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 참정권 확대 등 주창하고
- 아나키스트로 낭만주의 구가
- 동양문명 폄하로 비판 받기도
1806년 5월 20일 영국 런던 근교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조기 교육을 받았다. 동인도회사에서 일한 아버지는 철학자 역사학자였다.
그는 밀(사진)이 3세에 라틴어 그리스어 고전을 읽어내자 천재성을 확인하고 조기 교육하는 데 열성을 쏟았다. 밀은 12세가 되자 대수학 프랑스어 논리학을 깨쳤다. 한창 뛰놀 나이에 공부만 했던 밀은 자서전에 “나는 소년이었던 적이 없다”고 썼다.
공리주의 대가인 제러미 벤담을 추종했던 아버지에게서 유독 이성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은 아들은 신경쇠약증을 앓았다. 그래선지 밀이 피력한 일부 주장은 날이 서, 비판받는다.
대개 서양사상가는 동양 문명을 평가절하하는데 밀도 그런 성향을 보였다. 그는 일국에서는 관습이라는 횡포에 저항해 역사가 진척되는데 중국 같은 동양에서는 그런 시도가 없다고 했다. 유럽은 다양성과 교양이 풍부해 그렇지 않다고 견줬다. 중국 역사는 외세로 개량하는 게 가능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서양 제국주의를 미화한다는 지적을 불렀다. 그는 아버지에 이어 영국 제국주의 산물인 동인도회사를 35년간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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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 빅토리아 공원 내 밀 동상. |
밀은 여성 인권 신장에 관심을 가졌고, 사회계급을 지배자·노동자가 아니라 남·여로 나눴다.
그는 1865년 하원의원에 당선돼 여성참정권을 주창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공리주의자로 출발해 그 토대 위에 영국 ‘점진적 사회주의’ 기초를 세웠고, 아나키스트로서 낭만주의를 구가했다.
‘논리학 체계’(1843년) ‘경제학 원리’(1848년) ‘대의 국가론’(1861년) ‘공리주의’(1863년) ‘여성의 복종’(1869년) ‘자서전’(1873년)을 생전에 냈다. ‘사회주의’(1891년)는 사후 나왔다. 1868년 하원의원 선거에 진 뒤 1873년 숨졌다. 우리는 밀을 소수를 고려하며 모든 이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싸운 사상가로 기억한다. 서부국 국장 겸 교열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