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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익진 시인의 무비셰프 <4> 메릴 스트립, 문학 향기 가득한, 영혼을 움직이는 배우

  • 정익진 시인
  •  |   입력 : 2020-12-26 07:3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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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익진 시인의 무비셰프 <4> 메릴 스트립(Meryl Streep), 문학 향기 가득한, 영혼을 움직이는 배우

영화 ‘아웃오브 아프리카’(1986년) 주인공 메릴 스트립(카렌 역)이 사랑하는 연인 로버트 레드포드(데니스 역)의 장례식. 묘지 앞에서 추모의 시를 낭독하는 그 장면.

 그리고 어느 날 저녁을 먹은 뒤 디저트와 와인을 나누며 데니스가 생각해낸 첫 문장에 카렌이 이야기를 지어내는 장면(메릴 스트립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내가 본 영화의 명장면으로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개봉 시기로 봐서 내가 시인으로 등단하기 훨씬 이전이다. 영화 속 시가 누구 시인지 몰랐다. 이 영화의 추도식 장면을 다시 돌려보며 카렌이 쥔 시집이 누구 시집인지 확인해 보았다.

 화면에서 ‘Ha…an’이란 철자가 얼핏 스쳐 지나갔다. (낡은 시집이라 책 표지 이름이 좀 지워진 상태였다) 영국 시인 A. E. 하우스먼(Alfred Edward Housman)의 시집 ‘슈롭셔의 젊은이’에 실린 ‘젊어서 죽은 운동선수에게’였다. (자막으로 나온 이 시 번역이 어느 정도 잘된 것 같아 받아 적었다)

   
메릴 스트립은 영화 ‘소피의 선택’에서 불멸의 연기를 보여준다. ‘’소피의 선택‘ 속 메릴.
 그대가 경주에서 승리를 안겨주었을 때, 우리는 장터에서부터 응원을 보냈죠.

 어른들과 아이들이 환호를 보냈고, 우리들은 당신을 무등 태워 집으로 돌아왔죠.

 멋진 청년은 너무도 빨리 영광이 퇴색한 들판을 지나쳐 버렸네.

 월계수는 빨리 자라나지만, 장미보다 빨리 시든다네.

 승리한 주자의 이름은 그의 죽음보다 서둘러 사위어들었지요.

 색 바랜 월계관의 머리맡에는 힘을 다한 죽음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의 머리 위에는 그녀의 꽃다발보다 더 빨리 시드는 화환이 놓여 있다네.



 하우스만이 보어 전쟁에서 전사한 젊은이들을 안타까워하며 이 시를 썼다고 전한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배경이 된 1차 대전 중에 이 시는 더욱 사랑받았다. 전쟁 때문은 아니지만, 데니스도 비행기 사고로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아직 그의 죽음이 믿기지가 않는 카렌은 하우스만의 시를 읽고 난 뒤, 슬픔과 회한이 가득한 눈동자로 그와 함께했던 자리, 아득히 펼쳐진 아프리카 초원의 나무와 풍경을 바라본다. 가슴 저미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모차르트의 유일한 클라리넷 협주곡과 존 베리의 서정이 불타는 음악은 광활한 아프리카의 대지를 한층 아름답게 수놓았다. 영화는 또 한 편의 시를 데니스의 음성으로 들려준다.



 하하 웃으며 그는 말했지.

 모든 게 잘 보이는군.

 악마는 노를 저을 줄 알지. … 잘 있어요, 안녕히.

 그러나 그대와 결혼 축하객들에게 하는 말이라오.

 사랑을 잘하는 사람이 기도도 잘 한다오.

 그건 사람이나 새나 동물들도 마찬가지이지.



 문학에 일가견 있는 카렌이 데니스의 암송을 듣는 도중, 몇 구절 빼먹었다고 이야기하자, 데니스는 명랑한 표정으로 시시한 부분을 뺐다고 말한다. 재미있는 장면이다. 데니스가 카렌의 머리를 감겨 주면서(이른바 샴푸 씬) 암송하는 위의 시는 새뮤얼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의 산문시 ‘늙은 선원의 노래’(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다. 콜리지와 윌리엄 워즈워스가 함께 펴낸 시집 ‘서정가요집’(Lyrical Ballads)에 있다.

