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 시기 동양 최대 국제도시
- 나라 잃은 정치인 망명지로 최적
- 30년대 초 한인 절반 항일열사
-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 일제 검열 강화돼 거처 옮겨
- 日 통제권 확대·자본 진출 맞춰
- 친일인사들 대거 따라 들어와
- 민족 억압한 악질적인 부역자들
- 이들과 관계 속에서 담금질했던
- 독립운동가 희생·헌신 더욱 빛나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독립지사의 삶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하다. 백범 김구, 석오 이동녕, 청사 조성환, 몽양 여운형 등 익숙한 이름 외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지사들의 이름도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곤 한다. 이 중 영화 ‘암살’과 ‘밀정’ 등을 통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약산 김원봉의 경우 독립유공자 서훈 문제로 지금도 핫 이슈가 되고 있다. 적어도 올 한 해는 상하이하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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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초대의원 기념사진. 이용우 기자 ywlee@kookje.co.kr |
근대 시기 상하이는 동양 최대의 국제도시로서 교통과 통신이 편리하고 조계라는 특수한 국제적 환경까지 갖추고 있었다. 나라를 잃은 정치인들의 망명지로 최적지였던 것이다. 3·1운동 직후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 대거 진출해 해외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려 했고 임시정부를 세웠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하이는 독립운동가만의 도시는 아니었다. 개인적 생계를 위해서, 혹은 큰돈을 벌고자 경제적 목적으로 상하이로 모여든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이들 중에는 친일 부역자도 많았으며 심지어는 독립운동가를 전문적으로 감시하는 밀정도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고 이들의 행적을 알고 있어야 독립운동가의 삶을 온전히 재조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932년 기점 상하이 한인 달라져
‘상해한인사회사(上海韓人社會史)’를 지은 중국학자 쑨커지(孫科志)에 의하면 1930년대 초반 상하이 거주 한인의 절반 정도가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1932년을 기점으로 상황은 급변해 독립운동과 무관한 한인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증가했다. 그렇다면 1930년대 초반 상하이의 반을 차지했던 한인은 어떤 사람이었으며, 1932년 이후 상하이에 갑자기 밀려들어온 한인은 또 어떤 사람이었던가? 이것에 대해 우리는 두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1910년대부터 20년대까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경제적 수탈이 강화되자 많은 사람이 생계를 위해 국외로 이주해야 했다. 국내에서 경제활동이 위축됐던 상인은 국제적 상업도시로 명성이 자자했던 상하이를 택했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상하이에 정착한 한인은 주로 포목이나 인삼을 판매하던 상인이었는데, 이후 제과 식품 무역 잡화 철공업 등 다양한 직종으로 영역을 넓혀 나갔다. 상인 외 일반 근로자도 증가했는데, 주로 인쇄공, 전차회사 검표원, 선원, 공장 노동자로 근무했다. 이 밖에 대학교수나 의사와 같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김염과 같은 은막의 스타도 있었다. 이리하여 1910년 전에는 50명도 되지 않았던 한인이 30년대 초에는 8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증가했다.
