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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이동순의 부산 가요 이야기 <16> ‘에레나가 된 순희’에 관한 상념

시골 소녀 순희의 이름 빼앗은 6·25전쟁 소용돌이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1-01-10 19:29:13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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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서양 여인 일컫던 ‘에레나’
- 전후 접대부·매춘녀 뜻하게 돼

- 노래 속 ‘에레나’는 북한처녀
- 전쟁 겪으며 유흥가 여인 전락

- 훗날 엔카 표절 의혹으로 논란

‘에레나’는 슬픈 여인의 이름, 이 ‘에레나’가 들어가야 노래가 되는 가요작품들이 있었다. ‘에레나’는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나라에서 그 허약한 삶의 상징이듯 가냘프게, 혹은 억센 잡초처럼 한 생을 살아간 여인이었다. 술집이나 외국인 상대의 매춘여성들이 바로 그 주인공으로 흔히 ‘에레나’라 불리었다. 1956년 4월 당시 국내의 한 언론 통계에 의하면 이런 ‘에레나’ 부류의 여성들은 무려 11만 명이 넘었다. 외국인상대의 여성은 6만, 사창(私娼) 여성이 3만, 일반접대부가 2만 명이었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에레나’란 이름의 기원은 12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엘렌, 엘린, 헬레나, 헬렌, 엘레나, 알리나 등등 이런 평범한 서양 여인의 통칭이다. 이 이름들이 섬나라 일본을 거쳐서 ‘에레나’란 일본식 발음으로 구석진 삶의 슬픈 자리를 잡았다. ‘에레나’란 이름이 등장하는 노래만 하더라도 ‘에레나가 된 순희(한정무, 안다성)’ ‘앵두나무 처녀(김정애)’ ‘춤추는 안나(나애심)’ ‘두고 온 에레나(남일해)’ ‘명동의 에레나(남일해)’ ‘불 꺼진 206호(남일해)’ ‘등대불 사랑(백야성)’ ‘마도로스 술잔(백야성)’ ‘항구의 에레나(위키리)’ ‘항구의 인사(최갑석)’ ‘추억의 에레나(김성현)’ ‘마리아 에레나(뚜아에무아)’ ‘에레나라 불리운 여인(인순이)’ ‘내 이름은 숙이(이수진)’ 등등 그 수가 적지 않다. 이 가운데 우리 가요사에서 ‘에레나’ 테마의 기점이 된 노래 ‘에레나가 된 순희’(손로원 작사·한복남 작곡)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전후 접대부 여성의 통칭 ‘에레나’

6·25전쟁 시기 기지촌 모습. 당시 ‘양공주’라 불리며 멸시받은 기지촌 접대부 여성들이 보인다. 이동순 제공
이 노래는 원래 1954년 한복남이 운영하던 부산 도미도레코드에서 한정무의 음반으로 발표되었다. 노래의 등장인물인 ‘에레나’는 평범하고 순진한 북한의 농촌소녀였다. 하지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의지가지없는 처량한 신세로 피란민 행렬에 떠밀려 항도 부산까지 흘러왔다. 절박한 생존을 외톨이로 이어가야 할 순이에게는 삶의 방책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타인의 권유, 혹은 꾐에 빠져 술도 팔고 윤락도 하는 유흥가 여인으로 전락. 삶에 환멸이 오고 갈등과 후회가 솟구칠 땐 혼자 항구로 나가 흐느껴 울었으리라.



그날 밤 극장 앞에서 그 역전 카바레에서/ 보았다는 그 소문이 들리는 순희/ 석유불 등잔 밑에 밤을 새면서/ 실패 감던 순희가 다홍치마 순희가/ 이름조차 에레나로 달라진 순희 순희/ 오늘 밤도 파티에서 춤을 추더냐

그 빛깔 드레스에다 그 보석 귀걸이에다/ 목이 메어 항구에서 운다는 순희/ 시집갈 열아홉 살 꿈을 꾸면서/ 노래하던 순희가 피란 왔던 순희가/ 말소리도 이상하게 달라진 순희 순희/ 오늘 밤도 양담배를 피고 있더냐 -한정무의 ‘에레나가 된 순희’ 전문



침침한 석유 등잔 앞에서 어머니와 마주 앉아 실꾸리에 하얀 실을 감으며 혼례 준비를 하던 시골 소녀가 밤 깊은 카바레에서 이름조차 ‘에레나’로 바뀌고, 야간 조명에 언뜻 화려하게 보이는 드레스와 값싼 모조 장신구를 온몸에 둘러쓴 비천한 용모로 바뀌었다. 말투도 예전 같지 않으며 그토록 순진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특히 2절 마지막 대목은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카바레에서 다리를 꼰 채 양담배를 피우는 순희(에레나)의 방자한 자세와 타락상(墮落相)을 그리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6·25전쟁의 엄청난 격동 속에서 사회구성체가 어떻게 이동하며 급변했던가를 이 노래 가사는 생생한 현장감으로 보여주고 있다.

■김새는 일본 엔카곡 모방의혹

‘에레나가 된 순이’가 실린 음반.
출반 뒤 한정무 음반의 판매가 저조한 상태에서 안다성(1930~·본명 안영길)이 다시 취입해 히트곡이 되었다. 하지만 안다성 음반에서는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마지막 부분을 ‘오늘 밤도 파티에서 웃고 있더라’로 고쳤다. 창법은 한정무보다 유려하고 매끈하지만 원곡 가사보다 한결 싱겁고 밋밋하게 느껴지며 고유의 맛이 제대로 살아나질 않는다. 안다성(安多星)이란 예명은 자신이 평소 흠모하던 미국의 흑인성악가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1879~1993)의 이름에서 ‘앤더슨’을 음역한 것이라고 한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카바레는 시민의 건전한 사교공간이었다. 그러나 6·25전쟁을 겪은 한국사회에서 카바레란 이름은 매우 퇴폐적이며 저속한 댄스홀, 뮤직홀, 나이트클럽 따위의 성격으로 변질되어 숱한 사회문제를 불러일으켰다. 노래 한 곡이 한 시대를 웅변적으로 증언해주는 가요작품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노래와 관련해서 개운치 않은 일이 하나 확인되었다. 이 작품에서 1951년에 발표된 일본 엔카 ‘상하이에서 돌아온 리루’를 모방한 혐의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츠무라 켄(津村謙)이 부른 엔카는 영화주제가로 큰 인기를 얻었던 작품이다. 이것을 전쟁 직후 한국의 작사가 손로원과 작곡가 한복남이 내용을 번안하고 곡조를 모방해서 리메이크했던 것이다.

두 작품을 비교하며 대목대목 주의 깊게 들어보면 이런 의심의 여지가 차고 넘친다. 도입부의 탱고풍 리듬이나 가사내용의 전개구도 및 설정이 아주 비슷하다. 말하자면 일본 여인 ‘리루(リル)’의 자리에 ‘순희’를 대신 앉혀놓은 것이다. 당시엔 이런 일이 흔했으니 지금 크게 나무랄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기분이 불편한 건 사실이다. 지난 식민지 시절 일본에 그렇게 굴욕적으로 당하고도 여전히 일본을 문화적 중심으로 뒤따르고 있었으니 이런 해바라기 현상을 과연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노래는 지난날 벗들과 밤 깊도록 한잔 술을 마시며 함께 부르고 즐기던 곡이었다. 하지만 이런 배경을 알게 되니 그 신명도 예전처럼 신선하게 살아나질 않는다.

시인·가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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