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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24> 수상록-미셸 드 몽테뉴(1533~1592)

‘난 누구인가’ 집요하게 고찰한 107편의 글…에세이 문학의 시초

  • 서부국 서평가
  •  |   입력 : 2021-08-12 19:20:09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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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佛 사상가이자 수필가
- 인간 존재에 대한 궁금증 많아
- 식인종·절도·냄새·술주정부터
- 죽음·도덕 등까지 다양한 소재
- 금기시되던 성관계까지 다뤄

- 진중하고 짓궂지만 재치 가득
- 아무 장이나 펼쳐도 술술 읽혀

- 동서고금 보편적 인간성 탐구
- 파스칼·셰익스피어에 영감 줘

비굴·몰인정하지 않고 순응·절제하되 안락하게 인생을 즐기라고 권한다면 솔깃하지 않을까. 하지만 인생은 만만찮은데? 16세기 프랑스 모럴리스트(수필가)이자 사상가인 몽테뉴가 책을 내밀었다. ‘레 에세(Les Essais, 1580년)’. 힘겨운 인생에 필요한 백신 같은 이 고전이 바로 ‘수상록(隨想錄)’이다. 초판본이 나온 당시 프랑스에선 ‘경험·시도·실험’이란 뜻이니 대략 내용이 감이 잡힌다. ‘에세이(Essay·수필)’ 어원이기도 하다.
   
몽테뉴와 일행이 이탈리아 시인인 르 타세(왼쪽)를 방문해 인사하고 있다. 프랑수아 마리우스 그라 넷 그림(1820년).
‘수상록’ 1권(57장) 2권(37장) 3권(13장)을 합해 1250쪽이니 적은 분량은 아니다. 제목을 저마다 단 107장, 영락없는 수필이다. 아무 장이나 펼쳐서 읽어도 된다. 완독이 힘겹다면 목차나 부록인 ‘테마 찾아보기’를 살펴 구미가 당기는 읽을거리를 선택해도 괜찮다. 식인종 절도 운(運) 냄새 술주정 무위도식 엄지손가락 절름발이…. 미주알고주알 주제다. 묵직한 철학 얘기도 다뤘다. 죽음 자살 도덕 욕망 양심 정의 실천 허영 고독 우정 상상력….

몽테뉴는 인간이란 존재를 발가벗겨 보고 싶었다. 자신을 먼저 탈탈 털었다. 그 결과를 ‘수상록’에 썼다. 이러니 어투가 진중할 수가 없다. 때로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적나라하고 짓궂다. 당시는 성교 언급에 입을 가렸던 시대였지만 저자는 코웃음 쳤다. “체위는 동물에게 배워.” 온갖 고서와 성경에서 끌어온 화제·분석·비평은 냉소를 띠면서도 쾌활하다. ‘미친 수작’ ‘나처럼 얼빠진 자’ ‘천하고 경박한 내 문장’. 저자가 즐겨 쓰는 표현이다.

정곡을 찌르고, 재치가 흐른다. “그대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면, 고통이 그대를 이길 것이다.” “지배하기보다는 복종이 훨씬 쉽고 재미있다.” “부모가 아이를 때리고 벌을 주는 건 징계가 아니고 보복이다.” “나는 소크라테스가 알렉산더 대왕의 자리에 있었다면 훌륭히 소임을 다했으리라 생각하지만, 알렉산더 대왕은 소크라테스가 한 일을 해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자신에게 하는 판결은 재판관이 내리는 그것보다 더 힘차고 혹독하다.”

1~3권 중 재미를 기준으로 보면 1권≒3권이고 2권은 좀 밀린다. 가령, 2권 12장(‘레이몽 스봉의 변호’)은 200여 쪽이니 논문 1편 분량이다. 제목과는 달리 몽테뉴가 자기 사상을 펼쳐놓았다. 회의주의를 심리·도덕 측면에서 다룬 이 장을 굳이 읽는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3권을 다 읽기가 버겁다면? 1권만 보시길. 전체 107장 중 단 한 장만 읽어야 하는 아주 바쁜 독자는 마지막 장(‘경험에 대하여’)으로 직진하라. 저자는 50여 년 삶과 경험을 굵고 짧게 반추해낸 인생관과 철학을 보여주니까. 이 고전은 축약본이 많고 여행기만 다룬 번역본도 나왔다. 수상록은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고, 파스칼 셰익스피어 로크 루소에게 영감을 안겼다.

몽테뉴는 동서고금 보편타당한 인간성을 찾았다. 이걸 잘 이해하면 세파를 헤쳐나가는 데 유용할 듯하다. 역마차가 다닌 16세기나 자율주행차가 개발된 요즘이나 인간은 고민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몽테뉴는 먼저 ‘나는 누구인가’하고 자문한다. “나는 어떤 다른 주제보다도 나 자신을 더 연구한다. 이것이 내 형이상학이고 물리학이다.” “나는 키케로 연구자가 되기보다는 나에 대해 권위자가 되련다.” 그가 관찰한 바로는, 인간 이성은 동물 그것과 같은 높이에 놓였다. 칸트가 무척 싫어할 논변이다.

