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익진의 무비세프 <12> 로자먼드 파이크

-이 배우의 미친 연기력은 자기 미모마저 압도하네, 로자먼드 파이크 Rosamund Pike

때에 따라서는 엽기적이다. 아름답게 미소 짓는 동시에 야릇한 표정으로 어떤 섬뜩함을 전해주는 연기에 일가견이 있다. 그 섬뜩함은 사람 내면에 감추어진 살해 욕구나 파괴 본능일 수도 있다.

　영화배우는 자기 장점을 극대화할 기회를 가져야 성공할 수 있다. 알아봐주는 그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 영화에서는 그 영화의 감독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냥 그저 그런 연기자는 사람들 뇌리에 남지도 않고 사람들 시야에서 쉽게 사라져 버린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자기 재능을 발견당하는 것도 재능이다. 그래서 너무 설쳐대도 안 되지만, 가만히 있으면 더욱더 안 된다. 나의 장점을 나 스스로가 발견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사람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능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타인이 나의 장점을 발견하는 것도 행운이지만, 내가 발견당하는 것도 행운이다.

　로자먼드 파이크(Rosamund Pike), 그를 누가 알아봐줬을까. 아름다운 피부, 금발의 미인인 데다 옥스퍼드 대학 영문과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어머니와 오페라 가수 아버지를 둔 집안이다. 예술적 분위기가 충만하다. 모자란 것 없어 보이는 그가 연기자로서 알려지기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던 것 같다. 사실 ‘나를 찾아줘’ 이 영화 이전에는 나 또한 알지 못했던 배우다.

	영화배우 로자먼드 파이크.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고 옥스포드대학에서 공부한 로자먼드 모습에서 고전적인 서구(또는 유럽) 이미지의 한 측면이 느껴지는 듯하다..

　좀 거창한 비유이지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온 문구를 다시 뒤져본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사람이 무언가 되기 위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인생은 꿈을 포기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우리는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러면 거기서 끝나는가. 아니다. 알을 한두 번 깨서는 만족할 경지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로자먼드의 이른바 인생작은 데이비드 핀처 감독(David Fincher. 1962년생,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 출신)의 ‘나를 찾아 줘’(Gone Girl, 2014)이다. 이 작품의 원자자인 길리언 플린이 직접 영화 각본도 썼다. 더욱 좋은 것은 영화와 소설 모두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아내가 남편의 외도에 복수하는 ‘막장 치정극’으로 보일 수 있었지만, 핀처 감독 이런 상투적인 내용을 좀 고급스럽게 또는 스타일리쉬하게 만들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핀처 감독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어보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그의 영화 ‘소셜 네트워크’ 첫 장면(오프닝 씬)만 무려 99번 반복 촬영한 것으로 유명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의 리허설은 당연히 배우들을 지치게 한다. 핀처 감독은 이렇듯 힘들게 촬영한 이유로 다급한 상황을 연출해 배우들에게 자극을 주어 대사 처리를 빨리하려 했다는 의도를 밝혔다. 영화 ‘세븐’에서는 길을 걸으며 대화하는 장면을 27번 촬영했다. 비 내리는 창 밖 장면과 함께 차 속에서 대화하는 두 배우의 장면은 3주 동안 촬영했다고 한다.

　“내가 연출하고 싶은 방향은 이런 것입니다. 배우가 연기하는 공간(공간이 배우의 연기에 상당히 영향을 미침)에 굉장히 익숙해서 책가방을 내려놓고, 컴퓨터를 켜고,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꺼내는 행동이 ‘살면서 수천 번 넘게 해온 행동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보이길’ 원해요. 내게 중요한 것은 인물이 어떤 공간에 살고 있다는 설정이라면, 그 공간에 굉장히 익숙해서 거기서 실제로 지지고 볶고 살았다는 느낌을 주는 거죠.”

　위 내용과 관련한 로저먼드 파이크의 인터뷰도 들어본다.

　“배우에게 숨쉴 공간을 주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동시에 모든 것을 보는 능력도 놀라웠다. 한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내 뒤에서 내가 보는 시점을 촬영했는데, 대사 하나 없이 내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표정이 잘못된 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덕분에 무성영화처럼 말 없는 장면 속 표현력을 많이 배운 것 같다. 얼마전 내가 출연한 또 다른 영화 시사회 때문에 런던에 갔는데, 시사회 내내 ‘데이비드였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장면’이 많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씨네21에 양지현 뉴욕통신원이 2014년 10월 28일 올린 글에서)

	로자먼드 파이크.

