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의 다정한 영웅이 되겠다던 말은 그의 얼굴색처럼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2년 만에 돌아온 스파이더 맨(톰 홀랜드)은, 제목에서부터 집에서 멀어지겠노라(파 프롬 홈, far from home) 선언하고 있다. 미국의 정다운 이웃들을 버리고, 그는 유럽으로 무대를 옮겨갔다. 그게 또 유럽의 다정한 영웅이 되고 싶어서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로지 여자친구를 만들겠다는 일념 하나로 착실하게 계획까지 세운 뒤 스파이더 맨은 미국을 떴다. 그렇게 유럽에 도착한 스파이더 맨은 흐린 판단력으로 모두를 위험에 빠뜨렸다. 제가 벌인 일을 수습하기에도 바쁜 히어로, 스파이더 맨. 땀 많이 흘렸을 것 같다. 제아무리 히어로라도 여름용 반팔 수트를 새로 장만해 입었어야 덜 더웠을 것이라 본다.

	영화 <쁘띠 아만다> 포스터

스파이더 맨이 유럽에 도착하고도 한참 동안 여자친구 만들기에 눈이 멀어있는 동안, 프랑스에서는 차마 입에 다시 올리기에도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수도 파리 한복판과 생드니에서 연쇄 테러가 터진 것이다. 실제 상황이다. 프랑스와 독일이 친선 축구 경기를 하던 2015년 11월 13일(현지시간) 프랑스 내에서는 최소 7건의 연쇄 테러가 발생했다. 사망자 166명, 부상자는 400명 이상. 약속보다 늦어 운 좋게 목숨을 건진 다비드(뱅상 라코스테)는, 공원에 도착해서는 눈앞에 펼쳐진 생지옥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하나뿐인 누나 상드린(오펠리아 콜브)을 그렇게 잃었다. 프랑스 테러를 다룬 첫 영화, <쁘띠 아만다>(미카엘 허스, 2018) 이야기이다.

물론 <쁘띠 아만다>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영화는 아니다. 극중 인물들은 지극히 예상 가능한 선택지들을 두고 고민한다. 그들의 행동이 관객들 예상을 아주 빗나가는 일은 없다. 그래도 언젠가 영화를 볼 생각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밑에 있는 스테이시 마틴 사진까지만 보고 지금 당장 뒤로 가기를 눌러야 한다. <님포매니악 vol.1>(라스 폰 트리에, 2014)도 보고, <트리트 미 라이크 파이어>(마리 몽쥬, 2018)도 봤다. 스테이시 마틴은 <쁘띠 아만다>에서 소위 ‘리즈를 갱신했’다. 정말 예쁘다. 영화 스포일링 있다고 분명히 경고했다.

	영화 <쁘띠 아만다> 스틸컷. 프랑스 배우 스테이시 마틴

가을이 가도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배우 故 전미선은 생전 <봄이 가도>라는 작품에서 가슴 저미는 모성애를 연기했다. <봄이 가도>는 모두가 기억하는 2014년 4월 16일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우선 고인이 된 배우와 유가족에게 애도의 뜻을 전한다. 어머니 역할에 어울리는 따뜻한 배우로 기억한다. 남모를 아픔이 있을 줄 몰랐다. 명복을 빈다.

<봄이 가도>는 현장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엄격한 영화가 아니다. 참사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발을 동동 굴렀던 시민들, 한 명이라도 더 구조하려고 애썼던 대원들과 유가족들 등 모두를 위로하는 영화다. 봄이 가도 살아가야 하는 이들 모두가 영화의 주인공이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뒤 그들은 아픔을 치유하느라 고된 날들을 보내야 했다. 과거형이 아닐 수도 있다. 가히 그 깊이를 짐작도 못 할 지독한 트라우마이기 때문이다. 돌아오지 않는 딸 향이(김혜준)를 기다리며 밥상을 차리던 신애(故 전미선)는 마지막 눈물로 어렵사리 아픔을 해소했다. 향아, 사랑해. 신애는 오랫동안 붙잡고 놓아주지 않던 딸을 그토록 어렵게 보냈다. 영화는 그녀가 다시 일상을 회복하며 끝난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가끔 뜨거운 감정이 허락도 없이 올라오더라도 우리는 함께 견디며 살아야 한다.

	영화 <봄이 가도> 스틸컷. 배우 故 전미선

그 가을, 다비드는 누나를 허무하게 보낸 뒤 그녀의 집에 딸 아만다(이조르 뮐트리에)와 덩그러니 남았다. 주변으로부터 위로 아닌 위로를 들으면서도 이겨내고, 서로 의지하고, 때로는 함께 무너졌다. 모든 참사 현장이 그렇지만, 얼마나 참혹했으면 미카엘 허스 감독은 자세한 현장 묘사를 피한다. 남은 자들을 생각한 감독의 세심한 배려다. 무엇보다 감독은 관객들이 참사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남은 자들의 아픔을 공감해주기를 바란 것 같다. 그렇게 참혹했던 가을이 지나가고, 상처는 고스란히 남겨진 자들의 몫으로 남았다. 선택지는 없다. 가을이 가고 앙상한 계절이 와도 상관없다. 상처를 묻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앨비스는 건물을 떠났어(Elvis has left the building).”

극중 아만다 모친이자 다비드의 누나인 상드린은 생전에 숙어 하나를 딸에게 가르친다. “앨비스는 건물을 떠났어.” 이게 무슨 뜻인지 나도 몰라서 귀를 기울였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전에 앨비스 프레슬리라는 유명한 가수가 있었는데, 그를 보려는 팬들이 몰려 공연이 끝나고도 한참이나 건물을 떠나지 않았다. 아마 관계자가 나와서 한 말인 모양이다. “앨비스는 건물을 떠났어.” 한마디로 모두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다비드와 아만다는 상드린이 유품으로 남긴 윔블던 오픈 테니스 대회 티켓을 들고 런던으로 떠난다. 한 선수가 궁지에 몰렸고, 경기가 끝나갈 무렵 아만다는 울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한다. “앨비스는 건물을 떠났어.” 다 끝났다는 뜻이다. 일곱 살 아이가 구사하기에 수준 높은 중의적 메시지다. 하지만 다비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점수가 남아있다고 아만다를 위로한다. 마침 궁지에 몰렸던 선수가 극적으로 연속 포인트를 올리며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를 살리던 참이다. 아만다와 다비드는, 희망의 편에 서서 그에게 마저 기립 박수를 보낸다. 이 글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랑에 빠진 ‘쁘띠’ 스파이더 맨에게 할 말이 남아있다.

	영화 <스파이더 맨 : 파 프롬 홈> 스틸컷

스파이더 맨, 아무래도 거미줄을 타고 파리까지 가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테니까 미국에 있었다면 그냥 넘어가겠는데. 유럽에 있었으면서도 프랑스 테러를 막지 못한 벌이다. 사랑도 좋고 다 좋지만, 아무리 봐도 이번 <쁘띠 아만다> 사태는 스파이더 맨 네 책임이 크다. 다음 편부터는 정신 차리고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겠다는 의미에서, 각 나라별 <스파이더 맨 : 파 프롬 홈> 상영관 하나씩만 <쁘띠 아만다>한테 줘라. 너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아만다들을 위로해줄 수 있다. 지금이라도 이웃의 다정한 영웅이 되어라. 아직 앨비스는, 건물을 떠나지 않았다.

신동욱 / 단편영화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