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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와 21세기 한국학 <15> 단군 신화와 주몽 신화

단군·주몽 두 건국신화, 차별·대결 아닌 평등·화합의 정신 담아

  • 정천구 고전학자
  •  |   입력 : 2020-12-06 19:19:57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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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건국에 관한 단군 이야기
- 천신 환웅과 여인이 된 곰의 혼인
- 사람과 짐승은 같다는 인식 지녀

- 동물이 지켜낸 알서 태어난 주몽
- 비정상적 출생에 배척 당했지만
- 능력으로 고구려 세워 인정받아

- 두 신화, 건국 과정의 승리보다
- 누구나 대등하단 이치 중요시 해

일연은 ‘기이’편 ‘서’에서 중국 고대 제왕들이 신이하게 태어난 일들을 나열한 뒤 “그렇다면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한 데서 나왔다고 한들 무엇이 괴이하겠는가?”라고 썼다. 이는 삼국이 중국과 대등하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으로, 고조선에서 삼국까지 다양한 건국신화가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유이기도 하다. 대체로 건국신화는 어떤 민족이나 집단이 자신들의 우월성·긍지를 표현한 이야기로, 그 민족이나 집단이 위기에 처하거나 수난을 당할 때면 다시금 강조되고 널리 이야기된다. 일제강점기에 단군신화가 재조명된 것도 그 때문이다. 일연도 몽골의 침입으로 초토화된 상황에서 고대의 신화들을 소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건국신화들은 더 깊이 음미하면서 넓은 시각에서 해석해야 할 가치가 있다. 여기서는 특히 단군신화와 주몽신화를 살핀다.

■단군, 사람과 짐승의 융화

   
중국의 신화에서 인류를 창조했다고 하는 여와와 복희.
‘삼국유사’의 첫 번째 신화는 ‘고조선’에 실린 단군신화다. ‘고기(古記)’에서 인용된 이야기인데, 이렇게 시작한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여러 아들 가운데서 환웅(桓雄)이 천하에 자주 뜻을 두더니 인간세상을 탐내었다.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아채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할 만한 곳이었다. 그리하여 천부인(天符印, 천상의 표지) 세 개를 주고는 내려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3000명을 데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서는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였다. 이 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불렀다. 환웅은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과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에 머물며 사람들을 다스려 일깨웠다.”

천신(天神)의 아들인 환웅이 인간 세상에 하강해 신시를 열어 사람들을 다스렸다고 했다. 이 부분만 보면, 더없이 고귀하고 신성한 천신족이 다른 민족이나 집단보다 우월함을 내세우는 신화가 된다. 또 단군신화가 아닌 환웅신화가 돼야 마땅해 보인다. 그러나 조목의 명칭에서 드러나듯 고조선 건국에 관한 이야기여서 단군이 주인공이며, 환웅은 단군의 혈통을 위해 등장했을 따름이다.

단군은 천신의 아들이기만 한 게 아니다. 그의 모친은 본디 곰이었다. 범과 함께 굴에 살던 곰은 쑥과 마늘을 먹으며 참고 견딘 끝에 여인이 되었고, 아기를 가지고 싶은 바람을 환웅과 혼인함으로써 이루었다. 천신과 짐승의 혼인은 귀천(貴賤)의 양극단이 화합한 것이고, 그 결과가 단군이다. 단군은 하늘과 땅, 귀함과 천함이 차별되지 않고 대등함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사실 사람과 짐승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이 하나라는 것은 고대 이전의 오랜 관념이었다. 중국 신화에서 인류 창조 주역인 여와·복희는 고대인이 남긴 형상을 보면 사람의 머리와 뱀의 몸을 한 인수사신(人首蛇身)이다. 사람과 짐승이 한 몸이었다. 몽골 제국 건국신화를 보여주는 ‘몽골비사’도 “지고하신 하늘의 축복으로 태어난 부르테 치노(잿빛 푸른 이리)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코아이 마랄(흰 암사슴)이었다. 그들이 텡기스를 건너와 오난 강의 발원인 보르칸 성산에 터를 잡으면서 태어난 것이 바타치 칸이다”로 시작된다. 칭기스 칸의 시조가 사람이면서 짐승인 부르테 치노와 코아이 마랄이었다는 것이다.

