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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탄생 100주년 그를 회고한다 <3>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

산·강·바다 모두 품은 고향 하동처럼, 그의 작품 주연엔 귀천이 없다

  •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
  •  |   입력 : 2021-09-12 19:07:16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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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인부터 막걸릿집 작부까지
- 신분 높낮이 없이 주인공 캐스팅
- 잠시 머문 진주·마산·부산까지
- 고향으로 품으며 그리워하기도

- 작가 인생 전환기 삼던 북한산
- 생전 즐겨 걷던 길 아담한 카페
- 작품 여럿 진열돼 문학관 온 듯

문자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익힌 세대에게 문인은 시대의 스승이었다. 그 세대에게 문인이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본질을 통찰하는 고도의 훈련을 습득한 진인(眞人)이었다. 문학작품은 시대의 거울이자 개인과 공동체 삶의 성찰을 담은 경전인가 하면, 대안정부를 세우자는 새 시대의 격문이기도 했다.
서울 북한산 자락에 작은 카페가 있는데, 마치 ‘이병주문학관 비공식 분관’처럼 작가 이병주를 기리는 소담한 공간으로 정성스레 가꾸어놓았다.
■ ‘우리 모두’를 주역에 캐스팅

나림(那林) 이병주는 20세기 후반 대한민국의 소설가였다. 한국문학사에 명멸했던 무수한 별들 중에 단 하나만을 고르라면 이병주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의 작품을 합치면 곧바로 대한민국 국민의 삶의 총체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근대문예비평’이라는 전인미답의 지적 영역을 개척한 김윤식 교수(1936-2018)는 이병주에 집착한 이유를 이렇게 들었다.

혁명가, 애국지사, 정치가, 장군, 언론인, 지식인, 대학생, 기업인, 살롱 여주인, 막걸릿집 작부, 사기꾼…. 높낮이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작품의 주역으로 캐스팅했고, 그들의 사연을 사랑과 사상, 그리고 인간성과 운명의 이름으로 포용하였다. 당대의 인물뿐만 아니라, 역사의 행간에 묻혀버린 선인들의 삶도 녹여 담았다.

거의 모든 대한민국 작가의 글을 읽고 정성 들여 평을 쓴 김윤식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붙들고 있는 작가는 다름 아닌 이병주였다.

■ 청춘을 빼앗긴 세대

“우리에게 청춘은 없었다. 우리는 청춘을 빼앗긴 세대다.“ 그는 탄식했다. 이민족의 압제에, 명분 없는 전쟁에, 끝이 보이지 않는 궁핍과 내일 없는 좌절에, 미처 품어보지도 못한 꿈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불행한 세대라며 버릇처럼 쓰고 말했다. 그랬기에 작가로서는 축복받은 세대였다. “나라가 불행하면 시인이 행복하다(國家不幸詩人幸).” 그가 즐겨 인용하던 옛 중국 시인의 구절이었으니.

3·1만세 사건 직후에 식민지 소년으로 태어나 지배자 일본의 제도 속에서 작가 의식이 형성되었다. 학교에서 배운 공식어와 집에서 사용하는 생활어, 두 언어로 나뉘어 엉킨 ‘이중자아’를 품고 살아야만 했다. 황국신민과 민족주의자, 가아(假我)와 진아(眞我)를 함께 갈무리하며 위태로운 줄타기를 익혀야만 했다. 이렇듯 아버지가 모르는 언어와 세상을 배운 그는 후일 그 언어와 세상을 거부하는 아들 세대를 상대로 답답한 말씨름을 해야만 했다.

10대의 반항아로 진주농업중학교를 뛰쳐나온 그는 일본 유학, 학병, 해방과 이데올로기의 대립, 군사 쿠데타와 투옥에 이르는 격동의 세월을 살았다. 대학교수에서 언론인을 거쳐 전업 소설가로 변신한 후 짧지 않은 세월 세인의 사랑과 시샘을 함께 누렸던 72년에 걸친 그의 화려한 행장(行狀)을 일러 ‘사랑과 사상의 거리재기’로 명명한 적이 있다. “사랑이 없는 사상은 메마르고 사상이 빠진 사랑은 경박하다.”

■ 지리 섬진 하동 진주 마산

화가 이영비가 이병주 작가를 그린 ‘작가의 초상’.
문인에게 고향이 따로 없다는 말이 있다. 온 세상이 그의 몫이라고 한다. 그러나 음화(陰畵)로만 다가오는 작품의 구절은 작가의 고향 산천과 인물이 더해져야만 온전한 채색이 가능하다. 누구에게나 고향과 조국은 정신적 삶의 버팀목이다. 고향이란 떠나서 그리워하고 이따금씩 되찾곤 하는 장소에 그치지 않는다. 숫제 평생토록 가슴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 고향이다. 세계의 명작 소설은 따지고 보면 모두 향토문학이 아니었던가.

