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은 조선 망국병인 사색 당쟁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그 폐해에 죽는 날까지 눌렸다. ‘택리지’를 관통하는 정서 중 하나는 끝없는 당쟁을 향한 처절한 저자 회한. 고위 관료뿐 아니라 평민까지 당쟁에 물들었으니 조선 마을 중 이를 피해 간 곳이 없었다. 본문 복거론 중 ‘인심’ 편에서 청담은 상당한 분량을 들여 조선 당쟁사를 보여준다. 모함하고, 귀양 보내고, 서로 죽이는 당쟁이 섬찟하다. 조선을 지키고, 백성을 살리는 데 쓸 힘과 시간이 당쟁으로 없어지는 과정을 보며 눈물지었다.
알려진 대로 당쟁은 감투싸움. 인사권 집중을 막으려 한 애초 의도는 좋았다. 관리추천권을 최고위 관료인 정승이 아니라 하위 직급인 전랑에 줬다. 선조 때 김효원이 전랑에 천거됐는데 외척 이조참의 심의겸이 막았다.
조정 의견이 갈리며 1583~84년 붕당이 생겼다. 김효원 집은 동쪽(건천동)에 자리 잡아 그를 지지하는 세력을 동인, 심의겸은 서쪽(정릉동)에 살아 그 동조파를 서인이라 했다.
이후 동·서인 관료가 귀양 가는 일은 다반사. 1589년 정여립 옥사로 1591년까지 국문이 이어져 조정에 남은 신하가 없을 정도였다. 양 파는 밀고 당겼다. 1598년 왜구가 물러나자 대간 남이공이 영의정 류성룡을 탄핵하며 동인은 남·북인으로 갈렸다. 영남 출신 류성룡을 편든 이들을 남인, 남이공을 조종한 이산해를 지지한 일파는 북인. 이산해는 집을 서울에 뒀는데 영남서 보면 북쪽이다. 북인은 인목대비 폐비를 주장한 대북, 반대한 소북으로 갈렸다.
1682년 허새 옥사로 서인은 노·소론으로 쪼개졌다. 인조 때 탕평책이 시행돼 사색당파가 같이 근무하자 이번엔 자리만 보전하려는 풍조가 생겼다. 당쟁은 나라·인심을 망가뜨리고 피폐하게 만들었다고 청담은 탄식한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 탐욕자는 나라를 망가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