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 후 일본 머무른 조선인들
- ‘재일 조선인 연맹’ 결성하지만
- 분단되자 민단·조총련 나눠져
- 1957년 나온 북한 노래 ‘임진강’
- 남쪽 땅 그리워하는 1절 가사
- 조국 갈등·타국 설움 잘 대변해
- 바다 건너 재일코리안에 더 인기
- 영화 ‘박치기’ 원작자 마츠야마
- 번역해 음반 내려할 정도로
- 일본인 사이에서도 반응 좋아
벌써 14년이나 된 ‘옛날’ 영화다. 2005년 일본, 2006년 한국에서 개봉한 ‘박치기(パッチギ)’는 음악으로 더 오래 기억되는 영화다. 이 영화(이즈츠 카즈유키 감독)는 재일코리안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갈등 화해 사랑 성장을 그리는데, 그러한 이야기 사이에 수차례 흘러나오는 노래 ‘임진강’은 지금도 필자가 재일코리안에 대해 생각할 때면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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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즈츠 카즈유키 감독의 영화 ‘박치기’에서 남자 주인공인 일본인 고교생(왼쪽)이 여자 주인공인 재일코리안 학생과 합주하는 장면. |
특히, 재일코리안 여학생에게 반해버린 일본인 남학생이 재일코리안 모임에서 합주하며 부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 장면에서는 노랫소리와 더불어 노래를 듣는 재일코리안의 표정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슬픔 그리움 애틋함 먹먹함 편안함 등 다양한 감정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은 ‘임진강’이 재일코리안에게 특별한 노래임을 말해준다.
‘임진강’은 원래 월북 작가 박세영의 시에 작곡을 하여 1957년 북한에서 발표된 노래다. 북한 원곡 가사를 보면 1절은 경기도 출신 박세영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내용(“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흘러 내리고/뭇 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인데, 2절은 남한 경제 사정이 북한보다 열악하다는 것을 은근히 내비치는 구절을 포함한다. 남쪽 땅을 바라보니 “메마른 들판에서 풀뿌리” 캐고 있는데, 북쪽 땅은 “이삭 바다 물결”이 춤춘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북한 체제에 우호적인 노래가 정작 북한에서 금지곡이 됐다는 사실이다. 남쪽 땅을 그리워하는 가사가 체제에 만족하지 않음을 나타낸다는 이유였다. 물론 한국에서도 북한 노래라는 이유로 오랜 기간 금지곡이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임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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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출범한 ‘재일본 조선 거류 민단’의 활동을 담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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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임진강’이 더 널리 불리고 인기를 얻은 곳은 바다 건넌 일본 땅이었다. 영화 ‘박치기’는 일본 작사가 마츠야마 다케시(松山猛)의 자전적 소설 ‘소년M의 임진강’을 모티브로 했다. 마츠야마는 교토 출신으로 학창 시절 재일코리안 학생과 싸운 일이 많았다고 한다. 물론 싸우고 나서 화해도 하고, 친해지기 위해 축구 시합도 했지만. 그리고 마츠야마는 중학교 시절 우연히 재일코리안 학생을 통해 ‘임진강’을 처음 듣게 된다.
애절하고 이국적인 선율에 매료됐을까. 마츠야마는 그 재일코리안 친구에게서 받은 악보와 1절 가사를 간직했다가 대학생이 되어 지인이 속한 포크송 그룹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에 전한다. 마츠야마가 1절 가사를 일본어로 번역하고, 2절과 3절은 새롭게 만들어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가 공연에서 ‘임진강’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탄생한 일본판 ‘임진강’의 반응은 좋았고, 음반 발매 이야기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본판 ‘임진강’의 싱글 음반 발매는 실현되지 못했다.
