 요산 선생의 삶이자 정신 그 자체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답게’ 살기가 쉽지 않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사람답게’라는 말에 오래 잠겼다. 내가 사람답게 살려면 상대방도 사람답게 대해야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된다. 물욕과 아귀다툼을 없애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측은지심이 필요하다. 이러한 요산의 문학정신을 내가 쓰는 시의 나침반이자 지팡이로 삼으리라 다짐해본다.

■ “변종들아 썩 물렀거라”

금정산 고당봉 아래에는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황금빛 샘이 있다. 그 샘에는 금빛 물고기인 ‘범어’가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샘을 ‘금샘’이라 하고 그 산자락에 지은 절을 ‘범어사’라 했다. 나는 내 생의 사막을 걸어가는 한 마리 단봉낙타가 되어 지혜의 샘을 찾아갔다. 범어사(梵魚寺)를 에둘러 북문으로 접어들자, 빗나간 인연을 기다리는 상사화 꽃대가 오매불망 서 있었다. 울퉁불퉁한 돌계단이 한눈을 팔지 못하게 했다.

비 온 뒤, 도랑의 하심(下心)을 가로막는 큰 바위가 보광리 사람만 같았고, 그 바위에 온몸으로 부딪히는 물이 성동리 사람만 같았다. 소설 ‘사하촌’ 속 성동리 사람들의 처지가 안타까워 갈비뼈가 삐걱거렸다. 바위에 머리를 찧는 물이 소리 내어 울었다. 성동리 사람들의 억장 무너지는 소리를 냈다.



泉心常在外(천심상재외) 언제나 샘의 맘은 바깥세상 치닫는데

石齒苦遮前(석치고차전) 험한 돌 괴롭게도 앞을 딱 가로막네

掉脫千重險(도탈천중험) 그래도 우여곡절 다 헤치고 지나가서

夷然出洞天(이연출동천) 태연하게 술술 흘러 골짜기를 나간다네?

(정약용 ‘샘물을 노래함’전문)



   
궁극의 지혜, 궁극의 선, 궁극의 힘은 머뭇거림을 거부한다. 샘은 바깥세상을 치달아 강이 되고 바다에 이른다. 샘물은 험한 돌이 괴롭혀도 우여곡절 다 헤치고 냇물이 되고 강이 되어 바다로 간다. 이 작은 물의 노래가 힘겨운 오르막 고비마다 힘을 실어주었다.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뜬눈이다. ‘나라 잃고 주저앉은 정신의 뼈대를 곧추세워라’라며 요산이 일제강점기에 ‘사하촌’을 통해 내리친 죽비 한 방!

시민기자·시인 annajsn@hanmail.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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