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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의 그곳에서 만난 책 <84> 정기문 평론가의 번역서 ‘사상으로서의 조선적’

“일제 핍박 속 모국어 지키려는 사람들 흥미로웠죠”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6-21 18:53:24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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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 2차 대전 후 자국 내 조선인  
- 외국인 취급하며 ‘조선적’ 명칭
- 고교 국어교사인 정 평론가 
- 6명의 삶과 사상 담은 책 번역

- “재일교포의 후손인 원저자 
- 차별 견뎌낸 역사 산증인 만나
- 인터뷰한 내용 책으로 펴내

- 청산없는 식민주의·인종차별 
- 인간 존엄성 말살 사회 고발

“당신의 나라는 어디입니까?”라는 질문에 국가명칭을 답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나라는 세계지도에도 없고,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고향을 잊지 않았고, 언어를 지키고 있다. 이들은 ‘조선적’을 가지고 있다.

‘조선적’은 일본이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자국에 살고 있던 조선인(일본은 이들을 황국신민이라 불렀고, 전장에까지 동원했다)을 2차대전 패배 후 외국인으로 취급하며 권리를 박탈하면서 외국인등록증명서 등의 국적란에 기입시킨 ‘지역의 총칭’이다. 즉, 일본에 사는 조선(한반도) 출신의 한국인들에게 붙인 표지이다. 일본은 이들을 ‘자이니치’라고 부른다. 국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지역적 기호이며, ‘조선 사람’이라는 뜻이다. 남북한 정부 수립(1948년 8월15일·9월9일) 이전의 일이었다. 당시 일본에 있던 재일동포들은 모두 조선적으로 등록됐다. 일부에서 오해하는 것처럼 조선적이 북한 국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조선적으로 살아온 여섯 인물의 삶과 사상을 담은 ‘사상으로서의 조선적(나카무라 일성 지음)’을 번역한 정기문 평론가를 초읍동 어린이대공원 산책로에서 만났다.

■차별 시대 산 ‘역사의 산증인’ 6인

   
조선적으로 살아온 여섯 인물의 삶과 사상을 담은 ‘사상으로서의 조선적’을 번역한 정기문 평론가가 어린이대공원에서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정기문은 198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를 수료하고, 문학평론가,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대학 강사를 거쳤으며, 현재 동인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어린이대공원에는 여름 오후의 햇살이 뜨겁게 쏟아졌다. 입구를 지나 왼쪽 산책로로 접어들자 시원한 나무그늘이 드리워진다. 정기문은 책을 번역하는 동안 머리가 복잡해질 때마다 이 산책로를 걸었다고 한다. 도심 속의 녹음은 편안했지만, ‘사상으로서의 조선적’은 제목만 봐도 짐짓 무거운 주제로 다가온다.

책을 번역한 이유에 대해 정기문은 “책 속 여섯 인물(고사명, 박종명, 정인, 박정혜, 이실근, 김석범)들의 삶과 신념에 강하게 끌렸다”고 말했다.

“일본이 전쟁에 패한 후, 당시 일본에 있던 조선인 60여만 명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국어강습소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지배자의 언어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언어를 되찾는 것이었죠. 엄청난 핍박을 당하면서도 언어를 지킨 분들이 있습니다. 여섯 인물 중 박종명, 박정혜는 교직에 종사했습니다, 다른 분들은 문학자이고, 사상가입니다. 세 분이 문학자에요. 언어를 가르치고 그 언어로 문학을 했던 분들입니다. 교사이면서 문학을 공부하는 저로서는 당연히 관심이 생겼죠.”

책의 원저자 나카무라 일성은 마이니치 신문기자를 거쳐 현재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재일조선인과 이주노동자, 난민을 결부시킨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써왔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나카무라 일성은 “뿌리의 한쪽을 경상남도에 두고 있다”고 밝혔다. 성은 일본어로, 이름은 ‘일성’이라는 한글발음으로 쓰는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재일조선인에게 특히 가혹했던 1940~60년대를 거쳐 차별의 시대를 살아낸 ‘역사의 산증인’인 여섯 인물들을 만났다. 긴 인터뷰가 이어졌고, 이 책이 세상에 나왔다.

정기문은 어렸을 때 할머니가 일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 “일본에서 나서 교육을 받고, 해방이 된 후 고국으로 돌아온 뒤 어린나이에 결혼을 하셨고, 아버지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해 할아버지가 징병되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셨어요.” 그는 할머니의 삶의 무게를 이따금 생각했다. 그 생각은 역사와 문학 공부로 이어졌고, 식민지 시기를 살아갔던 문학자들의 삶과 연구에 닿았다.

■삶과 문학이 일치했던 인물들

   
사상으로서의 조선적- 나카무라 일성 지음, 정기문 옮김· 보고사·2010
여섯 인물의 육성에, 원저자의 문장까지 겹겹이 쌓인 언어의 층을 우리말로 독자가 읽을 수 있게 번역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인물의 삶과 신념을 알아가는 과정이 곧 번역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개인적으로는 대하장편소설 ‘화산도’의 저자 김석범의 삶에 관심이 생겨 읽기 시작한 책이지만, 다른 인물들의 삶도 알게 되면서 ‘역사’와 ‘인간’을 생각했다. 그동안 복잡하고 골치 아프다는 이유로, 내가 관심을 가진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는 냉소적인 태도로 모른 척 했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 마음을 휘젓는 것 같다.

“이 책은 여전히 불식되지 않은 식민주의의 잔재와 경제적 낙차에 의한 차별, 피부색에서 비롯하는 인종차별, 종교에 의한 차별, 남자의 여자의 성차별,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차별 등 갖가지 폭력적 경계선이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시키고 있는 우리 세계의 작동 방식을 근본에서부터 되묻는다.” 책 속 대목에서 조선적이라는 이유 말고도 갖가지 고통스러운 차별을 감내하면서 살았던 인물들의 삶이 떠올라 마음이 서늘해진다. 일본이 이 땅에서 저지른 죄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음도 다시 깨닫게 한다.

정기문은 이 책의 주제가 ‘만남’이라고 말했다. 조선적으로 살아가는 여섯 인물에게는 조선인이라는 존재를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게 교육한 일본인 선생, 위험을 감수하고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 필생의 업이 된 교육과 문학의 길로 이끌어준 이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그 만남은 위안이었고 동시에 용기와 희망이었다. 처참히 무너질 뻔한 그들의 삶을 지탱시켜준 버팀목이었다. 정기문은 타자의 고통을 아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또 말했다. “삶과 문학이 일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분들의 삶은 그러했습니다.”

   
책장을 덮으며 ‘조선적’에 대한 기사를 검색해보았다. ‘조선적’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남한 국적이 아니라 부모의 묘소를 참배할 수도 없고, 고향을 방문할 수도 없다며 “일본인도 밟는 땅에 우리는 왜 못가나요”를 절박하게 외치는 이들이 아직 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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