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으로 분장한 헬레나 본햄 카터.

‘헬레나 본햄 카터(1966년생)’라고 발음했을 때, 혀끝에서 뭔가 색다른 맛이 느껴진다.

　헬레나, 라면 여성다운 이름일 테고, 갑자기 본햄은 뭐지? 본 참치, 혹은 햄의 원산지(本ham)? 거기다 카터! 고소한 땅콩 냄새가 나는가. 카터 칼(cutter)인가?

　원래 그녀 이름은 헬레나 보넘-카터, 배우 생활하면서 하이픈을 뺐다 한다. 한국에서는 ‘본햄 카터’라는 발음이 더 잘 알려졌다. 런던 이슬링턴 출신. 그녀의 영국식 영어 발음을 들어보면 귀족 가문임을 짐작하게 된다. 영화 ‘킹스 스피치’(2010년)에서 그걸 실감할 수 있다. 영어 발음이 독특한 ‘캐러비안 해적 시리즈’(2003~2017년)’의 세계적인 배우 조니 뎁(1963년생·잭스패로우 역)과는 무려 7편의 영화에 동반 출연했다. 무비세프 1편 브래드 피트와도 인연이 있다. 헬레나는 데이빗 핀쳐 감독의 ‘파이터 클럽’(1999년)의 말라 싱어 역을 맡아 조연으로 출연했다. 이 영화에서 헬레나는 퇴폐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오른손잡이 분장사에게 왼손으로 분장을 해달라 요구해 거칠고 짙은 화장술로 퇴폐를 더욱 강조했다. 거기다 담배 연기를 조폭 두목처럼 불량스럽지만, 기막히게 내뿜는 장면들이 기억난다.



‘뼈대 있는’ 영국 가문에서 태어나

　‘보넘-카터’ 가문은 대대로 금수저 또는 뼈대 있는 가문으로 고위급 정치가를 배출했다. 헬레나의 증조할아버지가 허버트 애스퀴스로 1908~1916년 영국 총리를 지냈다. 이런 명문가에서 자란 헬레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뇌졸중을 목격한 뒤 아버지에게 선물을 드리고 싶어 예술에 빠졌다. 할머니 바이올렛 본햄 카터는 윈스턴 처칠의 친구였다.



　13살 때 백일장 시 부문에 참여해 상을 받았다. 그 계기로 배우가 되기 위한 안내 잡지인 ‘스포트라이트’에 자기 사진을 보낸다. 1983년 만 16살(!)에 ’장미의 문양’이란 TV 영화로 데뷔한다. 우연히 유튜브를 뒤지다가 그녀가 영어로 시 낭송하는 몇 개 동영상을 발견했다. 한 동영상 제목은 이렇다. ‘Helena Bonham Carter on poetry and her favourite poems’. 헬레나가 좋아하는 시인으로 제니 조셉(Jenny Joseph 1932~2018, 영국)이 있다. 이 영상에서 헬레나는 조셉의 시‘경고(Warning)’에 나오는 구절 “내가 늙은 여인이 되었을 때 나는 보라색 옷을 입고, 내게 어울리지 않은 빨간 모자를 써야지(“When I‘m an old woman I shall wear purple/ With a red hat which doesn’t go, and doesn’t suit me.)”를 소개한다.



빙의…빙의…빙의…

　영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2010년)의 ‘붉은 여왕’은 붉은 머리 여왕이다. 가냘픈 몸집에 비해 머리만 엄청 큰 붉은 머리카락 여왕이다. 헬레나는 여왕 역을 맡아 괴팍하기 짝이 없고 질투심으로 가득 차 있으며 잔인한 성격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광기 어린 악녀로의 빙의이다. 이런 빙의가 한 두 건이 아니다. 다른 영화에서도 수없이 목격할 수 있다. 아무튼 커다란 붉은 머리가 주는 강렬함에 히스테리의 극한으로 치닫는 목소리 연기와 지저귀는 새와 같이 짹짹대는 대사 처리까지 오버랩돼 머릿속에서 지우기 힘든 장면들로 남아있다.



