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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탄생 100주년 그를 회고한다 <5> 강남주 시인·전 부경대 총장

학생기자에게도 깍듯했던 나림…문장·생각 닮으려 그의 글 오려 다녀

  • 강남주 시인
  •  |   입력 : 2021-09-26 19:19:55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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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보 인쇄 위해 들린 국제신문사
- 편집국장이었던 이 선생 첫 대면
- 중국집서 요리와 빼갈 접대하며
- “학보 편집국장님 잘 모셔” 농담도

- 선생이 집필한 칼럼·소설·논설집
- 세상을 보는 넓고 깊은 시선 선사
- 그 원천엔 성실한 글쓰기 있었다

나림 이병주 선생을 처음 뵌 것은 내가 대학신문 학생기자였을 때다. 그때 그 대학신문은 국제신문사에서 조판과 인쇄를 했다. 그런 연유로 이병주 선생이 주필 겸 편집국장을 겸하고 있는 국제신문사를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그럴 무렵 어느 날 대학신문의 편집지도교수였던 향파 이주홍 교수님과 함께 국제신문사에 들렀다. 석간 마감을 막 끝낸 시간이었다. 이주홍 교수님은 편집국장 겸 주필인 이병주 선생, 문화부장인 최계락 선생과 친숙한 사이였다. 세 명이 회사 건너편 중국집에서 점심을 했다. 합석한 나는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이병주 선생을 지근거리에서 뵙게 되었다. 두꺼운 검은 테 안경을 쓴 선생은 음식이 나올 동안 인쇄 냄새를 풍기며 막 나온 신문을 잠시 훑어 봤다. 탕수육이 나오자 신문을 한쪽으로 치워 놓으며 “빼갈도 한 병, 여기 수대학보 편집국장님도 계시니 잘 모셔-”라고 주인에게 말했다. 나를 편집국장님이라고 하는 말에 나는 안절부절이 되었다. 하지만 선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유머를 한 뒤 나에게 직접 빼갈을 권했다.

그 무렵 선생이 집필하는 명칼럼 ‘도청도설’로 국제신문은 그야말로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었다. 유려한 문장, 세상을 보는 넓고 깊은 시선에 반해 200자 원고지 4~5매 정도 되는 그 칼럼을 송두리째 옮겨 적으면서 선생의 문장과 생각을 닮고 싶어 했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그날의 ‘도청도설’은 낙엽의 조락과 인생의 영고성쇠를 비유했다. 약간은 비장하고, 또 약간은 애상에 젖은 글이었다. 그 글도 오려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오른쪽 사진 두 장은 국제신보(현재 국제신문)에서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우리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정열을 바쳐 왕성하게 언론인 활동을 하던 때의 이병주 선생 모습이다. 경남 하동군 북천면 이병주문학관 전시실. 전민철 기자 jmc@kookje.co.kr
■ “수대학보 편집국장 오셨다!”

그 뒤에도 신문사에 계속 들락거렸다. 그럴 때면 선생은 곧잘 편집국장 패가 놓인 책상 위에 두 발을 쭉 뻗어 올린 채 의자에 반쯤 누워 때로 타임지를, 때로 일본 월간지 ‘문예춘추’를 읽고 계셨다. 그만큼 편집국 분위기가 유연하고 자유로웠다. 어느 날은 신문사에 들른 나를 본 선생이 “어이- 최계락이, 수대학보 편집국장 오셨다”고 외쳤다. 최계락 부장에게 학보 편집지도를 받기 위해 신문사를 간 어느 날이었다. 뜻밖의 이 유머 섞인 말에 당황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선생은 내가 고향의 한참 후배임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 아닌가 하는 짐작이 들었다.

1961년이었다. 새해 벽두 국제신문 1면 머리에 ‘통일에 민족역량을 총집결하자’라는 논설이 실렸다. 선생은 1960년 12월에는 ‘새벽’에 ‘조국에 부재’라는 글도 실었다. 남북으로 갈려 사는 우리에게 산하(山河)는 있지만 조국은 없다는 담론이었다. 이념을 제쳐놓고 통일부터 해야 제대로 된 조국을 되찾을 수 있다는 요지였다. 해방도 겪었고 4·19 때는 데모에도 뛰어들었던 감수성 많은 대학생이던 나는 그 글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 얼마 뒤 또 신문사에 들렀을 때다. 선생은 누런 색 표지의 책 한 권을 주셨다. ‘중립의 이론’. 선생이 중심이 돼 몇몇 논설위원이 함께 쓴 논 설집이었다. 표지를 열자 ‘강남주 군(姜南周君)’이라고 만년필로 쓴 글씨가 눈에 확 다가왔다. 내 이름까지 속표지에 적어 주다니, 감동했다.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 얼마 뒤 5·16이 터졌다. 선생은 그 책 때문에 북진통일이 아닌 중립국을 표방하는 용공분자라고 체포됐다. 그리고 사형구형을 받았다. ‘혁명공약’ 첫머리에 반공을 국시로 했던 박정희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 같다. 옥고를 치른 얼마 뒤 선생은 감형(?)으로 석방됐다. 그 뒤 기억은 흐릿하다. 대학원에 가고, 취직하고 올챙이 방송기자가 돼 사건을 쫓는 일에 몰입된 나는 다른 일은 잊었던 때문이다. 그 무렵 교양지인 ‘월간 사상계’와 ‘새벽’은 인기가 대단히 높았다. 그 두 잡지는 바쁜 틈에도 짬을 내 수시로 읽었다. 1965년 여름철인 것 같다. 그때 이병주 선생의 중편 ‘소설 알렉산드리아’가 ‘새벽’에 발표됐다. 사건기자로 숙직 당번이었던 그날 밤 방송국 숙직실에서 소설 속 유치장을 떠올리며 나는 그 중편을 단숨에 읽었다.