 사람들의 영화 취향은 여럿일 것이다. 나는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했거나 예술가가 주역인 영화를 최우선으로 택한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도 원작자가 영화 주인공이기도 한 카렌 블릭센(필명 아이작 디네센, 1885~1962)이고, 그의 회고록에 가까운 자전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 같은 영화를 다시 보는 경우가 더러 있다. 다시 보면서 당시 내가 어떤 상황이었나 기억하려 애쓴다. 문득 영화관에서 죽음을 맞이한 시인 기형도가 떠오른다. 시인의 죽음을 둘러싸고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겠지만 그가 왜 영화관에 갔는지 또 어떤 상황이었고 심정은 어떠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문학·미술을 공부하고 극강의 언어감각까지

 메리 루이즈 메릴 스트립(Mary Louise Meryl Streep, 1949년 6월 22일 ~ )은 미국 뉴저지 출신 배우이다. 메릴 스트립은 이 시대 최고 배우로 인정받는다. 아카데미상에 21차례 지명돼 최다수 후보에 오른 6명 배우 중 한 명이다. 그중 조연상 한 번, 주연상 두 번을 수상하였다. 골든 글로브상 후보에도 31차례 올라 8차례 수상했다.(이 분야 세계 신기록 보유자라 할 만하다)

 문학사 학위를 수여하는 뉴욕주 배서 대학에서(Vassar College)에서 문학 쿰 라우데(Cum Laude.우등이라는 뜻)를 받고 졸업했다. 다양한 연극무대를 경험했고 1975년 예일대학교에서 MFA(미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1년에는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어학에 재능을 보였고 문학과 미술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 상당한 관심과 조예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외국어를 포함한 언어에 대한 그의 재능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 1982년)에선 폴란드계 유대인 소피 역을 맡아 의도적으로 폴란드식 어설픈 영어 발음을 선보이며 아주 자연스럽고 나무랄 데 없는 독일어를 구사해 뛰어난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소피의 선택’ 원작은 미국의 윌리엄 스타이론(William Styron, 1925-2006)이 1979년 발표했다.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배경은 2차 대전이 끝난 지 2년 후인 1947년 뉴욕이다. ‘전쟁이 남긴 상처’라는 테마로 대중적 관심을 받은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도 시를 낭독하고 소설을 읽는 문학 요소가 가미된 장면을 볼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내레이터 역할을 하는 스팅고 역시 소설가 지망생으로 설정됐다. 어느 날 저녁 침대 위에 네이단과 소피가 함께 있다. 토마스 울프의 소설집 ‘천사여 고향을 보라’ 몇 구절을 소피는 폴란드말로, 네이단은 영어로 읊고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다시 네이단이 읽는다. 영화 결말에 이르러 소피와 네이단이 그들의 침대 위에서 동반 자살한 광경을 바라보는 스팅고가 디킨슨의 시선집을 펴들고 이 시를 낭독한다. 디킨슨의 시들은 특별한 제목이 없다. 대게 첫 행을 제목으로 한다. 스팅고는 흐느끼며 이 시를 낭송한다. 시집 속표지 상단에 ‘네이단의 소유물’이라고 적혀 있다. 네이단이 시집을 귀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이 침상을 풍부하게 하리라 Ample make this bed.

 이 침상을 경외케 하리라 Make this bed with awe;

 이 안에서 심판의 새벽이 올 때까지 In it wait till judgment break

 탁월하고 공정한 심판을 기다리리라 Excellent and fair.



 이불을 바로 펴고 Be its mattress straight,

 베개의 모양도 둥글게 바로 잡아 Be its pillow round;

 일출의 황금빛 소음조차도 Let no sunrise’ yellow noise

 이 땅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리 Interrupt this ground.