이병주는 경상남도 하동에서 태어났다. 그를 작가로 키워낸 정서적 자양분은 모두 지리산과 섬진강, 그리고 남해바다 하동포구가 배양한 것이다. 하동은 산과 강과 바다를 함께 어울러 안은 넉넉한 땅이다. 지리산은 명산 중의 명산이요, 섬진강은 대천의 반열에 세워도 무리가 없다. 한려수도를 안은 남해 바다는 실로 아름다운 물이다. 이 고장 태생의 시인 정공채(1934-2008)의 ‘찬불이하동가 (燦不二河東歌)’구절 그대로다.

“한 군향(郡鄕) 안에 지리산, 섬진강, 한려수도/이름난 산과 장강(長江) 바다도 거느렸네 … 삼포(三抱)의 불이향.”

중학 시절 진주에 유학했다. “진주는 나의 청춘이다. 비봉산 산마루에 앉아 흰 구름에 꿈을 실어 보냈다. 진주는 또한 나의 대학이다. 나는 이곳에서 학문과 예술에 대한 사랑을 가꾸었고, 지리산을 휩쓴 파란을 겪는 가운데 역사와 정치와 인간이 엮어내는 운명에 대해 나름대로의 지혜를 익혔다. 나는 31세까지는 진주를 드나드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살았다.”

1956년 재직하던 해인대학이 마산으로 옮기자 교수 이병주도 함께 움직인다. “나그네가 그냥 지나쳐 버리기엔 아쉬운 그런 풍광이 있다. … 험준한 산들을 등지고 남으로 호수 같은 고요한 바다를 안은 마산! 산촌의 기품을 고저로 하고 항구의 정서를 박자로 해서 다소곳이 엮어내는 우수의 빛깔과 그 일장(一章)의 멜로디를 닮은 마산은 나그네로 하여금 이곳에서 고향을 느끼게 하고 그곳의 사람에겐 여정을 느끼게 한다.”

■ “부산, 가장 아름다운 시절”

부산은 언론인 이병주의 능력이 만개한 곳이다. 국제신보(오늘의 국제신문)에 재직하면서 라이벌 부산일보의 황용주와 함께 이끈 쌍두마차 ‘주필시대’ (1958~1961)는 부산 언론의 신화적 황금기였다. “내 인생 가운데 이 시기를 가장 아름답게 회상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1975년 프랑스 여행길에 이병주는 ‘고향’ 부산을 그리며 한껏 소망을 드러낸다. “플로베르는 프랑스 문학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다. 그와 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얘기지만 ‘예낭풍물지’를 비롯해 부산을 무대로 많은 작품을 쓴, 그리고 앞으로도 쓸, 나의 조상(彫像)을 내가 죽은 뒤 부산의 시민이 해안통 어디에 세워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안 해 볼 수 없다.”

1964년 감옥에서 나온 그는 작가로 입신하기 위해 서울에 입성한다. 그리고 28년 후에 영면한다. 하동, 진주, 마산, 부산. 태어난 곳과 머문 곳을 함께 ‘고향’으로 품은 그다.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나 북한산 기슭에서 마감한 72년 생애는 산하의 삶, 산천의 죽음이었다. “나는 북한산과의 만남을 계기로 인생 이전과 인생 이후로 나눈다. 내가 겪은 모든 굴욕은 내 스스로 사서 당한 굴욕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좌절, 나의 실패는 오로지 그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친구의 배신은 내가 먼저 배신했기 때문의 결과이고 애인의 변심은 내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의 결과라는 것을 안 것도 북한산상에서이다.”(이병주 ‘북한산 찬가’)

■ 북한산 자락 이병주 카페

북한산 도봉서원 앞에 겸손하게 선 기념비의 비문이기도 하다. 모든 역사와 인간의 비애를 품어 안고 이병주가 떠난 지 30년, 생전에 그가 즐겨 걷던 산행길 아래 작은 기념관이 하나 서 있다. 구기동, 이북5도청 뒤 계곡 따라 비봉(碑峰)을 향해 터진 오르막 길가에 아담한 카페가 있다. 카페 안의 목조 선반에는 이병주의 작품이 여럿 진열되어 있다. 마치 하동 이명산의 이병주문학관의 비공식 미니 분관이라도 본 듯한 느낌이다.

오가는 등산객들은 유달리 맛난 커피를 들며 담론풍발을 나눈다. 드물게 작가를 기억하는 지긋한 나이의 손님들은 뜻밖에 조우한 작가의 흔적에 반색한다. 객쩍은 호기심이 발동한 옛 독자는 기품 있게 나이 들어 가는 여주인이 행여 작가의 마지막 애인이었는지 궁금함을 감추지 않는다. 마담은 흐릿한 웃음에 얹어 알 듯 말 듯 묘한 답을 건넨다. 모든 게 지리산에서 잉태되어 북한산으로 몰려온 ‘바람과 구름과 비’였노라고.


◇안경환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한국헌법학회 회장, 국가인권위원장 역임 ▷현재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공동 기획 : 국제신문·이병주문학관·상지E&A/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그린조이

※후원 : 하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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