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
- 죽을 때까지 베이징 머물며
- 유럽의 신지식 천문·역법 등
- 교리서와 함께 번역·출간
- 한문으로 표기된 서양 학문서
- 임진왜란 이후 18세기까지
- 조공사절단 통해 조선 유입
- 실학 태동에 큰 영향 끼쳐
- 에도 시대 의사 스기타 겐파쿠
- 네덜란드 의학서 직접 번역
- 中서 들어온 서학서 등과 함께
- 근대화·개방 촉매제 역할
중국에 서양의 지식이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16세기 후반 예수회 선교사들의 입국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연재(제12회·지난 3월 29일 자 국제신문 17면)에서 전도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군인정신으로 달려들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동아시아 선교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또 이들은 자기 종교의 원칙과 규율을 강조하기보다 선교의 현지화 전략을 추구하여 대상이나 지역의 문화를 먼저 이해하고자 노력했다는 점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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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 서양 지식을 체계적으로 전한 마테오 리치(1552~1610)와 그가 중국어(한문)로 옮긴 ‘유클리드의 기하원본’. |
■중국, 서학을 한자로 번역하다
이러한 예수회의 선교 전략은 기독교 전도의 측면과 서양 지식 보급이라는 측면에서 특징을 드러냈다. 전자는 성경을 직접 번역하기보다는 교리서를 번역해 피선교인들이 거부감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후자는 서양의 신지식 특히 천문이나 역법과 같은 학문을 소개해 지식인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지어’로 위의 책들을 번역했다는 사실이다. 1601년 예수회 선교사로서 최초로 베이징 거주를 허락받은 마테오 리치의 경우, 원래 1578년 포르투갈 리스본을 출항하여 해외 선교에 나섰는데, 처음에 인도의 고아와 코친에서 주로 머물다가 1582년 예수회로부터 중국에서 전교하라는 지시를 받고 마카오에 도착하여 중국어와 한문을 배웠다.
그의 유창한 중국어 실력은 문서선교 즉, 문서로 ‘하느님 말씀’을 전달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됐는데, 죽을 때까지 베이징에 머물면서 ‘10가지 역설’ ‘유클리드의 기하원본’ ‘천주실의’ 등 다수의 책을 발표했다. 이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와 같은 세계지도를 간행해 당시 중국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마테오 리치는 중국어로 서학서를 써냄으로써 이후 동북아해역에서 근대 지식의 수용과 유통에도 큰 역할을 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어를 배운 목적은 일차적으로 중국 선교를 위한 것이었겠지만, 이를 토대로 보급한 서양의 지식은 중국만이 아니라 당시 조선이나 일본에도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근대 지식의 수용은 당시 조공 시스템에 의해 유통이 원활했고, 동아시아 지역의 중세어에 해당하는 한자로 표기됐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이른바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가 16세기 이후 동북아해역에서 새로운 지식을 태동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조선에서 ‘실학’이 태동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조공사절단을 통해 들어온 한역서학서가 18세기까지 서교(천주교)와 함께 전래돼 영향을 준 것이다. 물론 천주교 탄압 그리고 서교를 서학으로 대치해버린 오류로 19세기 초부터 후반까지 약 70년간 서학 수용은 단절을 겪었고, 그래서 개항과 함께 뒤늦게 근대 지식을 수용하는 길로 나아갔지만,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서학 전래에서 한역서학서의 역할은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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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난학의 선구자 스기타 겐파쿠(1733~1817)와 그가 동료들과 함께 네덜란드 원문을 일본어로 번역한 ‘해체신서’. |
■일본, 네덜란드인을 만나다
한편 일본은 일찍이 포르투갈과 직접적인 접촉으로 서구의 그리스도교와 과학지식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17세기 중반부터 쇄국정책을 시행하면서 나가사키의 데지마에서만 해외교역을 허락했는데, 이 교역에 참가한 유일한 서양 국가가 바로 네덜란드였다. 일본 역시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간행된 한역서학서를 통해 서양 지식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데지마의 교역을 계기로 네덜란드 상관과 통역사를 통해 직접 서양 의학과 과학기술을 수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에도 시대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유럽의 학문, 기술, 문화 등을 통칭해 ‘난학(蘭學)’이라 한다. 난학 발달에 한 획을 그은 것은 1774년 의학자 스기타 겐파쿠가 번역한 ‘해체신서(解體新書)’이다. 1771년 초 봄 에도(지금의 도쿄)의 한 형장에서 스기타 겐파쿠는 에도에서 근무하던 각 번의 의사인 마에노 료타구, 나카가와 준안 등과 함께 인체 해부를 난생처음 참관했다. 스기타 겐파쿠 등은 이날 이전에 구해놨던 네덜란드 인체 해부서 ‘타펠 아나토미아(Ontleedkundige Tafelen)’를 가져간다. 그런데 이 해부서에 실린 인체도와 실제 인체 모습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곧바로 이들은 이 해부서를 일본어로 번역하기로 결심한다.