소설 첫머리, 주인공이 감옥에서 형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처음부터 눈을 확 끌어 잠을 잘 수 없게 했다. 그 소설이 의미하는 은유에 갇혀 며칠을 알렉산드리아라는 지명을 더듬었고 사상이란, 정치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의 답을 찾아 헤맸다. 견딜 수 없는 갈등도 있고 복수심도 있으며 사상적 방황을 끝낸 주인공이 뉴질랜드 근처 어느 섬으로 떠날 때 내 상상도 동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품에 묻은 작가의 잔상을 더듬으며.

유감스럽게도 그 많은 이병주 소설을 다 읽을 수는 없었다. 너무 방대했다. 내가 게을렀던 탓도 있었다. 시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소설론보다는 시의 이론을 천착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변명이라면 변명이다. 그러나 상당수가 대작이었던 선생의 소설 가운데 내가 읽은 것들은 뇌리에서 잠들지 않고 있다. 선생의 사상과, 역사를 보는 눈, 소설이 갖는 단단한 서사 구조, 세상사를 풀어내는 박람강기의 탁견은 이야기라는 장치를 갖추고 논바닥이 가뭄에 물을 흡수하듯 내게 흡수돼 영영 잊을 수 없게 된 작품이 많다. 식민지 청년으로서 일본에서 공부한 젊은이의 고뇌, 전쟁 광기에 휩쓸려 중국 쑤저우(蘇州)로 끌려가 일본군으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모순 체험, 해방 공간에서 우리가 겪어야 했던 집단지성의 혼돈과 갈등, 이런 것이 소설 바탕을 그렇게 탄탄하게 했던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비결은 성실한 ‘출퇴근’”

‘소설 알렉산드리아’가 발표된 1년 쯤 뒤, 선생의 두 번째 작품 ‘마술사’가 ‘현대문학’에 발표됐다. 주먹을 쥐었다 펴면 주먹 속에서 꽃이 나온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나를 끌고 간 스토리는 최면에 빠진 사람들의 착각사회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지리산’ ‘관부연락선’ 등은 전문가들의 치밀한 분석과 해설이 있기에 나에게까지 용훼가 허락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조선일보에 연재된 ‘바람과 구름과 비(碑)’는 날마다 신문을 기다리면서 읽었던 기억이 새로워 독후감 한마디 첨언하고 싶다.

처음 얼마쯤 읽어나갈 때 이 소설은 영락없는 외설이었다. 그러나 좀 더 읽어나가자 관상쟁이 최천중의 애정행각을 다룬 야한 소설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신권이 왕권을 압도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혼란의 시대를 극복하고 혁명을 꿈꾸는 야망가가 최천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보이자 소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웅장하고, 무게감 있고, 권력의지에 사로잡힌 그의 치밀한 계획이 읽힐 때, 그 주인공은 한 시대의 혼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 인물인가까지도 궁금해서였다. 그때 나는 이미 이병주 선생의 팬이 되어 있었다.

선생은 서울로 옮긴 뒤에도 한 번씩 부산에 들렀다. 그 구체적 목적은 모른다. 부산에 머무는 동안 선생을 가끔 뵐 수는 있었다. 입담은 구수했고, 이야기 속 생각은 언제나 신선했다. 선생을 뵐 때는 동향 선배 몇 분과도 가끔 합석했다. 선생의 말을 들을 때 선생은 정치적 야망도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세상 모순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눈, 그 개혁의 방법이 묻어 있는 대화에서 그런 그의 사상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선생이 서거하기 얼마 전 부산에 들렀을 때, 이주홍 선생과 함께 시내 유명한 진주비빔밥 집으로 선생을 모신 일이 있다. 선생이 좋아한 곳이다. 선생은 여전이 뛰어난 화술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소설을 빠르게 다 집필할 수 있습니까?” “강(남주) 교수도 아침 아홉 시쯤 출근하지? 나도 그 시간이면 우리 집 이층으로 출근해. 그래서 저녁 다섯 시까지는 게으름 피우지 않고 글을 쓰네. 그러면 그 정도는 쓸 수 있어야 되지 않겠나? 퇴근시간이 되면 무교동에 나가 술도 한잔씩 하고 말이야.” 그랬던 선생이 얼마 뒤 부음으로 근황을 알려줬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장가, 철학가, 사상가의 모습을 그 뒤로는 영영 만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강남주 시인은

▷1939년 경남 하동 출생 ▷부경대 총장, 제1대 부산문화재단 대표이사,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등재 한국 측 학술위원장 등 역임.


※공동 기획 : 국제신문·이병주문학관·상지E&A/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그린조이

※후원 : 하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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