　‘나를 찾아줘’는 남성 잡지에 기고하는 프리랜서 기자이자 작가인 닉(벤 에플렉)과 하버드 출신에 아름다운 외모에다 유명 동화작가인 부모를 둔 ‘슈퍼 걸’ 에이미(로자먼드 파이크 )가 주인공이다. 둘은 우연히 파티에서 만나 서로 첫눈에 반한다(둘의 말솜씨가 엄청나다). 둘은 영원히 열렬히 사랑하고 서로가 자신의 반쪽이 될 것이라는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결혼한다. 하지만 결혼 후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경제 불황(언제나 문제는 돈에서 시작한) 탓에 둘 다 백수가 되고 부부 사이에는 서서히 암운이 드리워지며 갈등이 시작된다.

　영화 첫 장면도 독특하다. 닉의 독백과 함께, 닉이 에이미의 뒷머리를 강아지 만지듯 어루만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잠시 후 야릇한 표정, 그렇다고 유혹적인 표정도 아닌 표정으로 돌아보는 에이미 모습이다. 반전에 대한 복선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러면서 대화가 이어진다.

　닉 : 당신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고 싶어. 너의 예쁜 두개골을 열고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생각을 잡으려고 애쓰는 나를 생각하지. 결혼 생활 중 제일 자주했던 질문이야. 당신은 뭘 생각하고, 뭘 느끼고 있는 거야? 우리가 서로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에이미: 내가 꿈꿨던 이상형인 이 남자가 정말 날 죽일 수도 있겠다.

　닉: 우리가 지금껏 했던 거라고는 서로에게 분노하고, 서로를 조종하려 하고, 서로에게 상처 줬던 게 전부잖아.

　에이미: 그게 결혼이야. (That’s Marriage.)

이 장면 말고도 영화 막바지의 싸늘한 표정, 온몸에 피칠갑 하고 날뛰는 장면 등등 로자먼드의 연기는 비평가들에게서 별점 5개를 받았다. 미국 아카데미상·영국아카데미영화상(BAFTA)·골든글로브상과 미국 배우조합상(SAG) 여우조연상 후보로 지명받았다. 핀처 감독은 골든글로브상, 영국아카데미영화상(BAFTA)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나를 찾아줘’의 또 다른 주인공은 미국 언론(언제나 언론이 문제)이다. 언론은 에이미 못지않게 닉을 휘두르는 강력한 통제자이다. 닉을 벌하는 것은 경찰이나 사법기관이 아닌 가짜뉴스나 부풀리기 뉴스가 난무하는 저널리즘이다. 남성과 여성, 강자와 약자, 가해자와 피해자, 선과 악의 이분법 틀에서 구분 짓기를 즐기는 대중에 영합해 언론은 닉에게 아내 살해범이라는 프레임을 씌워버린다. 언론은 닉을 범죄자로 만들기 위해 그의 여동생 마고와 근친상간을 벌인 것처럼 암시하기도 한다. 여론재판, 마녀사냥 시점에서 볼 수 있다.

　로자먼드 메리 엘런 파이크(Rosamund Mary Ellen Pike, 1979년생). 영국 런던 해머스미스 출신이다. 음악가인 부모님(아버지는 현재 버밍엄예술학교 음악교수이자 가극연구회 회장)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을 따라 유럽 곳곳을 여행했으며 이 시기 독일어·프랑스어를 습득하고 유연하고 다양한 사고를 익혔다. 로자먼드는 외동딸이다.

　일찍부터 연기 재능을 인정받아 커리어를 쌓아갔다. 2002년 007 시리즈 스무 번째 작품 ‘어나더 데이’에서 본드걸 ‘미란다 프로스트’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당시엔 ‘본드 걸의 저주’라는 인식이 강했던 터라 그의 팬들은 로자먼드의 본드 걸 발탁 소식을 듣고는 “오 마이 갓! 그녀는 이제 끝났어”라고 탄식했다.

　운 좋게도 본드 걸의 저주를 살짝 피해가는 데 성공하고 다양한 장르 영화에 꾸준히 출연한다(‘나를 찾아 줘’ 이전까지 그다지 성공작이 없기도 했다). 174cm 키와 금발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고전적인 서구 미인(제인 오스틴 원작의영화 ‘오만과 편견’에 출연함)의 이미지를 지지녔다. 2013년 방한한 톰 크루즈(톰은 부산명예시민이다)와 함께 부산에도 왔다.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영화 ‘잭 리처’ 레드 카펫 행사에 참석해 사인회도 열었다고 한다.

