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가 국토정보 독점하던 시절
- ‘사대부가 살 만한 곳’ 추려놓은
- 조선시대 첫 인문 실용 지리서
- 기름진 땅, 좋은 교통, 시장 등
- 경제성에 가치 두고 지역 평가
- 부산 두고 ‘왜관 설치된 곳’ 언급
- 日 가까워 살기 힘들다고 묘사
- 땅 외에도 지역 인물·역사 다뤄
“여기를 떠나 어디서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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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산자 김정호가 1861년 만든 한반도 지도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우리 전통 지리학을 따랐으며, 조선 시대까지 제작된 한반도 전도 중 가장 정확하다. 보물 제850-3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조선 시대 한양 토박이 벼슬아치라면 마음에 숨겼던 근심이었다. 온 가족이 의지하는 녹봉이 언제 끊길지 알 수 없는 일. 미래가 불안한 사대부들은 어느 날 홀연히 등장한 책 한 권에 눈을 번쩍 떴다. 책 이름이 ‘사대부가거처’(士大夫可居處·1751년). 글 잘 쓰는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이 저자다. “관직 잃고 산하를 떠다닌다더니 책을 지었구먼.”
서명(書名)을 풀어보니 ‘사대부가 살 만한 곳’. 팔도 집터를 콕콕 집어주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나온 실용 지리서였다. 읽어보니 지리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명승 인물 역사까지 다뤄 보통 책이 아니다. 우리 고전은 이렇게 해서 ‘인문 실용 지리’란 전무후무한 새 장르를 얻었다.
나라가 국토 정보를 독점하던 시절. 개인이 저술한 이 책에 관심이 꽂혔다. 필사되고 이본이 잇달았다. 우리말 이본은 규방 애독서. 이본 200여 종, 서로 다른 책 이름이 50여 개였는데 이 방면에서 한국 고전 중 으뜸이다. 국내엔 성균관대 안대회 교수가 6년여 노력 끝에 정본 택리지(擇里志)를 번역해 내놓았다. 안 교수에 따르면 청담은 초고본 ‘사대부가거처’를 다듬은 뒤 여기에 서문 발문(6명)을 덧붙여 1756년께 개정 서적을 내놓았다. 이때 서명이 ‘택리지’로 바뀌었다. ‘(살 만한 새로운) 마을을 선택하는 뜻’이란 의미다. 서명에서 지리 평론 냄새가 훅 난다. 청담과 역자가 기울인 노고 덕에 우리는 18세기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과 국토 상황, 사농공상 생활상을 한눈에 그려보게 됐다.
‘택리지’ 속 세평, 날카롭다. 당쟁에 밀려나 뜻을 펴지 못했지만, 조선을 사랑하는 청담이 고언을 아끼랴. 이상주의자였기에 결론은 이렇다. “조선 팔도에 사대부인 내가 거처할 곳은 없더이다.” 양반이 농공상(農工商)에 섞여 새 삶을 이룰 정도로 조선 사회는 아직 유연하지 않다는 얘기다. 혹독한 표현도 보인다. “조선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더이다.” 진심일까. 청담은 언외를 살펴달라고 썼다. 조선이 잘되길 간구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당쟁에 멍든 조선이 건강을 회복하고, 사농공상이 신분 차별 없이 같이 잘사는 대동 사회를 갈망하기에 ‘택리지’를 냈다는 걸 알아채는 게 어렵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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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한 ‘택리지’. |
청담은 어떤 마을을 눈여겨봤을까. 흔히 은퇴한 선비가 좋아할 만한, ‘나물 먹고 이 쑤시는’ 은둔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경제성을 높이 샀다. 땅이 기름지고, 교통이 발달해 물자가 흐르며, 시장이 활기를 띤 곳. 가령, 충청 강경이 그랬다. 그는 이곳 팔괘정에서 이 책을 썼다. 당시에 국토를 경제성으로 값 매겼으니 참신한 시도다. 본론 ‘팔도론(八道論)’은 지역별 고찰 기록. ‘복거론(卜居論)’에서는 지리·생리(生利, 이익을 냄)·인심·산수라는 네 주제 아래 호불호를 가렸다. 이익이 나서 생계를 유지케 하는 터가 우선이며, 그다음으로 편안하고 후덕한 동네 분위기가 중요하다. 주변 풍경은 부드러워야 한다. 성정이 삭막해지지 않으려면 말이다.
국토를 훑는 방식도 독특하다. 한양 중심이 아니라 백두대간을 따랐다. 평안도 함경도를 거쳐 황해도로 비켜 내려갔다가 강원도로 내려선 다음 경상도에 도착한 뒤 북진해 전라도 충청도를 거쳐 왕도인 경기도에 닿았다. 평안·전라도는 직접 가보지 않았다고 밝혔다.
