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고한 李 선생 특별했던 가르침
- 승무 명인이자 민주화에도 헌신
- 농사 안 지으면 제자로 인정 않아
- 연습 복장 등 사소한 것에도 엄격
- 주역·천부경 등 사상 공부도 강조
- 오늘 김미자 씨 스승 기리며 공연
지난 5월 10일 ‘춤꾼’ 이애주 선생이 향년 74세로 별세했다. ‘춤웹진’ 6월호가 마련한 ‘기획특집 고 이애주’에는 추모하고 조명하는 글이 일곱 꼭지 실렸다. 공연사(史)에서 중요한 자료 2건이 포함됐고, 추도사는 채희완 부산대 명예교수가 썼다. 한국의 춤 예술이 시대의 불길과 물결 속에서 오늘 여기 이르기까지 이애주 선생이 끼친 영향력과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한성준(1874~1942)~한영숙(1920~1989)을 잇는 한국 전통춤의 명인으로, 민주화 운동 시기 독재에 맞서던 젊은이들이 스러져간 자리에서 생명의 춤을 주저 없이 춘 춤꾼으로,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 보유자로서 엄격하고 깊이 우리 예술을 가르친 스승으로 이애주라는 이름은 자리매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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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애주(왼쪽) 선생과 김미자 씨가 공연장에서 함께 다정하게 사진을 찍었다. |
■그가 살며 가르친 방식의 충격
부산의 중견 춤 예술인 김미자 씨는 이애주한국전통춤회 사무국장이며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이다. 이애주 선생 생전에 ‘마지막으로’(2018년) 승무를 이수한 춤꾼이다. 부산대 무용학과와 대학원(체육학과 박사 수료)을 나왔고, 현재 부산 금정구 장전동 예(Ye) 아트센터 대표이다. 김미자 씨가 준비 중이던 공연 관련 이야기를 나누고자 지난달 7일 만났을 때, 실은 ‘이애주 선생께 춤 배운 이야기’만 두 시간 넘게 듣게 됐는데 그 가르침의 방식과 철학이 크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선생이 살며 가르친 방식은 깊은 사상성, 무섭도록 성실한 정진, 전통에 관한 곧은 탐구가 숨 쉬는 귀한 이야기보따리였다. 작가 박경리 선생이 가꾼 생명·생기의 철학·실천과도 만나는 듯했다. 지역을 가릴 것 없이 예술인·학인(學人)·시민에게 두루 도움이 될 예술 이야기라고 판단해 김미자 씨에게 보충 취재나 선생 면담을 요청하려던 차인 5월 10일, 이애주 선생이 타계했다.
■“농사짓는 일, 쉽지 않았죠”
이젠 김미자 씨를 붙들고 물어야 했다. 지난 3일 춤 공간 예 아트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서울대병원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문화예술인장으로 치러진 이애주 선생 장례식 현장을 지킨 그는 9일 오후 7시30분 국립부산국악원 예지당에서 한성준 한영숙의 맥을 이은 이애주류 작품으로 마련하는 공연 ‘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춤-인의예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농사짓는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김미자 씨가 말했다. “제가 농부반장 출신입니다.” 선생이 살며 춤을 가르친 경기도 ‘과천승무전수관’에는 널따란 밭이 있다. 그 밭에서 농사를 지어야 문하로 인정할 정도로 농사를 중요시했다. “농사일은 아주 고되기도 했어요. 맡으면 수확까지 책임지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노동하고 기르는 일을 해보라는 거죠. 모두가 장화 신고 모자 쓰고 방석 달고 씨 뿌리고 거름 내고 배추 상추 케일 같은 쌈은 기본이고 호박까지 스무 가지쯤…쌀 빼고 다 있죠(웃음).” 못 견뎌 포기한 사람도 꽤 있었다고 한다.
■생활·노동·생활문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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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미자 씨가 수확한 토실토실한 고구마. |
2001년부터 부산에서 과천승무전수관을 오가며 배우던 그는 출산 등으로 한동안 못 가다가 2015년부터 제대로 다시 다녔다. 2018년 승무 이수자가 됐는데, 그 뒤로도 줄곧 이곳에 와서 춤을 익혔다. 줄곧 농사를 지었다는 뜻이다. “선생님은 춤을 ‘몸짓’으로 이해하셨죠. 기예나 예능 차원에서 예쁘게만 선을 만드는 것은 싫어하셨습니다. 노동에서, 생활에서, 생활문화에서… 예컨대 볏짐을 들어 올리면 그게 하나의 동작이 되는 거죠.”