당시 겐파쿠는 네덜란드어를 전혀 몰랐고, 함께 참관한 의사들의 네덜란드어 실력도 극히 초보 수준이었기에, 이 결심은 무모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불가능에 가까운 이 일을 성공시켰고, 약 4년에 걸친 천신만고 노력 끝에 번역을 끝내고 ‘해체신서’라는 번역서를 출판했다. 특히 10여 명 동료 의학자와 함께 해부도와 단어 하나하나를 대조해가면서 완성한 이 책은 네덜란드어를 일본어로 대치하는 사전 편찬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외과 내과 한과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등 기초 의학 서적이 일본에 소개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해체신서’ 출간 뒤 서양 의학뿐 아니라 천문 지리 수학 병학 박물학 등 다양한 책이 일본어로 번역돼 서양의 새로운 지식이 일본으로 들어왔다. 난학이 100년 가까이 일본 근대 의학뿐 아니라 과학과 예술, 나아가 교육, 사고방식, 관습 등 일본인과 일본 사회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며 퍼져 나가게 된 것이다. 난학 열풍에 불을 지핀 이 책을 동료들과 펴낸 뒤, 스기타 겐파쿠는 본격적으로 난학에 몰두했다. 의사 일을 하면서 난학을 가르치는 사숙인 난학주쿠를 열어 후계자를 양성했다. 난학주쿠는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생겼고, 난학주쿠 출신 젊은이들은 막부 말기와 메이지유신 시대에 걸쳐 일본을 변화시키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겐파쿠는 말년에 ‘난학사시(蘭學事始)’라는 회고록을 펴냈는데, 난학을 개척한 인물이 직접 기록한 유일한 회고록이자 난학이 어떻게 시작돼 확산·발전돼 갔는지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해체신서’, 일본을 바꾸다
‘해체신서’가 일본 난학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서양 지식의 수용에서 의미가 큰 것은 네덜란드어를 일본어로 번역한 최초 서적으로, 일본이 중국을 통한 서양 지식 전래에서 벗어나 서양인과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자신의 언어로 번역한 점이다. 또 궁극적으로 일본인이 서구에 대해 개방적인 인식을 갖고, 근대화를 추구할 수 있는 식견을 갖추는 계기가 됐다.
동시에 이러한 인식은 중화질서라고 하는 당시 동아시아의 지역질서에서 벗어나는 원심력으로 작동했다. 다시 말해 탈아(脫亞·아시아를 벗어남)의 이론적 또는 사유적 바탕이 난학을 통해 확보됐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난학 이후 일본이 한역서학서 수용을 금지한 것은 물론 아니다. 19세기 중반을 전후해 상하이를 중심으로 개신교 선교사들과 청 관료 및 지식인이 발행한 많은 한역서학서와 잡지는 막부 말기에 일본에 전해져 큰 영향을 주었다. 이 또한 상하이와 나가사키를 잇는 교역시스템에 의해 가능했다. 이는 아편전쟁을 비롯한 당시 중국 상황을 실시간으로 접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일본은 페리의 내항으로 개국한 뒤 중국을 통한 서학 수용을 줄이고, 또 수용의 채널을 다변화하면서 본격적으로 양학(洋學)의 토대를 갖추어갔다.
서광덕 부경대 HK 연구 교수
※ 공동기획:부경대 HK+ 사업단,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