  영화는 전쟁에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소피의 일그러진 삶을 통해 전쟁의 파괴성과 인간성 회복 메시지를 전한다. 홀로코스트 영화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서 두 자식을 두고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소피는 아버지와 남편을 잃고, 애인이 레지스탕스였다는 이유로 아우슈비츠로 보내진다. 수용소로 가는 도중 독일장교가 음흉한 속셈으로 소피에게 접근한다. 아이 둘 중 하나만 살려주겠다고 한다. 선택은 여러 가능성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를 버려야 하는 순간이다. 소피가 해야만 했던 그 선택은 가장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가스실을 향해 멀어져 가는 딸을 바라보며 소피가 소리 없이 절규하는 순간,

 바로 이 장면에서 보여준 메릴 스트립의 그 표정은 글쎄, 말로서 표현하기 힘든, 갑자기 온몸이 마비되는 듯한 전율이 오는 그 표정은 비극에 처한 인간의 극한이라고나 할까.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으로 벌어진 저 입’은 결코 다물어질 수 없으리라. 가장 깊숙한 곳에서 잠들었던 고통을 깨우고 아물었던 상처까지도 원상태로 되돌리게 하는 그런 충격적인 화면이었다. 당사자인 메릴 스트립은 지금도 이 장면을 쳐다보지 못한다고 한다. 이 장면 하나로도 메릴 스트립은 영원히 위대한 배우로 기억될 것이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중략)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중)



   
로버트 레드포드와 메릴 스트립이 빚어낸 영화 ‘아웃오브 아프리카’의 명장면, 그 유명한 샴푸씬이다.
‘소피의 선택’에서 보여준 불멸의 연기

 소피는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아들을 선택해 살려낸다. 딸을 죽음으로 내보낸 그 죄책감으로 소피는 있는 힘을 다해 살아남아 수용소에 있는 아들을 구해내고자 한다. 하지만 아들을 찾지 못하고 전쟁은 끝나버린다. 미국에 와서 네이단(1947년생 배우 케빈 클라인이 이 역을 맡음)을 만난 소피는 그와 함께 살아간다. 네이단은 정신이상으로, 증세가 심각한 수준이다. 네이단의 기이하고 파괴적인 행동은 과대망상과 피해망상에서 기인했다. 소피는 롤러코스터 같은 네이단과의 극히 불안정한 관계를 감내한다. 소피는 네이단의 찬사보다 경멸이 오히려 더 편했을 수 있다. 네이단이 초자아 역할을 해줌으로써 소피는 딸을 버렸던 자신을 가혹하게 징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죄의식에서 도망가는 방법은 역설적으로 죄의식을 떠안으면서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다.

   
영화 ‘철의 여인’에서 영국 수상 마거릿 대처 역으로 나온 메릴.
 소피는 영화에서 굉장한 미인으로 설정됐다. 배우로서 메릴은 할리우드를 주름잡던 엘리자베스 테일러, 잉그리드 버그만, 오드리 헵번, 샤론 스톤 같은 배우들에 비한다면 미녀라고는 하기 어렵다. 메릴의 연기가 이런 점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병적으로 보일 만큼 창백한 소피 역을 하여 1983년 두 번째 아카데미상을 받는다. 여우주연상이었다. 첫 번째 수상은 더스틴 호프만과 나온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년)로 여우조연상이었다.

 메릴은 영화 ‘철의 여인’(2011)으로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메릴도 다니엘 데이 루이스처럼 아카데미상 3관왕 수상자이다. 무비셰프 3회의 데이 루이스가 최고 남성 연기자로 인정받았다면 여성 연기자 최고의 윗자리는 메릴 스트립이란 걸 부인하기는 어렵다. 영국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영화 ‘링컨(2013년)’에서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역을 맡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는데, 미국 배우 메릴 스트립은 ‘철의 여인‘에서 영국 수상 마거릿 대처 역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점이 재미있다.

 추신: 그렇게 영화를 보다 잠들었다. 새벽에 일어났다. 배고프다. 수프는 반만, 썬 파와 다진 마늘을 한 숟가락씩 넣고 컵라면에 물을 붓는다. 나는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잠시 후 컵라면 뚜껑을 떼어내고 후추와 참기름을 조금 뿌린다. 김치통을 꺼내 신김치 한 줄, 파가 동동 뜬 컵라면 수면 위로 조용히 내려놓는다. 먹는다. 후루룩 다 먹었다. 국물이 남았다. 밥 한 숟가락 만다. 다 건져 먹는다. 행복한 표정을 지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인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표정을 짓고는 새벽어둠 속에서 잠시 앉아있다. 컵라면 통 속을 들여다본다. 퉁퉁 불은 밥알 세 알이 개구리알처럼 바닥에 붙어있다. 숟가락으로 밥알을 건져먹는다. 밥알이 식었다. 나는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내 영화의 첫 장면들이다. 정익진 시인 ij071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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