‘택리지’ 독자라면 자신이 아는 지역이 받은 평가가 궁금하기 마련이다. 경상도는 ‘지리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며 운을 뗐다. 풍수지리상 수성(水星, 산이 구불구불 흘러간 지형) 형국에, 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 낙동강을 이룬다. 낙동은 상주(옛 지명이 上洛) 동쪽이란 뜻. 인조반정 후 한양 세족을 우대하는 인사 풍조가 굳어 영남인이 피해를 보는데도 학문 숭상 풍속은 남았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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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여지도 속 부산포. |
부산지역 묘사는 간략하다. 밀양 동남쪽이며 왜관이 설치된 곳. 동래와 대마도 간 교역을 언급하며 이 섬을 토벌해 복속해야 한다고 열변을 쏟았다. 대구 동남쪽에서 동래에 이르는 8개 고을은 토지는 비옥하되 왜국과 가까워 살 만한 곳이 못 된다는 평을 내렸다.
저자는 당대엔 드물었던 환경·생태주의자. 황폐해지는 산하를 안타깝게 들여다보았다. 아버지 이진휴가 강릉부사로 부임해 운교역~대관령 길을 동행했던 때다. 14세 청담이 보았던 길가 울창한 숲이 수십 년 전부터 벌목되며 끝내 휑해졌다고 한숨 쉬었다. 이런 남벌은 다른 고을도 마찬가지. 이렇게 되면 대관령에 홍수와 산사태가 일어나 한강으로 흙이 흘러들어 수위를 낮춘다는 진단을 내렸다. 수도에 물난리를 일으키는 환경 파괴 후유증을 내다봤다.
‘택리지’엔 인문이 풍성하다. 충남 직산에서 1597년 벌어진 임진왜란 소사전투를 상세히 그렸다. 당시 왜구는 남원에서 승리해 기세등등하게 공주로 북상 중이었다. 구원 온 명나라 장수 양호가 급보를 듣고 나섰다. 명군은 소사하 들판에 매복해 기다렸다가 왜구를 쳤다. 특이하게 이때 크게 활약한 병력이 원숭이 기병. 이 특수부대원은 적진을 꿰뚫고 지나가 일대 혼란을 일으켰고 이어 명군이 뛰어들었다. 왜구는 조총 한 번 못 쏘고 박살 났다. 원숭이 기병은 ‘세전서화첩’ 중 일부인 ‘천조장사전별도’(김중휴 작, 1850년께)에서 확인된다. 이 그림에는 또 다른 특전사로 파병했던 ‘해귀(海鬼, 포르투갈 출신 흑인 용병으로 추정)’가 수레를 타고 가는 모습이 나온다. 청담은 지역사를 언급하며 견해를 덧붙이는 지식인다운 면모를 보인다. 문장가인지라 자기 한시도 실었다. 1723년 당쟁에 연루돼 파직당한 뒤 승지 이인복과 태백산을 유람하며 지은 시들에 담긴 비분강개 심경은 읽는 이 가슴을 파고든다.
지역 전설을 발굴해 사료로서 가치를 높였다. 전북 군산시 옥구읍 자천대에 얽힌 최치원 전설을 채록, 문자로 남겼다. 이른바 돌 항아리 전설. 신라 최치원은 태수를 지낼 때 이곳 돌 항아리 두 개를 비밀문서 보관용으로 썼다. 항아리를 건드리면 비바람이 몰아쳤다. 이곳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항아리를 일부러 만져 큰비를 얻어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번번이 사신들이 항아리를 구경하러 와 민폐였다. 옥구 사람들이 정자를 허물고 돌 항아리도 묻어 감춘 뒤 인적이 끊겼단다. 강원 강릉시 경포대 적곡합(곡식이 쌓인 밥조개) 전설은 이 책에 처음 나온다.
당대 사회상과 유명 인물 얘기가 구수하다.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신라 우륵이 가야금을 탔다는 탄금대가 자리 잡았다. 강을 건너면 북창인데 이곳에 기묘사화에 얽혔던 탄수 이연경(1484~1548)이 살았다. 그 자손이 10대를 이어 과거에 급제해 이곳이 명당으로 소문났다. 지리-인물-역사, 절묘한 세 박자에 독자는 절로 무릎을 친다. 그 관계가 오묘하다. 가령, 사대부가 살 만하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명승지는 빛을 잃는다. 강원도 통천군 학포 호수가 그 예. 30리에 달하는 흰 모래밭이 둘러싼 이 호수, 중국 서호와 견줄 만큼 아름답다. 하지만 사대부 거처로선 별로라는 함경도에 편입된 후 길손이나 들러 구경할 정도로 한적해졌다.
260여 년 전 청담이 살았던 조선과 지금 대한민국은 무엇이 달라졌나. 가장 큰 변화는 우리나라가 세계 유일 분단국이 됐다는 점일 터이다. ‘택리지’ 속 한 몸이던 한반도! 청담처럼 남북에서 두루 살 곳을 찾아보는 때가 오기는 할는지. 게다가 좁은 땅을 놓고 이익을 좇는 다툼이 도를 넘었다. 이 고전은 더는 우리 땅을 이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불을 지핀다. 서평가·세상관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