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 후 日에 남은 조선인들
- 관청에 외국인 등록할 때
- 본명과 함께 일본식 통명 기재
- 2세 태어나자 일본 생활 위해
- 본명 숨기고 통명만 알려줘
- 뿌리 인식하지 못한 채 성장
- 1960년대 일부 일본인 교사
- ‘본명 부르고 쓰기’ 운동했지만
- 당사자에 의한 게 아니라 한계
- 역사 문제·정체성 자유로운 3세
- 1980년대부터 이름 문제 제기
- 본명·통명 다양한 형태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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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의 일본 영화 ‘GO’(2001). 재일코리안 청년의 정체성 문제를 다룬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로미오와 줄리엣’ 구절을 인용해 재일코리안의 고민을 표현했다. “이름이란 뭘까? 장미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해도 아름다운 향기에는 변함이 없는걸!” |
■두 개의 이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김춘수 시인의 시 ‘꽃’의 첫 대목)
교과서에도 실리고 여기저기에서 패러디도 많이 되어 시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구절일 것이다. 이 시에 대해 다양한 이해 방법이 있겠지만,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누군가를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든다는 해석에는 큰 이견이 없으리라 본다. 그만큼 어떤 존재를 생각하는 데서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대부분 태어난 직후부터 부모님의 사랑과 이러저러한 좋은 뜻이 담긴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여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죽을 때까지 그 이름으로 불린다.
그래서 내가 내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에 대하여 많은 경우, 큰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우리에게 이름은 중요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재일코리안에게 이름은 우리만큼 중요하지만, 자연스러움보다는 치열한 의미를 갖는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본명(本名)과 통명(通名)의 존재다.
본명은 각종 신분증에 공식적으로 기재된 한국식 이름이고, 통명은 일상생활에서 쓰는 일본식 이름인데, 많은 재일코리안이 두 개의 이름을 가지며 함께 쓴다. 왜 재일코리안은 두 개의 이름을 쓰게 된 것일까?
■창씨개명과 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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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때 창씨에 관한 법원 공고. |
일제의 동화 정책 중 하나로 잘 알려진 창씨개명은 말 그대로 ‘씨(氏)’를 ‘만들어 내고(創)’, 이름을 바꾼다는 것으로, 조선의 ‘성(姓)’ 대신 일본식 ‘씨’와 이름을 쓰도록 강제한 제도였다. 이 제도는 많은 반발을 샀고, 관청에 실제로 신고된 일본식 ‘씨’를 보면 어떻게든 ‘성’의 흔적을 남기려 한 조선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것도 많았다.
예를 들어 김(金)자가 들어간 가네야마(金山), 가네모토(金本), 최(崔)자를 두 글자로 나눈 가야마(佳山),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우물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신라(=新)의 우물(=井)’에서 따온 아라이(新井), 본관의 옛 지명을 살린 니시하라(西原) 등이 그러하다.(물론 여기서 예로 든 ‘씨’는 한반도 출신자만의 전유물은 아니며 일본인들도 사용한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 낸 일본식 ‘씨’는 해방과 함께 한반도에서는 법적 효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일본에 남은 재일코리안의 경우는 달랐다. 다양한 사정 탓에 해방된 모국에 돌아가지 못한 이들은 ‘외국인’으로서 관청에 등록 대상이 됐는데, 많은 재일코리안이 등록을 할 때 본명과 함께 일본식 이름을 기재했다. 기재된 일본식 이름은 통명으로서 ‘법적으로’ 등기, 인감 등록 등에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해방 전 일본식 이름으로 각종 거래나 행정 등록을 하였던 재일코리안은 편의를 위해 계속 사용한 것이다.
물론 통명을 사용하는 이유에 편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에 대한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이야말로 통명을 쓰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였다. 특히 재일코리안 2세는 태어나면서부터 본명과 통명을 함께 신고할 수 있었는데, 이들의 부모는 일본 사회에서 재일코리안으로 살아가는 것이 녹록하지 않음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었기에 통명만을 가르쳐주는 경우도 많았다.