둘째, 1930년대부터 40년대 중반까지다.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일제의 검열이 강화됐기 때문에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상하이를 떠났다. 하지만 상하이의 한인 수는 오히려 증가했다. 이는 일제의 상하이 점령과 관련이 있다. 청일전쟁 이후 상하이 등의 개항장에 공장 설립의 권리를 취득하고 있었던 일본은 1932년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면서 상하이에 대한 통제권을 확대했다. 이에 일본의 자본이 본격적으로 상하이에 진출했는데, 일본의 진출과 함께 일본인과 비슷한 정치적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한인도 대거 따라 들어왔다. 1930년대 초반 800명 정도였던 한인은 30년대 말에는 3000명에 이를 정도로 증가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독립운동과 관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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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하이 공공조계 모습. 안승웅 제공 |
■매판자본가·친일부역자 다수로
이렇듯 1930년대를 기점으로 상하이에는 독립운동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 득세하는 형세가 이루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국제도시 상하이의 특수성 때문에 정치적 성향에 따라 한인이 거주하는 곳이 명확히 나누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상하이의 조계는 크게 미국과 영국의 공공조계와 프랑스 조계로 분리돼 있었는데, 영사의 직접적 관할하에 있었던 프랑스 조계에는 공공조계와 달리 일본이 함부로 경찰을 동원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 조계에는 일본의 검열을 피해 독립운동가들이 거주하게 되었고, 공공조계에는 생계를 위해 일반 상인이나 노동자 그리고 친일 부역자들이 거주하게 됐다. 1935년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 조계에는 706명, 공공조계에는 986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이 상하이를 완전히 점령한 1940년대에는 이러한 구분도 사라지고 상하이에 남은 한인은 대부분 친일적인 인물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상하이 거리에는 우리가 평소에 생각지도 않았던 뜻밖의 한인들로 넘쳐났다. 중국세관에 근무하던 서병규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월급이 400~500달러에 이르고 별도로 무역회사도 경영하고 있던 거부였다. 하지만 임시정부에서 1년에 500달러씩 기부할 것을 요청하였을 때 거절하였다 한다. 모자 공장을 경영하고 있던 박진이라는 인물은 더욱 더 악질적이었다. 그는 한인들을 대거 고용한 뒤 그들의 불리한 입장을 이용해 노동력을 심하게 착취하였는데, 동포들은 그를 흡혈귀라고 불렀다고 한다. 정밀기기 공예사를 경영했던 손창식은 매국노의 전형이었다. 그는 일본군에게 돈을 기부했고 전시 통제물자 경영권을 확보한 뒤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1946년 전범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상하이 곳곳에 주택 공장 창고 등 어마어마한 규모의 부동산을 갖고 있었다 한다.
■변절자 직시해야 독립운동 참뜻 되새길 수 있어
독립운동가들이 매판자본가나 친일부역자보다 훨씬 더 증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독립운동을 하다 변절한 사람들이었다. 임시정부 수립 활동에 참가하고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주필을 맡았던 이광수는 1921년 한국으로 돌아가 친일파가 되었다. 국내와 상하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펼쳤던 옥성빈·관빈 형제도 상하이에서 변절해 친일활동을 했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도마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에 관한 이야기다. 초대 국무총리의 영문비서를 역임했던 김명수의 회고록에 의하면 중일전쟁 때 안준생은 “중경에 가지 않고 상하이에 남아 처가의 권유에 따라 헤로인 장사를 시작해 일약 치부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조선총독부의 초청으로 고국을 방문,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찰에서 분향했고 다음 날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을 만나 사죄했다.
상하이에는 그야말로 매국노 변절자 파렴치한들로 넘쳐났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직시해야 한다. 이들을 제외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영웅적 업적만 이야기하면 독립운동의 의미는 박제화되어 버린다. 독립운동가는 날 때부터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 조국의 독립에 무관심한 자, 조국의 독립에 회의적인 자 그리고 변절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담금질했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로서 이름을 역사에 남기게 된 것이다.
‘맹자’에는 우리가 잘 아는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말이 나온다. 흔히 청춘의 기상과 관련해 설명되나 사실은 도덕적 힘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때 나오는 당당함이 바로 호연지기이다. 그런데 맹자는 이 호연지기는 매일같이 키우면 천지간에 가득 차게 되나 조금이라도 게을리하면 쪼그라든다고 했다. 상하이에 있었던 독립운동가들이 목숨 건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매일 호연지기를 키웠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상하이에서 온갖 군상과 관계를 맺으면서 때로는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으며 호연지기를 키웠던 것이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우리가 특별히 명심해야 할 역사적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
안승웅 부경대 HK 연구 교수
※공동기획:부경대 HK+ 사업단,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