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이 경기도 여주인 외아들 이중환은 남인 명문 출신으로 24세에 문과 급제해 홀을 쥐었다. 30대까지 승정원주서 병조정랑 같은 여러 관직을 거쳤다. 숙종 경종 때 당쟁이 절정이었는데 소론 위세에 남인은 숨죽였다.
관료 초기, 30대 청담은 문인 활동으로 주목받았다. 1721년 서울 서대문구 백련봉 정토사에서 강박 강필신 이인복 이희와 함께 시(詩) 동인 ‘정토시사’를 만들었다. 청담이 주도한 이 단체는 청명한 정치를 좇았다. 윤휴 허적 민암 같은 당시 주류 남인 정치가가 보인 노선과는 달라 문외파로 불렸다.
관료·문인을 겸해 활동한 청담은 오래 버틸 수 없었다. 1723년 노론은 목호룡을 경종 시해 혐의로 고발했는데 1725년(영조 1년) 여기에 청담이 엮였다. 4년 전 저자가 김천 도찰방으로 재직할 때 목호룡에 역마를 내준 일이 화근. 이후부터 그는 투옥 고문 유배 출옥을 반복하며 정치 생명이 스러졌다. 재기할 기회조차 잃었다. 1728년 노론·남인이 일으킨 반란이 결정타. 여기 청담 처가 쪽인 사천 목씨 집안이 연루되면서 불똥이 날아들었다. 일족이 몰살당하다시피 하자 아내는 충격받아 갑자기 세상을 떴다.
저자는 20년 뒤 1753년, 말년에야 명예만 회복했다. 하지만 30대 중반 이후부터 공식 기록에 저자 이름은 더는 등장하지 않는다. 말년 북학파에 큰 영향을 준 ‘택리지’를 저술한 게 유일한 공식 행적이다. 1756년 66세로 황해도 설라산 선영, 부친 묘소 옆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