■낯선 본명과 마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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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경성부청 민원국호적과에서 창씨개명을 신청하는경성부(서울시)주민. 출처=한국 위키피디아 |
이러한 이유로 재일코리안 2세 중에는 ‘뿌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유소년기를 보내다가 성인이 되어 어느 날 느닷없이 본명을 마주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물론 본명과 마주한다는 것은 ‘나는 재일코리안이다’라는 사실과 마주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마주한 본명이 지금까지의 일상과는 동떨어진 낯설고 어색한 것이었음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재일코리안은 이렇게 마주한 본명과 어떻게 함께 살아왔을까.
1960년대 교육 현장을 중심으로 재일코리안의 이름 문제가 이슈화됐다. 재일코리안 2세 학생들이 본명을 모르거나 감추는 상황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던 일부 일본인 교사들이 ‘본명 부르고 쓰기’를 실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본명을 숨김으로써 차별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차별과 마주하고 극복한다는 분명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었지만, 재일코리안 당사자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정작 재일코리안 스스로 이름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들어서였다. 1980년대 이후, 재일코리안은 3세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재일코리안 3세가 1세, 2세와 가장 많이 달랐던 점은 조부모, 부모의 어깨를 무겁게 했던 역사라는 짐을 조금 덜고 정체성이 다양해졌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나는 누구인가’ ‘재일코리안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적극적으로 던지고 대답하려 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자라온 환경, 교육 경험 등에 따라 다양했으며 이는 이름, 즉, 본명과 통명 사용에도 반영됐다.
■재일코리안 이름의 다양성
결과적으로 오늘날 재일코리안의 본명과 통명 사용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크게 다섯 유형으로 나눠 볼 수 있다.
①한국식 본명만 사용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본관에 따라 특유의 돌림자 등을 지키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②자연스러운 한국식 본명과 부자연스러운 일본식 통명을 사용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통명은 일본식 ‘씨’와 한국식 본명의 이름 부분을 붙이고 일본식으로 읽기 때문에 일본 사회에서 통용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예를 들어, ‘경민(勍民)’을 그대로 사용하여 ‘山本勍民’이라 쓰고 ‘야마모토 게이민’이라고 읽는 식이다. ③자연스러운 한국식 본명과 자연스러운 일본식 통명을 별개로 사용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본명과 통명 사이에는 관련성과 유사성이 거의 없다. ④부자연스러운 한국식 본명과 자연스러운 일본식 통명을 사용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②와는 반대로 한국식 본명의 ‘성’과 일본식 통명의 이름 부분을 붙이고 한국식으로 읽기 때문에 본명이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예를 들어, ‘유카코(友佳子)’를 그대로 사용하여 ‘김우가자’라는 본명을 만드는 식이다. ⑤원래부터 한국식으로도 일본식으로도 통용 가능한 이름을 본명과 통명이 공유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세라(世羅)와 같은 이름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름이 만들고 만들어가는 역사
그렇다면 재일코리안 이름의 미래는 어떠할까. 재일코리안 세대는 벌써 5세, 6세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일본 국적 취득자는 해마다 늘고 결혼 상대도 다양해지며 무엇보다 글로벌화 시대를 살아가면서 다양한 국제적 경험을 하게 됐다. 물론 일본 사회와 모국의 변화도 크다. 과거보다 ‘다름’ ‘소수자’에 대한 관용이 늘어남과 동시에 이에 대한 역풍 또한 만만치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재일코리안 스스로와 이들을 둘러싼 사회 변화를 생각했을 때, 앞으로 재일코리안이 본명과 통명을 사용하는 모습은 어쩌면 더욱더 다양해질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해지는 재일코리안의 이름을 통해 이들이 거쳐온 역사와 만들어 갈 역사를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최민경 부경대 HK 연구 교수
※ 공동기획:부경대 HK+ 사업단,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