　영화 ‘잭 리처’를 조금만 보다 말았다. 로자먼드의 특징을 살리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로자먼드의 예쁜 모습만 자주 비춰줄 뿐이었다. 그러나 ‘퍼펙트 케어’(2021년)에서는 로자먼드의 장점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영화다. 포스터부터 강렬하다. 로자먼드 얼굴이 온통 붉은색으로 처리돼 악녀의 화신처럼 보이도록 했다.

	한쪽 눈을 잠시 감았을 뿐인데 로자먼드의 이미지는 깜찍 발랄 느낌으로 폭풍치듯 재빠르게 변해버렸다.

	2013년 1월 톰 크루즈와 함께 찍은 영화 ‘잭 리처’ 개봉을 기념해 부산 영화의전당을 찾아 레드카펫 행사에 참가한 로자먼드. 국제신문 DB

　영화 속에서도 악녀나 다름없는 역할을 맡았다. ‘페펙트 케어’의 말라 역은 역대급 밉상덩어리일 것이다. 영화 보는 내내 얼마나 밉살스럽던지 마피아 두목 로만(피터 딘크리지)에게 좀 당했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게 될 정도였다. 헤어스타일조차 미웠다. 칼처럼 날카롭고 카리스마 넘치는 헤어 이미지를 연출했고, 전자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유난히 하얀 치아를 강조하며 웃는 모습이 자주 보이는데 지극히 자본주의적이고 냉철한 돈 사냥꾼의 기운이 가득하다.

　헬스장에서 사이클링 하는 장면에서도 단순히 몸매를 관리하는 정도의 운동이라기보다 결승점을 향해 목숨 걸고 달리는 정도의 체력 단련을 하며 위기에 대처하는 강력한 포식자의 모습을 보인다.

　‘퍼펙트 케어’의 원제는 ‘I Care a Lot’이다. 필자 생각대로 말을 바꾸면 ‘I Care a Lot of Money’다. 돌보아줄 사람 없는 노인들의 건강과 재산을 관리하는 후견인 역할을 하는 사업을 의미한다. 즉, 케어 비즈니스를 운영하며 ‘법꾸라지’처럼 ‘합법적’으로 등쳐먹고 한탕하는 ‘말라 일당’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런 한탕주의 영화를 일명 하이스트 필름(Heist film) 또는 케이퍼 무비(Caper movie)라고 한다. 범죄영화의 하위 장르로, 강탈 또는 절도를 하는 모습과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말라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당신들을 봐, 거기에 앉아서 자신들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겠지. 당신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내 말을 믿어. 좋은 사람 같은 건 세상에 없어. 나도 당신들과 같았어. 열심히 일하고 정당하게 살면 성공과 행복으로 이어질 줄 알았지. 그렇지 않아. 정정당당이란 가난한 사람을 못 올라오게 하려는 부자들이 만들어낸 장난질이야. 나도 가난해 봤지만 영 체질에 맞지 않더라고. (중략) 내 이름은 말라 그레이슨, 나는 양이 아니야. 나는 그 빌어먹을 암사자라고(I Am a Fucking Lioness).”

　로자먼드 파이크는 악역으로 나와야 제 맛인가. ‘나를 찾아줘’ 이후 거의 7년 만에 ‘퍼펙트 캐어’로 본류 영역에 복귀한 로자먼드의 매혹적인 연기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로자먼드의 2021년 영화 ‘퍼펙트 캐어’ 포스터.

　출연한 배우 중 눈길 가는 두 사람이 있었다. 미드 ‘왕좌의 게임(HBO)’의 피터 딘클리지. 그는 왜소증(135㎝) 배우로 이 영화에서 중후한 목소리의 마피아 두목 ‘로만’ 역을 맡았다. ‘브로드웨이를 쏴라’의 다이앤 위스트(1946년생)의 카리스마 연기도 볼 만하다.

　추신: 로자먼드 파이크는 40대 중반을 향해가는 나이다. 운동을 많이 하기 때문인지 2013년 부산을 방문한 때나 2021년 올해 개봉한 ‘퍼펙트 캐어’에서나 한결같이 아름답고 강인하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말라가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장면이 제법 있다. 로자먼드의 팔 근육에서 운동 흔적이 보여 자료를 찾아보았다. 헬스장에서 마차 바퀴만 한 기구를 양손에 들고 운동하는 장면에 깜짝 놀랐다. 배우뿐 아니라 시인도 작가도 열심히 운동하면 여러모로 좋을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시인·ij071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