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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와 21세기 한국학 <23> 인생도 역사도 공이런가

‘선덕·원성왕이 혜공왕 죽였다’…숨은 진실 파헤쳐 정사(正史)를 고발하다

  • 정천구 고전학자
  •  |   입력 : 2021-01-31 19:33:32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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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신라 혜공왕 시해
- “난병의 소행” 모호하게 기록

- ‘옥에 갇힐 조짐’ 꿈 해몽 듣고
- 불안감에 집서 은둔하던 경신
- 여삼 조언 따라 제사 지낸 뒤
- 서열 앞선 주원 대신 왕위 올라

- 지옥·극락 오간 원성왕 얘기로
- 권력의 아수라장 시대 꼬집어
- 正史도 空일 수 있단 교훈 남겨

흔히 신라 역사는 혜공왕(惠恭王, 765∼780 재위)의 죽음과 함께 하대(下代) 곧 ‘혼돈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과정이 어떠했기에 그렇게 평가하는 것일까? ‘삼국사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혜공왕 16년(780)에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키고 무리를 모아 궁궐을 에워싸고 침범했다. 여름 4월에 상대등 김양상(金良相)과 이찬 경신(敬信)이 군사를 동원해 김지정 등을 베어 죽였다. 왕과 왕비도 난병(亂兵)에게 살해당했다.” 왕과 왕비 모두 난병에게 살해당했다는데, 난병이 어느 쪽 병사인지 모호하다. 반란병과 진압병이 어지러이 뒤섞여 싸우고 있었다면, 그럴 만도 하다. 그럼에도 석연치 않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혜공왕은 대란이 일어났을 때 김양상과 김경신에게 시해당했다.”
   
괘릉(掛陵)이라 불리는 원성왕릉.
■경신의 꿈과 해몽

혜공왕을 이어 김양상이 즉위했다. 그가 선덕왕(宣德王, 780∼785 재위)이다. 선덕왕은 재위 6년 만에 병에 걸려 죽었으며, 아들이 없었다. 선덕왕을 이어 즉위한 이는 함께 반란을 평정했던 경신으로, 곧 원성왕(元聖王, 785∼798 재위)이다. 원성왕 즉위에 대해 ‘삼국유사’의 ‘원성대왕’조는 매우 특별한 이야기를 전한다. 이야기는 즉위 전의 일에서 시작한다.

이찬 김주원(金周元)이 상재(上宰)였고 경신이 각간(角干)으로서 이재(二宰)의 자리에 있을 때였다. 경신이 복두(幞頭)를 벗고 흰 갓을 쓴 채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깨어나 점을 쳤더니, 점쟁이는 “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조짐이고,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조짐이며,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조짐입니다”고 풀이했다.

그 말을 들은 경신은 매우 걱정되어 문을 닫아걸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찬 여삼(餘三)이 와서 뵙기를 청했으나, 경신은 병을 핑계로 만나지 않으려 했다. 거듭 청하므로 결국 만났더니, 여삼이 “공께서 꺼리시는 게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경신이 자초지종을 들려주자 여삼은 일어나 절하고 말했다. “이는 좋은 조짐을 나타내는 꿈입니다. 공께서 만일 높은 자리에 올라도 저를 버리지 않으시겠다면 공을 위해 풀이해 드리겠습니다.”

   
강릉에 있는 김주원의 무덤으로, 명주군왕릉(溟州君王陵)이라 불린다.
경신이 곁의 사람들을 물리치자 여삼이 말했다. “복두를 벗은 것은 그 위에 앉은 사람이 없음이고,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조짐이며, 열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 자손이 왕위를 전해 받을 조짐이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감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입니다.” 이에 경신은 “내 위에 주원이 있는데, 내가 어찌 왕위에 오른단 말인가?”라고 말했고, 여삼은 “은밀하게 북천(北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며 제안했다. 경신은 그 말대로 했다. 얼마 뒤 선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도성 사람들은 주원을 궁궐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집이 북천의 북쪽에 있었던 주원은 갑자기 불어난 물 때문에 북천을 건널 수 없었고, 먼저 궁궐에 들어간 경신이 왕위에 올랐다.

꿈이 무얼 예고하는지, 어떤 조짐인지 그 자체로는 알 수 없다. 경신이 점을 쳐 해몽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해몽은 대개 견강부회(牽强附會)나 다름이 없어 옳은지 그른지 단정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반응이다. 경신은 관직을 잃고 옥에 갇힐 조짐이라는 해몽을 듣자 두문불출할 정도로 두려워했다. 측근조차 만나려 하지 않을 만큼 두려워한 까닭은 무엇일까? 나중에 여삼의 해몽을 듣고 그의 조언을 냉큼 받아들인 까닭은 또 뭘까?

