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운동가 조력자로만 평가돼
- 인권·민주화 운동 등에 앞장선
- 주체적 여성지도자의 행적 담아
- 그녀가 기록한 글과 자료 ‘눈길’

봄길 박용길(1919∼2011) 여사. 평생을 교회 여성 지도자, 여성 신학자,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왔음에도 대중에게는 고 문익환(1918~1994) 목사의 아내로만 부각돼 왔다. 목사이자 시인, 사회운동가였던 늦봄 문익환 목사는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59세에 처음 감옥에 들어가 77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섯 차례 수감된 기간을 합하면 10년이 넘는다.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민주화운동에 발을 들여 감옥 안에서 글로써 행동으로써 생산적이고 실천적인 삶의 후반기를 일궈갈 수 있었던 것은, 감옥 밖에서 그와 함께 했던 아내 박용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결정적이었는지를 반증한다. 박 씨는 문 목사가 감옥에 있는 동안 가족 중심의 구속자석방운동을 벌인 동시에 감옥 안 남편에게 거의 매일 손편지를 써 보냈다. 그가 남긴 3000여 통의 편지는 민주화와 통일의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서로 독려하며 여성의 몸과 마음으로 역사를 살아낸 궤적이다.

박용길과 집안의 중심을 지켜 준 시어머니 김신묵 여사(1980년대 초반). 삼인 제공

이 책은 한반도의 수난사를 운명처럼 짊어진 93년의 삶을 그가 남긴 기록과 대화, 60여 컷의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풀어낸 전기다.

책은 두 가지 부문에 방점을 뒀다. 하나는 젠더 관점에서 박용길의 행적을 살리는 것이다. 주체적인 여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 역사(History)가 아닌 박용길의 허스토리(Herstory)를 엮었다. 주로 문익환과 관련된 일들로만 알려져 왔다면 책에서는 교회 여성 지도자로서, 민주화운동 시대에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한 투사로서, 통일의 여성 사도로서 박용길의 독자적 위상을 발굴하고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아울러 새롭게 글을 창작하기보다는 박용길이 기록하고 모아놓은 글과 자료를 살리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기록꾼 박용길은 일상사에서부터 구속자 가족들의 이야기, 갈릴리교회 주보 등 194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보고 들은 일을 기록했으며 자료를 모아뒀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됐다. 1부에서는 어린 시절과 요코하마신학교 유학 시절에 이어 문익환과의 결혼, 민족 동란으로 인한 피난 생활이 그려져 있고, 2부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여신도회 임원·한빛교회 장로, 기독교 여성·가정 전문지 ‘새가정’ 운영위원 등으로 영성의 힘을 사회현실 운동으로 펼쳐낸 활동이 소개된다. 4·19 혁명의 시대적 요청에 응답해 인권과 민주화 운동에 나서게 된 과정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를 이끌며 1987년 6월의 함성에까지 치닫는 봄길의 발걸음이 3부에, 남편과 사별한 뒤 그와 같이했던 통일의 꿈을 이루고자 금기를 깨고 분단선을 넘은 일, 그리하여 양심수를 지원하던 이에서 스스로 양심수가 된 봄길의 행보를 담았다.

특히 4부에서는 1989년 문 목사가 방북의 뜻을 비치자 “거 갔다 오셔야죠”라며 전혀 놀라지 않은 데 이어, 노태우의 중간평가를 이유로 방북을 머뭇거리는 남편에게 “아니 당신은 도대체 믿을 게 못돼” 하면서 화를 내고 식당을 나와 버린 일화는 옳다고 생각한 일은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여장부다운 뚝심을 엿보게 한다. 임은정 기자 iej09@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