1968년 ‘임진강’은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의 두 번째 싱글 음반으로 기획·제작까지 됐으나 ‘정치적 배려’를 이유로 발매가 중지된다. ‘재일본 조선인 총연합회’, 소위 조총련에서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인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려면 해방 이후 일본에 남은 재일코리안의 역사를 잠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남북 분단과 재일코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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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강을 가로지르는 경의선. |
1945년 해방을 맞이한 조선인 중 많은 수는 그리운 모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일부는 한반도 정치·경제 상황이 어수선한 데다 일본 정부가 반출 재산을 제한하자 상황을 지켜보면서 일본에 머무르는 것을 선택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일본에 ‘잠시’ 더 머무른다고 생각했고 모국 귀국은 ‘연기’했을 뿐 언젠가 한반도 땅을 다시 밟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러한 ‘가까운’ 미래의 ‘명확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직화된 활동이 필요했고, 전국 규모 재일코리안 단체인 ‘재일 조선인 연맹’이 결성됐다.
이들은 귀국을 염두에 두고 자녀에게 한글과 한반도 역사 등을 교육하는 일에 큰 열정을 쏟았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재일코리안 사회에도 분열이 일어났다. 특히 1945년 12월 말부터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졌고, 그 결과 ‘재일 조선인 연맹’에서 우파 성향을 가진 인물들이 대거 탈퇴해 1946년 10월 새로운 조직 ‘재일본 조선 거류 민단’, 오늘날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을 만든다. 1948년 한반도 남쪽과 북쪽에 따로 정부가 수립되고 각각 ‘재일본 조선 거류 민단’과 ‘재일 조선인 연맹’을 유일한 재외동포 단체로 공인하면서 재일코리안 사회에는 한반도의 분단 상황이 고스란히 투영되며, 반목과 갈등이 오랜 시간 이어진다.
■‘임진강’에 담긴 현대사의 질곡
조총련은 바로 이 ‘재일 조선인 연맹’에서 이어진 단체이다. 조총련이 노래 ‘임진강’에 관해 이의를 제기한 내용은 두 가지였다. ‘이 노래가 북한 노래라는 사실, 작사가·작곡가를 밝힐 것’과 ‘2절을 원래 가사 그대로 번역할 것’이었다.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가 작사한 2절은 한반도 분단을 안타까워하는 감상적인 내용(“북녘 대지로부터 남쪽 하늘로/날아가는 새여 자유의 사자여/누가 조국을 둘로 갈라놓은 것인가/누가 조국을 갈라놓은 것인가)으로, 정치적 색채가 강한 북한 원곡과 사뭇 다르다.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가 ‘임진강’ 싱글 음반 발매를 진행한 1968년은 일본과 대한민국의 국교가 정상화된 지 3년 남짓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물론 북한과는 어떠한 공식적 관계 수립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때 조총련의 이의 제기가 보도되면서 음반 제작·발매를 맡은 회사는 큰 부담감을 안게 됐고 결국 ‘정치적 배려’로 발매를 중지했다.
■재일코리안과 ‘임진강’
이후 조총련에서는 북한 원곡을 그대로 번역한 ‘임진강’을 음반으로 내지만, 이는 일본에서 ‘요주의 가요곡’으로 지정돼 사실상 금지곡이 된다. 그러나 많은 금지곡이 그러하듯 ‘임진강’도 오히려 강한 생명력으로 퍼져나갔다. 특이하게도 1960년대 말 마지막 절정을 불태웠던 일본 학생운동에서도 종종 불렸다. 물론 재일코리안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임진강’이 특히 재일코리안의 심금을 울린 것은 남쪽 땅을 그리워하는 내용 때문이었을 것이다.
재일코리안의 90% 이상은 대한민국, 즉 한반도 남쪽이 고향인 사람들과 그 자손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모국의 해방과 분단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조총련에 소속된 사람들도 있었고, 그러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 분단 현실은 더욱더 안타깝고 쓸쓸했다.
고향에 갈 수 없고, 이국땅에서 같은 고향 사람들과 갈등하며 지내는 현실. 이들에게 ‘임진강’은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노래였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 ‘박치기’에서 필자가 인상 깊게 본 장면, 일본인 남학생과 재일코리안 여학생이 ‘임진강’을 합주하며 부르고 이를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지켜보는 재일코리안 모습을 담은 장면은 해방 이후 재일코리안의 역사를 압축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최근 한반도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재일코리안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아마도 2019년 오늘, ‘임진강’ 은 재일코리안에게 다시 한번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고 있지 않을까 싶다.
최민경 부경대 HK 연구 교수
※공동기획:부경대 HK+ 사업단,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