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 8년간 34만명 베트남 파병
- 부산항은 환송행사로 늘 북새통
- 전쟁 기간 많은 가수 위문 공연
- 시대상 반영한 노래 넘쳐났지만
- 반공적 시각 단편적 내용 그쳐
- 행사 장면 담은 일부 곡은 눈길
과거 1960년대엔 베트남보다 월남이란 말을 선호했다. 월남(越南)이란 단어는 국가 명 비엣남(Vietnam)이 중국식 음역으로 형성된 말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연안국가인 베트남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너무 어두워서 처음엔 그곳을 ‘섬의 나라’로 그릇된 인식을 하기도 했다. 윤일로가 부른 노래 ‘월남의 달밤’을 작사한 반야월 선생은 ‘남남쪽 섬의 나라’로 시작했다가 오류가 지적되자 황급히 ‘남남쪽 머나먼 나라’로 바꾸었다.
말도 탈도 많았던 베트남전쟁은 1945년 호치민정권이 제국주의 세력 프랑스와 충돌한 게 발단이 됐다. 이후 1950년대 중반 이념과 노선이 서로 다른 베트남 남부와 북부간의 내전 성격으로 격화되었다. 한반도에서의 6.25전쟁 이후 전쟁 먹구름은 베트남으로 옮겨갔다.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국제간 대립과 개입으로 이어져서 엄청난 대리전 양상으로 비화되어갔다. 1960년대 초반 미국의 전투수행을 지원하는 동맹국 여러 나라와 서방국가들의 개입으로 베트남전쟁은 엄청난 국제전의 꼴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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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전에 파병된 백마부대 병사들이 부산항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 이동순 제공 |
■베트남 파병의 관문 부산항
이 시기를 배경으로 미국은 한국에 정규파병을 요청했고, 당시 정부는 국내의 많은 비판과 반대를 무릅쓰고 베트남파병을 서둘러 결정하게 되었다.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이 처음으로 시행된 것은 1964년 9월11일이다. 그 1차 파병에는 주로 의무장교, 위생병, 간호장교 등 130명과 태권도교관 10명 등 도합 140명이 부산항 제2부두를 출항했다. 베트남 남부의 호치민(구 사이공)까지는 꼬박 열하루 걸렸다고 한다. 이를 필두로 해서 이듬해인 1965년 3월12일에는 후방 군사원조 목적으로 조성된 비전투병력 2000명이 비둘기부대란 명칭을 달고 역시 부산항을 출발했다. 같은 해 가을에는 두 차례에 걸쳐 해병대로 구성된 청룡부대와 육군으로 구성된 맹호부대가 부산항을 떠났다. 이어서 군수지원 목적의 십자성부대, 군수물자 수송을 맡은 백구부대 등도 출발했으니 1965년 부산 항구는 베트남으로 떠나는 병사들을 환송하는 행사로 북새통을 이뤘다. 추가파병 요청은 계속 이어져 1966년 4월에는 혜산진부대, 8월에는 백마부대 병사들이 부산항을 떠났다. 그해에만 4만8000명이 베트남으로 파병되었던 것이다. 8년 동안 여섯 차례 파병이 되었고, 베트남으로 떠난 한국군의 총 숫자는 34만 명에 이른다. 주월 한국군은 도합 1,170회의 대규모 군사작전에 참가했다. 55만7000회 가량의 크고 작은 군사 활동을 수행했다. 하지만 전투지역에서의 위험도 무척 많아 무려 5000명의 병사가 이역 땅에서 전사했다.
