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엔 특정 왕조 단대사만 기록
- 11~14세기 세계사 급변 흐름 속
- 中 사마광 ‘자치통감’ 정초 ‘통지’
- 한계점 지적하며 통사 부활시켜
- 역사의 대격변 깊이 깨우친 일연
- 혼돈 속 질서 찾는 새로운 시도
‘삼국유사’ 체재가 전체적으로 기전체(紀傳體) 형식을 따른 것임은 앞서 살펴보았는데, 또 주목할 점은 고조선에서 후삼국까지 서술한 통사(通史)인 사실이다. 이 통사적 성격은 시대 산물이면서 일연의 독특한 역사 인식의 표현이다. 먼저 전자의 측면을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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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통감’. 294권에 이르는 방대한 통사의 저술은 역사적 전환을 자각한 결과다. |
11~14세기는 세계사에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난, 일종의 전환 시기였다. 중국에서는 대혼란의 오대십국(五代十國, 907∼979)을 거쳐 송(宋) 왕조가 들어섰으나, 송도 1127년 여진족의 금(金)에 의해 강남으로 쫓겨났다. 금 또한 1223년 몽골 제국에 멸망했고, 남송 또한 그 뒤를 이었다. 이 시기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자치통감(資治通鑑)’(1084), 정초(鄭樵, 1104∼1162)는 ‘통지(通志)’(1161)를 저술했다. ‘자치통감’(294권)은 주(周) 위열왕(威烈王) 23년(기원전 403년)부터 오대(五代) 말(959년)까지 16 왕조 1362년간이 편년체(編年體) 형식으로 서술됐고, ‘통지(通志)’(200권)는 기전체 형식을 따라 ‘삼황(三皇)’에서 ‘수당(隋唐)’까지 서술됐으니, 모두 통사(通史)다.
반고의 ‘한서(漢書)’ 이래 단대사(斷代史) 저술이 이어졌는데, 특정 왕조 역사만 기록한 단대사는 왕조들의 흥망성쇠 및 과거와 현재 변화를 통해 역사 원리를 탐구한다는 역사서 편찬 취지에 어긋난다. 사마광과 정초는 그런 단대사의 한계를 지적하며 통사를 부활했다. 이런 변화는 불교사서(佛敎史書) 저술에서도 나타났다.
■중국의 불교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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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통감을 저술한 ‘사마광’. |
불교사서에서도 단대사 전통이 이어졌으니, 양나라 때의 ‘고승전’을 이어 ‘속고승전’, ‘송고승전’ 등이 차례로 저술됐다. 그런데 송대에 통사가 쏟아져 나왔다. 먼저 도원(道原)이 1004년 석가모니 이전 과거칠불(過去七佛)을 시작으로 인도의 조사(祖師) 27명과 중국의 조사들을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는 계보에 따라 서술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30권)을 내놓았다.
‘경덕전등록’을 이어 여러 전등록이 편찬되더니, 남송 때 보제(普濟, 1178∼1253)의 ‘오등회원(五燈會元)’(1252)이 나왔다. ‘오등회원’은 앞서 나온 전등록들을 종합한 것으로, 과거칠불에서 시작해 인도 중국의 조사들을 계보에 따라 편년(編年) 형식으로 저술한 전기집이면서 통사다. ‘경덕전등록’과 ‘오등회원’ 모두 ‘선종(禪宗)’의 통사라는 점이 한계였다.
천태종(天台宗)에서도 불교사서를 저술했다. 종감(宗鑑)이 1237년 기전체 형식 ‘석문정통(釋門正統)’(8권)을 내놓았다. ‘본기’ ‘세가’ ‘지’ ‘열전’ 등으로 이뤄져 있다. ‘본기’는 선종의 경우와 달리 역사적 부처인 석가모니부터 시작되며, ‘지’에서는 신토(身土), 제자(弟子), 탑묘(塔廟) 등 여덟 항목이 설정돼 있다. 또 지반(志磐)이 1269년 ‘불조통기(佛祖統紀)’(54권)를 저술했다. ‘석문정통’을 보완한 것으로, ‘석본기(釋本紀)’(8권) ‘석세가(釋世家)’(2권) ‘석열전(釋列傳)’(12권) ‘석표(釋表)’(2권) ‘석지(釋志)’(30권) 등으로 이뤄져 있다. ‘석문정통’과 ‘불조통기’는 기전체 형식 불교사서라는 점에서 선종의 불교사서와 달랐으나, 통사라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송대에 다른 종파들이 몰락할 때 비교적 새로운 종파인 선종과 혁신을 시도한 천태종만이 흥성했다. 자파의 연원을 밝히고 정통성을 내세울 필요가 있어 각각 불교사서를 내놓았는데, 포괄적인 불교사가 아니었다는 점과 세속 역사를 아주 배제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뚜렷했다. 이러한 점은 기존 고승전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통사를 지향했다는 점에서는 시대 흐름에 부합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의 불교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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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사 구층목탑지. ‘삼국유사’에는 황룡사구층탑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
대륙에서 떨어진 일본도 정치적 변화와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11세기 말 천황의 외척이 요직을 차지해 실권을 쥐었던 섭관정치(攝關政治)에서 천황이 양위한 뒤 상황(上皇)이 되어 정무를 직접 실행한 원정(院政)으로 바뀌었고, 12세기 말에는 무가(武家)가 정권을 쥔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가 등장했다. 이 시기 사찰들은 권력자들과 결탁해 장원을 소유하면서 부패하고 타락했으며, 무장한 승려들이 출현해 횡포를 부리며 세력 다툼을 벌였다. 천재지변도 거듭 발생해 조야에 불안감이 팽배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우관초(愚管抄)’(1220)와 ‘원형석서(元亨釋書)’(1322)가 저술됐다.
