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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와 21세기 한국학 <22> 민중의 이야기 씻김굿

화랑 숭고한 죽음, 진흥왕 과오로 숨진 백성…이야기로 씻김굿 하다

  • 정천구 고전학자
  •  |   입력 : 2021-01-24 19:58:24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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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산 전투서 죽은 장춘랑·파랑
- 공 세우려 넋이 돼 군대 합류
- 태종 장의사 세우고 명복 빌어
- 민중은 이야기로 이들 한 달래

- 신라 영토 확장해 나간 진흥왕
- 위업만 담은 삼국사기와 달리
- 백성 백제 포로 만든 죄 문책
- 전쟁 고통 견뎌낸 민초들 애도

- 원한 갚음 대신 한풀이 선택
- 해원사상 민중 철학임을 강조

오래도록 약체였던 신라가 마침내 상황을 역전하고 통일을 이뤘다. 대개 통일의 주역으로 ‘화랑(花郞)’을 꼽는다. ‘삼국사기’가 진흥왕 37년조에서 화랑의 유래를 들려주고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郞世記)’와 최치원의 ‘난랑비(鸞郞碑)’를 거론하며 역사·사상적 의의를 길게 서술한 것도, 권41에서 권43까지 세 권의 열전을 김유신 한 사람에게 배정하고 권47에 해론(奚論), 소나(素那), 관창(官昌) 등 장렬하게 죽은 화랑을 대거 실어 그 숭고함을 부각한 것도 그런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진흥왕의 영토 확장을 입증해주는 창녕의 척경비와 북한산의 순수비.
■죽어도 죽지 못한 두 화랑

‘삼국유사’에도 화랑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서도 ‘장춘랑파랑(長春郞罷郞)’은 좀 특이하다. “처음에 백제 군사와 황산(黃山) 전투에서 싸울 때, 장춘랑과 파랑은 진중에서 죽었다. 나중에 백제를 칠 때 꿈에 태종에게 나타나 말했다. ‘우리는 옛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습니다. 백골이 되었음에도 나라를 오롯이 지키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따라다니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위엄에 눌려 남들 뒤로 좇아다녔습니다. 부디 왕께서는 저희에게 작은 위세나마 보태주십시오.’ 태종은 놀라며 괴이하게 여겨 두 넋을 위해 모산정(牟山亭)에서 하루 동안 경전을 설했다. 또 그들을 위해 한산주에 장의사(莊義寺)를 세워 명복을 빌게 했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장춘랑과 파랑을 위해 세운 장의사 터의 당간지주.
왜 죽은 뒤에도 장춘랑과 파랑은 계속 군대를 따라다녀야 했을까? 공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백제 멸망을 앞당긴 황산벌 전투에서 공을 세우지 못했기에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싸우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았어도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용맹하게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 화랑의 본분이지만, 알아주고 기리는 이들이 있을 때 그 의기와 절개가 빛나고 그 죽음도 숭고해진다. 장춘랑과 파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으나 이름을 드날리지 못한 것, 그리하여 그들의 숭고한 죽음이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이 못내 한이었다. 죽어서도 군대를 따라다닌 이유다.

문제는 당나라 대장군인 소정방의 위엄에 눌려 군대 뒤꽁무니나 따라다니고 있어 도저히 공을 세울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화랑으로서 의기와 용맹이 대단했다고 해도 당나라 대장군이 지닌 기개와 위세를 감당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속된 말로 소정방이 ‘나이롱뽕’으로 대장군이 된 게 아니니, 당연하다. 그래서 태종의 꿈에 나타나 위세를 빌리려 했던 것이다. 태종이라면 당태종과도 겨룰 만한 왕이었으니.

태종은 모산정에서 두 넋을 위해 경전을 설하고 장의사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이것으로 두 화랑은 더는 공을 세우려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진중에서 싸우다 죽은 것만으로도 고귀하고 숭고해서 큰 공을 세운 것이나 진배가 없다고 인정받은 것이다. 물론 그들의 숭고한 죽음을 알아주며 한스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인정해준 이들은 왕이 아니라 민중이었다. 민중은 이야기로써 두 화랑의 넋을 달래고 한을 풀어주는 씻김굿을 해준 셈이다. 서울 종로구에는 지금도 그때 세운 장의사의 당간지주가 서 있다.

■왕의 위업에 가려진 인민

   
진도 씻김굿에서 극락으로 가는 길을 닦아주는 길닦기.
‘삼국사기’ 진흥왕 15년(554)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가을에) 백제왕 명농(明襛)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군주(軍主)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아 싸웠으나 불리했다. 신주(新州)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군사를 데리고 와서 교전했으며, 비장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얼른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군대가 승세를 타 크게 이겼다. 좌평 네 명과 사졸 2만9600명을 베어 죽였고, 말은 한 필도 돌아가지 못했다.”