선생은 25년 전 승무 보유자가 된 뒤로도 전국을 다니며 영가무도 영산재 봉산탈춤 경기도당굿 같은 우리 춤과 장단을 끝없이 익히고 배웠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 춤은 그 기본과 원리를 땅, 땅의 기운, 답지저앙(踏地低昻·땅을 밟고 구부렸다 폈다 함), 삼진삼퇴(三進三退) 등에서 찾았습니다. 승무 태평무 살풀이를 예쁘게 추려는 데서 벗어나 호흡과 의식, 원리에 중심을 두라고 하셨어요. 근본 근원이 잘 설 때 도가 생긴다고 강조하시면서.” 장식하는 아름다움이 아닌, 삶과 일에 이어지는 미적 원리를 중시한 것으로 이해됐다.
■승무 속에 계절 흐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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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를 추는 이수자 김미자 씨. |
“승무 또한 삶과 일이 어우러진 계절 흐름으로 설명하셨다”는 점은 정말로 흥미로웠다. 대략 이와 같다. “(한영숙류) 승무는 염불-타령-굿거리-법고-당악에 이어 뒷굿거리가 있습니다. 이를 춘하추동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죠.” ‘염불’은 봄 되어 땅이 갈라지는 형상·기운이다. 땅에서 일어나 땅을 갈라 일구는, 오체투지 절을 해서 땅을 불리고 일구는 모습이 다 있다. ‘타령’은 말뚝 박고 집 짓고 농사짓는 여름이다. ‘굿거리’는 추수하는 가을로, 함께하는 풍류가 있고 ‘법고’와 ‘당악’으로 이어져 추스르고, 다시 봄을 맞는다.
승무는 관객이 흔히 형이상학적이고 정신적이며 좀 어려운 춤으로 느낀다. 분명 그런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애주 선생 설명을 들으면, 거기에만 머물지 않고 ‘일하는 보통 사람의 춤’도 되고 한결 가까이 다가오는 춤도 된다. 김미자 씨는 “스승님은 승무 자체는 일반인의, 대중의, 각자 모두의 승무로 보신 것”이라고 했다.
■섬세하고 철저하게 근원을 향해
“모든 춤을 엄격하고 까다롭게 가르치셨어요.” 승무 이수 시험 준비를 할 때 일화를 들면 이렇다. 오전 9시쯤 제자가 한복을 입고 연습을 시작해야 하는데 들여다보니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그러면 혼이 많이 난다. 심지어 그 길로 슬쩍 외출해 심야에 돌아오기도 한다. 제자는 그 시간까지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 ‘이치’에 맞다. “연습 때는 언제나 한복을 입습니다. 다른 옷은 안 되고요.” 한국 춤 호흡을 느끼고 간직하려는 마음씀씀이다.
“이미 배운 기존 춤, 자기 몸에 익은 춤을 털어내고 처음부터 시작했습니다. 그게 힘들어 저도 많이 울었죠.” 비움·채움의 원리이겠다. 연습 중에는 우리 정서를 담은 우리 말을 썼고, 장단 넣을 때 ‘원 투 쓰리’ ‘하나 둘 셋’도 쓰지 않았다. 덩, 쿵, 덩더쿵, 덩다당 같은 우리 장단 발음을 썼다. 진짜 한국 춤의 근원으로 파고들기 위한 섬세한, 집요한 노력이었다.
■사상 공부도 강조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사상 공부다. 본인이 모범을 보여 성균관대 유학대학원 박사 과정을 최근까지 다녔다. ‘주역’과 ‘천부경’을 제자들이 배우게 했다. 김미자 씨는 “저도 서울 혜화역에 있는 대산 김석진 선생의 주역 배움터에서 2년간 매주 한 번씩 수업을 들었다”고 했다. 오늘 여기서 왜 어떻게 춤춰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뜻일 터이다. 많은 사람이 이 모든 엄격함을 요즘 시대에 안 맞는 것으로 여길지 모른다. 그런데 선생은 암이 몸을 덮친 뒤에도 몸소 실천하며 춤을 배우는 사람이 우리 춤의 근원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익히도록 이끌었다. 그가 지난 25년 동안 배출한 승무 이수자는 21명으로 아주 적다. 거듭 생각할수록, 이 시대에 드문 그의 가르침이 우리 시대 여러 곳에서 분명 필요할 것이란 믿음이 생긴다. 선생은 돌아가시기 직전 김미자 씨의 9일 국립부산국악원 공연을 위해 쓴 축하 글에서 밝혔다. “춤에서 기본의 의미는, 제대로 바르게 하지 않으면 춤을 크게 쌓아 올라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임기자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