1968년으로 접어들면서 베트남전쟁은 정리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미국과 북베트남 간의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1971년 12월부터 한국군부대도 단계적 철수를 시작한다. 청룡부대 병사 1만 명이 베트남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곳도 부산항 제2부두이다.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귀국환영행사도 성대했다. 1973년 3월에는 주월 한국군 사령부까지 국내로 복귀 해체하며 모든 철수가 완료되었다. 하지만 베트남전쟁에 파견됐던 한국군 병사들은 많은 후유증으로 고통스런 삶을 이어가게 되었다. 1960년대 초부터 미국은 메콩강 삼각주 지역을 포함한 베트남 일대를 비롯하여 라오스, 캄보디아 등지에 은신한 북베트남군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엄청난 분량의 고엽제를 살포했다. ‘에이전트 오렌지’라 부르는 그 고엽제에는 다이옥신을 비롯한 맹독성 화학물질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다이옥신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여기에 노출된 주민과 참전병사에게 회복 불가능한 여러 질환과 장애, 기형을 유발했다. 여러 해전 베트남의 어느 전쟁고아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손이 어깨에 붙은 채 태어난 아기를 본 적이 있다. 모두 고엽제 후유증으로 되풀이되는 비극이라고 했다. 이와 함께 전쟁 중에 있었던 민간인 학살과 라이따이한 문제도 심각한 미해결과제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전후 50년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지금에도 여전히 고통스런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베트남파병의 대가로 수억 달러를 벌어들였는데 이는 1960, 70년대의 경제개발 밑돈으로 활용되고, 군 장비 현대화 자금으로 활용되었다.
■베트남전이 남긴 가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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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전 한국군 병사를 위해 위문공연하는 가수 패티 김. |
베트남전쟁이 치러지는 동안 국내 다수의 가수 연예인들이 주월 한국군 병사를 위문하는 공연을 다녀왔고, 이런 분위기와 때맞추어 베트남참전 테마의 대중가요들로 적지 않은 분량으로 발표되었다. ‘달려라 백마’ ‘맹호들은 간다’ ‘우리는 청룡이다’ ‘귀신 잡는 해병’ ‘백구부대’ ‘주월 한국군의노래’ ‘십자성 부대가’ ‘용사는 바다 건넜다’ ‘아름다운 사이공’ ‘전우가 남긴 한마디’ ‘전장에 피는 꽃’ ‘병사의 혼’ ‘월남의 달밤’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월남가신 우리 아빠’ ‘월남가신 우리 아빠 안녕 하소서’ ‘월남가신 나의 님’ ‘월남에서 온 편지’ ‘월남에 가신 우리 오빠 안녕’ 등을 우선 그 본보기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음미해보면 하나같이 유치하고 졸렬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까닭은 베트남전쟁의 역사성에 대한 객관적 인식의 절대부족, 6·25전쟁 테마 노래의 반공적 시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근시안적 관점 따위가 가요작품의 질적 수준을 구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부정적 사례의 노랫말들은 다음과 같다.
내 뺨에 뽀뽀하고 월남으로 가신 아빠/ 오실 때 좋은 선물 많이 갖고 오신댔지/ 집일은 걱정 없어 엄마가 있으니까/ 베트콩 게릴라들 혼 좀 내어주어요/ 맹호부대 우리 아빠 용감한 아빠(오은주, ‘월남 가신 우리 아빠’)
산도 설고 물도 설은 수륙만리 이국에서/ 눈시울에 그린다는 누이동생 옥이는/ 어젯밤 꿈속에서 오빠를 만났어요/ 오빠 오빠 장부의 길 잃지 말고 힘껏 싸워서/ 조국의 그 영광을 안고 돌아오세요/ 아 부디 부디 그날까지 몸조심하세요(이미자, ‘월남 가신 오빠 안녕’)
일제말 군국가요였던 ‘혈서지원’, ‘지원병의 어머니’ 등과 6.25전쟁 테마였던 ‘아내의 노래’, ‘님 계신 전선’이 보여준 평면적 수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다수의 베트남전쟁 테마 노래들이 보여주는 레벨은 눈여겨 볼 만한 것들이 없다. 이런 가운데서 당시 베트남참전 병사들이 부산항을 떠날 때의 격정적인 환송행사 장면을 담아내고 있는 다음 가요작품의 경우 한 시대를 증언해주는 풍속도로서의 의미는 있다고 하겠다.
태극기 흔들면서 님 떠난 부산항구/ 우렁찬 고동소리 갈매기도 울었소/ 지금은 월남전선 어느 밀림에서/ 용감하게 싸우시는 님이여 승전하소서// 태극기 흔들면서 잘 가소 잘 있소/ 우렁찬 고동소리 갈매기도 울었소/ 오늘도 월남전선 어느 밀림에서/ 용감하게 싸우시는 님이여 승전하소서(‘님 가신 월남’이수용 작사, 작곡, 백성숙 노래, 유니버샬레코드 1968)
시인·한국대중음악힐링센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