■즉위에 묻힌 진실

   
갑작스런 폭우로 범람해 주원을 막고 경신의 즉위를 도운 북천.
‘원성대왕’조에선 경신이 즉위했다고 한 뒤 다음 대목이 이어진다. “주원은 물러나 명주(溟州)에 살았다. 왕이 왕위에 오른 그 때에 여산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 자손들을 불러 벼슬을 내렸다. 왕에게는 자손이 다섯이었으니, 혜충(惠忠) 태자, 헌평(憲平) 태자, 예영(禮英) 잡간, 대룡(大龍) 부인, 소룡(小龍) 부인 등이다. 대왕은 곤궁과 영달의 변화를 진실로 알게 되었으므로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를 지었다.”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주원이 명주 곧 강릉에 가서 산 것과 여산의 자손에게 벼슬을 내렸다고 한 것은 쉽게 이해된다. 다섯 자식을 거론한 일은 좀 뜬금없다. ‘삼국유사’에서 이렇게 왕의 자식들에 대해 언급한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곤궁과 영달의 변화를 진실로 알게 되어 ‘신공사뇌가’를 지었다는 것도 느닷없다. 아무래도 해명이 필요하다.

앞서 “혜공왕은 대란이 일어났을 때 김양상과 김경신에게 시해당했다”는 대목을 거론했다. 이에 따르면, 경신은 김양상과 함께 왕을 시해하는 대역죄를 지었다. 이 대역죄는 반란을 진압한 공 따위로는 상쇄할 수 없는 죄과다. 김양상이 즉위하면서 다행히 추궁당하지 않았으나, 경신은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왕이 된 김양상이 그를 혜공왕을 시해한 주범으로 몰아 죽일 수도 있었고, 정적들이 언제든 들고 나와 탄핵할 수도 있었으니. 관직을 잃고 옥에 갇힐 조짐이라는 해몽에 두려워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늘의 뜻인지 그저 운수가 좋았던 것인지 경신은 왕위 계승 서열에서 앞선 주원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이제 누구도 그의 이전 행적을 문제 삼을 일이 없어진 셈이다. 혜충과 헌평 등 다섯 자녀를 낱낱이 거론한 것도 그 때문이다. 경신의 죄과가 공론화돼 대역죄가 드러나면 멸문(滅門)의 화를 당하면서 가장 먼저 죽었을 이가 그들인데, 이제 그럴 일은 없어졌다는 암시다.

경신이 즉위한 뒤에 ‘신공사뇌가’를 지은 까닭도 마찬가지다. 돌아보면, 혜공왕 때에만 일길찬 대공(大恭), 대아찬 김융(金融), 이찬 염상(廉相)과 시중 정문(正門), 김지정 등이 반역을 꾀하다 모두 처형당했다. 경신과 김양상은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둘 다 왕위에 올랐다. 특히 김양상이 즉위 6년 만에 병으로 갑자기 죽어 유력한 계승자 주원의 차례였음에도 갑작스런 큰 비로 북천이 넘치는 바람에 경신이 즉위했다. 만약 혜공왕 때 시중이었던 주원이 즉위했다면, 경신은 어찌 되었을까? 경신은 혜공왕이 시해당하고 자신이 즉위할 때까지 겨우 7년 동안 지옥과 극락을 거듭 오락가락했다. 곤궁과 영달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변할 수 있다는 이치를 온몸으로 알게 되었으리라. ‘신공사뇌가’의 ‘신공(身空)’은 바로 그런 인생 이치를 압축해 표현한 말이다.

■역사 또한 공(空)인가

   

‘삼국사기’ 권10의 ‘원성왕’에서는 원성왕이 즉위한 사실을 알리면서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왕의 아우이고 평소에 덕망이 높아 임금의 체모가 있다”고 누군가의 말을 들며 뭇 사람이 일제히 경신을 옹립했다고 썼다. 심지어 “비가 그치니 도성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고 했다. 이것이 사실일까? 아니면 즉위에 걸맞게 예우한 것일까?

‘원성대왕’을 통해 민중은 그런 서술을 한낱 수작으로 보았다. 경신의 꿈과 해몽, 해몽에 따른 반응, ‘신공사뇌가’를 지은 일 따위를 이야기하면서 경신의 심사와 심리를 드러내고 또 숨은 진실을 보여주었다. 권력의 아수라장이야말로 공(空)의 이치를 가장 잘 드러낸다는 것도. 여기서 정사(正史)라는 공인된 역사 기록 또한 공(空)일 수 있다는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정천구 고전학자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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