단군신화에서 곰은 사람이 되기 위해 쑥과 마늘을 먹으며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아야 했다. 이는 사람과 짐승이 다르면서 같다고 하는 대등의 인식을 나타낸다. 이런 인식은 사람과 짐승이 하나라는 오랜 관념이 천신과 사람, 사람과 짐승은 서로 다르며 우열이 있다고 하는 관념으로 바뀐 뒤에 그 차등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나타난 것이다. 즉 중세의 보편철학이나 보편종교에서 내세우는 평등과 대등의 관점이 고대 신화 속에 녹아든 흔적이다.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도 그런 인식의 표현이다.

■주몽, 비정상이 정상이다

   
황하의 신 하백. 주몽신화에 등장한다.
단군신화와 비슷한 듯 다른 신화가 주몽신화다. 주몽신화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는 금와왕에게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정을 통했다고 했고, 그 뒤 알을 낳았다. 알은 사람이 아닌 짐승을 상징한다. 금와왕이 버렸을 때 개나 돼지, 소와 말 따위가 해치지 않고 새와 짐승이 지켜준 일 등이 그 점을 입증해준다. 문제는 버림받았다는 사실인데, 이는 사람과 짐승은 하나라고 하는 관념이 인정되지 않게 된 시대의 신화임을 말해준다.

비정상으로 출생해 버림받았던 주몽은 커서도 배척받는다. 금와왕의 맏아들 대소는 “주몽은 사람이 낳은 게 아닙니다. 일찌감치 없애지 않으면, 뒷날에 걱정거리가 될지도 모릅니다”고 왕에게 말했고, 대소 형제들과 신하들은 몰래 주몽을 해치려 했다. 주몽은 위험을 피해 남쪽으로 달아나 졸본주에 이르러 고구려를 세웠다.

단군신화에서는 사람과 자연의 관계가 중시되고 또 원만했으나, 주몽신화에서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중요해지면서 대립과 갈등이 두드러졌다. 이는 한 집단 안에서 차별과 차등이 뚜렷해진 역사적 사실이 투영된 결과다. 주몽이 금와왕의 적자인 대소 형제들과 다른 처지에 있었던 일이 이를 입증한다. 대체로 주몽의 영웅적 면모에 주목하고 그 점을 강조하는데, ‘고구려’ 조목에서는 다른 면이 도드라진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졸본성으로 비정되는, 중국 요녕성(遼寧省) 환인현(桓因縣)의 오녀산성(五女山城).
처음에 금와왕은 알을 버렸으나 알에서 깨어난 주몽은 버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아들들과 대등하게 대했다. 주몽을 없애야 한다는 말도 듣지 않았다. 이는 유화가 금와왕의 후궁이었음을 암시한다. ‘고구려’의 말미에 ‘법원주림(法苑珠林)’에서 인용한 이야기를 실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옛날 영품리왕(寧稟離王)의 시녀가 하늘의 기운을 받아 아기를 배어 낳았는데, 왕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버렸으나 짐승들이 보호해 주어서 죽지 않고 살아 마침내 부여의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시녀가 하늘의 기운을 받아 아기를 밴 이야기를 끌어온 것은 유화 또한 비슷한 처지에 있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알에서 깨어난 주몽은 비정상이고, 태에서 태어난 대소 형제들은 정상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반대다. 배다른 형제를 죽이려 한 대소 형제들은 비정상이고, 형제간 대립과 대결을 피해 달아난 주몽은 정상이다. 또 금와왕의 아들로서 왕위를 이어받은 대소가 고귀하고 우월한 듯하지만, 후궁(유화)의 자식인 주몽이 자기 능력으로 고구려를 세우면서 대등해졌을 뿐 아니라 우열도 뒤바뀌었다.

■화합과 대등의 신화

   
단군신화와 주몽신화는 건국신화다. 건국 과정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다. 따라서 죽을 고비를 거듭 넘기면서 시련을 극복하고 투쟁해서 승리해 건국의 위업을 달성하는 영웅이 주인공이다. 그 민족에게 오래도록 숭앙받는 것도, 외세의 침입으로 국난을 겪을 때 그 민족이 건국 영웅을 불러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건국신화들은 대결과 투쟁에서 승리를 중시하지 않고 있다.

‘고조선’에서 단군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자 도읍을 장당경으로 옮겼다. 대결보다 양보를 선택한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주몽이 대결하거나 투쟁한 일은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를 세움으로써 출신이나 신분이 아닌 능력이 중요하며 누구나 대등하다는 이치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정천구 고전학자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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