　영화 ‘프랑켄슈타인’(1994년)에서 헬레나는 어떠한가. 너무도 흉물스러워 입이 쩍 벌어진다. 구두를 수리할 때 쓰는 송곳으로 목이며 얼굴, 온몸을 기운 듯한 몸체로 나타난다. 머리카락도 듬성듬성. 영화 ‘혹성탈출(2001년)’에서는 아예 원숭이 분장을 한 유인원 ‘아리’ 역할이었고, ‘빅 피시(2003년)’에서는 유리구슬 눈동자의 마녀이자 으스스한 애꾸눈 ‘지니’ 역할이다.

　‘해리포터 시리즈’(2007~2011년)에서도 헬레나의 기행(?)은 계속된다. 벨라트릭스 레스트랭 역이다. 악녀 중 악녀로 불리는 그 모습은 한편 매혹적이기도 하지만, 태생적으로 어쩔 수 없이 사악한 마녀다. 마술봉과 채찍을 휘두르고, 비수를 던지며 미쳐 날뛰는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속 악마도 뛰쳐나와 그녀와 한 몸이 되는 걸 느낀다. 그 파괴적이고 사악한 행동에 후련함마저 맛본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인간은 환상과 허구에 열광하는가. 왜 안개 속 푸르른 빛과 피뢰침과 칼, 열대과일로 가득 찬 방과 바다 위에 뜬 거대한 바위에 이끌리는가. 왜 사악함에 물드는가.

	헬레나 보냄 카터의 청순하고 풋풋했던 시절 모습.

‘전망 좋은 방’을 기억하세요?

　헬레나 본햄 카터는 괴상하고 기이한 역할을 많이 했으나 그런 역만 하는 배우로 낙인찍지 말기 바란다. 청순하고 로맨틱하고 달달한 역할을 얼마나 우아하게 연기했는지 알면 놀란다. 루시 허니처치 역을 맡은 ‘전망 좋은 방’(1985년)부터 ‘레이디 제인’(1986년), ‘하워즈 앤즈’(1992년) 그리고 ‘햄릿’(1990년)의 오필리아까지 주로 시대극에서 그녀의 사랑스럽고 큐티한 매력을 마음껏 발산했다.



　영화에서 배역을 맡은 배우는 그 역할이 요구하는 분장과 의상으로 갈아입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자기를 버려야 한다. 배우에게 분장과 의상은 매우 중요하다. 분장과 의상은 하나의 ‘공간’이다. 하나의 공간에 의해 거기 속한 이들의 생각과 행동이 바뀔 수 있다. 현대 추상회화 혁명으로 불리는 마크 로스코(1903-1970년, 라트비아)의 그림들이 걸린 공간에서 사람들은 이유 없이 눈물 흘리듯이, 현재 내 몸을 감싼 의상과 분장에 의해 사람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 배우는 주어지는 의상과 분장이라는 공간을 통해 자기 역할에 최대한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시여! 조리법을 혁신하라, 껍질을 벗겨라

　이는 시인의 시 작업에도 적용할 수 있다. 영화배우가 자기 정체성을 버리고 영화 속 인물로 빠져들어야 하는 것처럼 시인도 시를 쓸 때 천의 얼굴, 천 개 페르소나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셰익스피어 문학에 나온 무수한 등장인물은 셰익스피어의 페르소나들이다. 셰익스피어의 상상 속에서 태어난 인물들이다. 영화배우가 다양한 배역을 맡아 자기 영역을 확장해 나가듯 시인도 현재 자신의 시 작품에서 껍질을 벗고 시 세계를 넓혀나가야 한다. 그것이 시인이고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시의 조리법을 개발하지 않고 똑같은 시를 쓴다는 것은 매일 똑같은 음식을 먹는 것이나 다름없다.ij071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