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적인 신작과 실험적인 30점 전시
- “동음이의어지만 반대 개념의 두 단어,
- 비우고 채우며 내 작업 키워드 뽑아내”
들판의 평범한 나무들 중 한 그루 뒤에 새하얀 캔버스를 설치한다. 캔버스가 드리워지면서 그 나무는 더이상 무리 속의 이름 없는 존재가 아니다. 나무는 이제 김춘수의 시 ‘꽃’처럼 ‘내게 이름이 불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로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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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ee’.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
사진을 통해 묻혀진 대상을 환기시키는 작업으로 유명한 ‘나무’ 시리즈의 이명호 작가가 오랜만에 부산을 찾았다. 고은사진미술관에서 다음 달 25일까지 개최하는 기획전 ‘드러내다’ 전으로, 작가의 대표적인 작업 방식인 ‘사진-행위 프로젝트’ 전반을 아우르고 있다. 작가의 의도에 따라 보이지 않던 대상을 보이게 하거나, 잘 보이는 대상을 보이지 않게 하는 대비 작업을 절묘하게 표현했다. 특히 부산을 주제와 소재로 한 ‘부산적인’ 신작과 함께 인화지 위 피사체를 모두 사라지게 하는 실험적인 작품 등 모두 30여 점을 소개하고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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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thing But(아무 것도 아닌 그러나)’. |
전시장 입구에서 작가는 “전시 제목인 ‘드러내다’는 ‘드러내다’와 ‘들어내다’의 동음이의어다. 각각 발음은 같지만 ‘나타나게 하다’와 ‘사라지게 하다’의 사뭇 다른, 사실상 반대의 결을 지닌 두 가지 의미다”며 “이번 전시에서 저의 모든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뽑아낸 게 가장 의미있는 것 같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전시장은 크게 3군데로 나뉜다. 한국어 발음으로 분류한 ‘하:야치(화이트 룸)’‘까:마치(블랙 룸)’ ‘하:야치(도), 까:마치도(그레이 룸)’로 명명한 공간이다. 화이트 룸에서 먼저 만나게 되는 전남 해남의 골프장 언덕 위에 서 있는 나무는 캔버스를 뒤에 설치함으로써 더욱 선명하게 자신을 드러냈다. 작가는 같은 공간을 낮과 밤, 동과 서로 달리해 촬영함으로써 같은 사물을, 마치 다른 공간·다른 나무인 것처럼 대비시켰다. 작가의 대표작 ‘나무’ 연작의 하나로 ‘재현’ 작업이다. 원거리에서 한 폭의 산수화처럼 보이는 앙증맞은 나무의 실제 높이는 9m를 훌쩍 넘는다.
그레이 룸에서는 ‘어떤 것도 아닌 그러나(Nothing But)’ 연작을 만난다. 사진 속 바다는 부산 다대포다. 작가는 나무 작업과 반대로 바다 위 바위 앞에 거대한 형태의 캔버스를 닮은 철판을 설치함으로써 바위를 지워버리는, ‘들어내는’ 작업을 선보인다. “‘나무 연작’에서 나무를 겉으로 드러낸 게 오히려 대상을 멀게 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대상을 비워냄으로써 대상의 본질에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이 작업을 구상했다. 어떤 것도 아니지만, 그 뒤에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무한 상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들어내는’ 작업은 인화지 위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는 실험적 작업으로 귀결된다. 전시장 곳곳에 소개된 액자 속 새하얀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는 을숙도 다대포 등을 촬영해 사진을 만들었다가 하염없이 인화지에 맺힌 상을 긁어내면서 사진을 없앴다. 모든 것을 긁어내 아무 것도 없어 보이지만, 실제 그 종이 위에는 바다가, 파도가, 바위 섬이 들어 있다.
작가는 “들어내서 드러내는, 혹은 드러내서 들어내는, 비우고 채우고, 채우고 비우는 ‘텅 빈’과 ‘꽉 찬’이 교차하는 작업이다. 그동안 제가 해온 ‘사진-행위 프로젝트’의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어”라고 설명했다. 이외도 사막 연작인 신기루 작업(재연), 필름이 오래돼 망가지면서 우연히 회화적인 느낌을 뿜어내는 작품 등 다채로운 작업들이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임은정 기자 iej09@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