‘우관초’는 천태좌주(天台座主)인 지엔(慈圓, 1155∼1225)이 불교적 관점에서 세속 정치사를 쓴 역사서다. ‘우관초’(7권)는 크게 세 부분이다. 권1과 권2는 제왕의 연대기인데, 진무(神武) 천황부터 재위 연수, 즉위년, 자녀 수 등과 집정한 대신들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다. 권3에서 권6까지는 연대기의 사실을 상세히 부연한 것으로, ‘도리(道理)’에 입각해 서술했다. 권7은 도리에 대한 총론이다. ‘우관초’는 역사의 변화와 추이는 도리에 따른다고 하는 ‘도리사관(道理史觀)’을 제시했는데, 사실상 통치 계층의 안정을 역사의 도리라 여긴 것에 불과하다.
‘원형석서’(30권)는 승려 코칸 시렌(虎關師鍊, 1278∼1346)이 일본 불교사를 종합적으로 서술한 일본 최초 불교통사다. 권1에서 권19까지는 전(傳)으로서, 고승전 체재를 따라 전지(傳智)·혜해(慧解)·정선(淨禪)·감진(感進)·인행(忍行)·명계(明戒)·단흥(檀興)·방응(方應)·역유(力遊)·원잡(願雜) 등 열 개 편목으로 이뤄져 있다. 권20에서 권26까지는 자치표(資治表)로서 제왕의 연대기에 해당하는데, 불교사와 관련된 사실을 편년에 따라 서술했다. 권27에서 권30까지는 지(志)이며, 불교 제도 및 사찰, 행적이 뛰어난 속인들 등에 대한 기록이다. ‘원형석서’는 기전체 형식 속에 고승전 체재를 품은 불교사서로서 매우 독창적인 통사다. ‘우관초’는 제왕과 대신들의 행동 및 그 관계가 역사 흐름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원형석서’는 자국 불교사와 불교문화를 통해 자국의 우월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몽골과 고려의 침입으로 각성된 국가 관념의 표현이었다.
■삼국유사만의 독창성
왕조의 흥망과 정치 권력의 부침은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고 상층과 하층의 모든 인민을 불안하게 한다. 불투명한 미래와 예측하기 어려운 향방은 장구한 역사에서 길을 찾도록 부추긴다. 혼돈 속에도 질서가 있으리라는 기대와 확신으로 역사 이면에서 작용하는 원리를 찾고 밝히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통사는 그런 시도의 산물이다.
11세기에는 거란족, 12세기에 여진족, 13세기 몽골. 이들의 침입에 시달린 고려는 무신 정권이 들어서면서 내부적 모순과 폐해가 심각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1238년, 황룡사의 구층 목탑은 불탔다. 몽골과의 전쟁으로 초토화된 이 나라 곳곳을 두루 돌아다닌 일연이 초석들만 남은 황룡사 터를 찾았을 때, 장엄했던 구층탑이 사라진 그 공간에서 무얼 느끼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로 보건대, 일연은 도도한 역사 흐름과 대격변을 더욱 깊이 느꼈던 듯하다.
삼국의 역사를 넘어 고조선부터 후삼국에 이르는 ‘통사’를 지향한 데서는 역사 원리를 탐구하고 밝히려 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는 시대의 흐름을 따른 것이다. 그렇지만 민중의 목소리를 전면에 내세운 점은 일연의 통찰이며 ‘삼국유사’만의 독창성이다.
정천구 고전학자
※공동기획
·㈜상지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국제신문 인문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