명농은 백제 성왕(聖王, 523∼554 재위)의 이름이다. 성왕 32년에 신라를 습격했다가 왕이 죽었다는 기사가 ‘백제본기’에도 나온다. 그런데 위 기사는 백제 군사가 쳐들어와 처음에는 신라 군사가 불리했으나 이윽고 김무력 등의 구원으로 전세를 역전해 백제의 왕과 좌평 등 거의 3만 여 명을 베어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는 사실만 알려준다. 참으로 이것이 전부일까? ‘삼국유사’에도 ‘진흥왕(眞興王)’이 있는데, 사뭇 다르다.

“제24대 진흥왕이 즉위했을 때의 나이가 열다섯 살이었으므로 태후가 섭정했다. 태후는 곧 법흥왕의 딸이며, 입종 갈문왕의 비다. 왕은 죽을 때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고서 세상을 떠났다. 승성(承聖) 3년(554) 9월에 백제 군사가 진성(珍城)에 쳐들어와 남녀 3만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아 갔다. 이에 앞서 백제가 신라 군사와 합쳐서 고구려를 치려고 했는데, 진흥왕이 말했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고구려가 망하기를) 바라겠는가?” 이어 이 말이 고구려에 전해졌다. 고구려에서는 그 말에 움직여 신라와 서로 통하여 좋게 지냈고, 백제는 그것에 심사가 뒤틀려서 쳐들어왔다.”

‘삼국사기’에서는 성왕이 쳐들어간 곳이 관산성이라 했는데, ‘삼국유사’에서는 진성이라 해서 차이가 난다. 그렇지만 두 곳 모두 지금의 충북 옥천 지역으로 추정되고 시기도 거의 같으므로 같은 전쟁으로 볼 수 있다. 중요한 차이는 신라 군사가 대승을 거둔 사실만 기록한 점과 신라의 남녀 3만9000명이 포로로 잡혀간 사실만 각각 서술한 점에 있다.

진흥왕은 재위 기간 내내 전쟁을 거듭하면서 영토를 확장해 삼국의 경쟁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으니, 참으로 신라의 중흥에 이바지했다고 할 수 있다. 시호도 그 업적에 걸맞게 “참으로 일으켰다”는 뜻의 ‘진흥(眞興)’이다. ‘삼국사기’는 그런 공적을 주로 기록했다. 그런데 과연 그런 기록이 온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삼국유사’의 ‘진흥왕’에서는 왕의 위업을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고구려를 함께 치자고 한 백제의 제의를 거절한 탓에 신라 백성이 사로잡혀 갔다고 해서 도리어 무책임을 지적하고 있다. 번드레한 거절로 왕의 위신은 한껏 올랐을지 몰라도 그 뒤에 찾아올 재앙은 전혀 예측도 대비도 하지 못해 무고한 백성을 포로로 전락시켰으니. ‘삼국사기’가 면책(免責)해준 왕을 ‘삼국유사’는 민중의 법정에 불러내 문책(問責)했다.

더욱 주목할 대목은 서두다. 왕이 “죽을 때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고서 세상을 떠났다”는 글귀를 앞세우고 곧바로 남녀 3만9000명이 백제 군사의 포로가 되어 끌려간 사실을 썼다. 짧지만 묵직하다. 이는 무얼 의미하는가? 진흥왕으로 하여금 애도를 표현하게 한 것이다. 영토를 빼앗긴 백제와 고구려의 거듭된 침입으로 죽거나 끌려간 변경과 지방의 인민을 위한 애도이며, 끊임없는 영토 확장 전쟁으로 힘겹고 고달프며 시름겨우면서도 꿋꿋하게 살아낸 민초를 위한 추모다.

■원한을 풀어주는 씻김굿

   
공자는 ‘이직보원(以直報怨)’ 곧 ‘원한은 곧음으로써 갚는다’고 했고, 노자는 ‘보원이덕(報怨以德)’ 곧 ‘원한은 덕으로써 갚는다’고 했다. 곧음으로든 덕으로든 갚음은 대상을 필요로 한다. 만약 대상이 불명확하거나 죽었다면 어찌할 것인가? 우리 민중은 갚음 대신에 ‘풀이’를 택했다. 한풀이는 원한을 스스로 풀어내는 일이고, 한바탕 굿으로 풀어낸 것이 씻김굿이다. ‘장춘랑파랑’과 ‘진흥왕’은 누구보다 한이 많았을 민중의 씻김굿이었다. 이로써 해원(解寃) 사상이 본디 민중의 철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천구 고전학자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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