   
저자는 세상을 ‘임시로 꾸며대는 온갖 게 뒤엉킨’ 암담한 곳으로 봤다. “철학자들은 인간이 만물 중 영장이라며 잘난 체하지만, 착각일 뿐이다.” 세상은 질서정연한 법칙이 적용되지 않고 그저 운으로 굴러가는 곳이니 평범하게, 긴장하지 말고 사는 게 좋다고 충고한다. 세계는 고매·정밀·치밀한 철학사상을 실천하기에는 부적당하다. 그 밥에 나물 같은 타인 글과 학문을 읽고 공부한답시고 머리 싸매지 말고, 천박하더라도 자기 글을 쓰는 게 현명하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렇기에 자신은 지금껏 아등바등 살았던 적이 없다고 장담한다. 세상일에 놀라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단다. 무식한 인간이 잠깐 살다 가는데 뭘 그렇게…. 죽음도 그렇게 담담히 맞아야 한다. 회의주의자 몽테뉴다. 여기서 유명한 몽테뉴 제1 명제가 나온다. “크 세 주(Que sais-je·사진)?” “나는 무엇을 아는가?”이다. 그리스 철학자 피론이 주창한 회의론(피로니즘)을 이었다.

몽테뉴는 성주 아들로 태어나 평생 배 두드리며 살았다. 보르도 시장을 두 번 지내며 고향에서 떵떵댔다. 중앙으로는 국왕과 친분을 맺은 능력자. 독자는 팍 김이 샌다. “그런 금수저가 뭘 걱정했겠어?” 하지만 사기 치는 삶 탓에 울화통이 터지고 낙담할 때 몽테뉴가 그리워진다. 그는 위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명예를 준 시장 직위는 자청이 아니고 천거로 얻었다. 앙리 4세가 같이 일하자고 손을 내밀었지만 정중하게 거절하고 자기 성에서 저술하며 여생을 보냈으니 출세욕도 별로 없었다. 가능한 한 속세와 거리를 둔 채 안락하게 사는 삶을 인생 제1 목표로 삼았다. 이렇게 인생 좌표를 찍었으니 후세는 그를 쾌락주의자라 한다.

저자는 보편타당한 인간상을 철저한 자신 고찰로 얻는 방법론을 무척 믿었다. “나는 끊임없이 나를 고찰·검토하며, 나를 맛본다.” 다른 이가 자기 앞만 내다보고 질주할 때 그는 자기 속을 들여다보며 사상을 건져 올렸다. 자기가 가장 잘 아는 자신이란 재료에서 얻었기에 신뢰한다는 논리. 그 시선은 냉철하다. 인간 이성은 보잘것없다고 봤는데 이는 동물도 추리·사고력을 가졌다는 주장으로 확대됐다. “사람과 사람 간 차이가 동물과 사람 간 차이보다 크다.” 그는 동물이 서로 대화하지만, 인간이 이를 못 알아채는 건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여기에 동물이 인간 대화를 이해한다는 상상까지 더하면서 인간이 동물을 박해해선 안 된다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갔다.

몽테뉴는 곧잘 친구들도 상담해주고 처방전을 냈다. “자네가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네.” 친구들은 감탄인데, 평소 인간을 잘 관찰한 결과다. 저자는 현실에 다리를 딛고 멀리 내다봤다. 그가 살았던 16세기 프랑스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부딪힌 종교개혁이 파란을 일으켰다. 봉건 귀족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왕을 옹립하고자 혈투를 벌였다. 몽테뉴도 옥에 갇히거나, 정적인 귀족에게 잡혔다가 가까스로 살아났다. 페스트가 창궐해 시민이 떼죽음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쾌락 속에는 고통이 들어앉았고, 선(善)에는 악이 깃들기도 한다.” 현실과 이상이 뒤섞인 명언이 이런 과정을 거쳐 나왔다. “정의를 구현하는 법률은 부정의(不正義)도 필요하다.” 인간은 순수를 결코 맛보지 못한다고 믿었다. 몽테뉴는 보르도 고등재판소에서 일하며 법이 가진 선악 양면을 봤다. 도덕과 현실, 양면을 응시한 그는 실증주의자다.

인간은 여러 가면을 쓰고 산다. 겉으로 드러난 나와 내면 자아가 다를 때가 많다. 몽테뉴도 두 얼굴로 세파를 넘었다. 순리에 척지지 않으면서 할 만큼 하고, 나머지는 운명에 맡기는 자세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그는 내면 정신세계로 보면 무신론자인데도 겉으로는 가톨릭과 개신교 중간에 서서 종교개혁이라는 난세에서 자신을 지켰다. 피하는 게 가능한 고통은 자청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처세로 읽힌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둥글둥글하게 살라’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 책 3권 후반부를 읽게 되면 독자는 ‘이것만큼은 몽테뉴가 오판했네’라고 혼잣말을 하게 된다. 이렇게 썼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써도 많은 사람이 읽지도, 오래 가지도 않을 것이다. …50년 뒤에도 읽히기를 어찌 바랄 것인가?”

서평가·세상관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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