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세기 고려 때 감귤 진상 기록
- 그 이전부터 재배됐다고 추정
- 기술·자본 없어 대량재배 못해
- 진상 위한 소규모 농장만 운영
- 전후 황폐한 농촌 살리기 일환
- 박정희 정권 재배 장려했지만
- 묘목 없어 수요 채우기 역부족
- 일제 때 오사카 정착 제주인들
- 1965년부터 묘목 기증 시작
- 300만 그루 이상 바다 건너와
- ‘제주도 하면 감귤’ 공식 뒤엔
- 끈끈하게 뭉쳐 유대감 다진
- 섬사람 애향심과 그리움 있어
새콤달콤한 맛에 손으로 껍질을 깔 수 있는 간편함 그리고 풍부한 영양소로 사랑받는 과일, 바로 감귤이다. 요즘에는 하우스 재배도 많아져 겨울뿐 아니라 거의 1년 내내 먹는 우리의 대표 과일 중 하나이다. 그리고 ‘감귤 하면 제주도, 제주도 하면 감귤’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공식일 것이다. 이러한 공식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제주도에서 감귤이 재배된 것이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11세기에 이미 탐라국으로부터 고려 왕조에 감귤이 진상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 이전에 중국에서 전파돼 재배가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도 진상을 위해 과수원을 만들어 감귤을 재배하였으나, 대량 재배는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나름 규모가 큰 농장을 개설했지만, 기술과 자본이 많이 필요한 감귤 농사가 조선인에게까지 확대되지는 못했다.
결국 오늘날같이 제주도에서 감귤 농사가 널리 이뤄진 것은 해방 이후, 그것도 4·3 항쟁으로 피폐해진 농촌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1955년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55년 제주도의 감귤 재배 면적은 18㏊에 불과했지만, 1964년에는 407㏊까지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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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덮인 한라산을 배경으로 제주도의 감귤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다. 국제신문 DB |
■제주도 색깔을 바꾼 재일제주인
감귤 재배 확대에 기름을 부은 것은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제주도 방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제주도의 경우 여건이 특수하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반적인 농업 목표, 즉, 식량 증산은 염두에 두지 말고 수익성이 높은 감귤 재배에 힘쓸 것을 당부한다. 이를 위해 1965년 ‘감귤 주산지 조성 5개년 계획’을 수립·시행하여 지원을 시작한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긴다. 감귤 재배를 확대하고 싶어도 감귤 묘목이 없었다. 정부는 물론 감귤 묘목 생산도 장려했지만, 수요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기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것이 바로 바다 건너 일본에 사는 제주인, 재일제주인이었다. 재일제주인은 1965년부터 감귤 묘목을 기증하기 시작했으며 너무 많은 기증으로 인해 1979년 제한이 이뤄질 때까지 300만 그루 이상이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제주도에 심어졌다. 이는 제주도의 색깔을 바꿨다.
■제주도와 오사카를 이은 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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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오사카에 위치한 이쿠노 코리아타운 전경. 일본 위키피디아 |
재일제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식민지 조선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진 조선인은 1920년대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일이 많아졌다. 일본으로 건너가려면 배(기선)를 타야 했고, 기선을 탈 수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에 이주하는 조선인이 늘어났는데, 그중 한 곳이 제주도였다. 부산에서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을 타고 많은 조선인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사실은 비교적 잘 알려졌다. 그러나 제주도 또한 부산만큼이나 일본으로 가는 이동의 중요한 기점이었다.
일본으로 이주하는 제주인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계기는 1923년 제주도와 일본 오사카(大阪) 사이의 항로 개설이다. 처음 제주도~오사카 기선을 취항한 회사는 아마가사키(尼崎) 기선 한 군데였고 기선 한 척을 운항할 뿐이었다.
그러나 점차 늘어 1930년대에는 모두 세 개 회사에서 한 달에 10회 제주도를 왕래한다. 사흘에 한 번꼴로 기선이 운항한 셈이다.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건너가려면 기선을 하루 꼬박하고도 2, 3시간 더 타야 했지만 제주도와 일본을 직접 잇는 바닷길은 제주인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1934년 제주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제주도 사람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로도 이 바닷길이 얼마나 ‘핫’했는지 알 수 있겠다.
■오사카와 재일제주인의 탄생
일본에 간 제주인이 가장 많이 자리 잡은 곳은 바로 기선이 도착한 오사카였다. 193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통계를 살펴보면 오사카에 거주하는 재일코리안 가운데 40% 정도는 제주도 출신이다. 오사카는 1920년대 ‘동양의 맨체스터’라 불리며 섬유산업을 중심으로 제조업이 크게 발달했다. 당시 오사카에는 봉제공장, 재봉틀공장, 신발공장 등이 우후죽순 생겼고 이들 공장은 싼값에 부릴 노동자가 많이 필요했다. 이 노동자의 수요를 메운 것이 바로 제주인이었다.
이른바 3D 업종에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고되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오사카 생활이 ‘고생’으로만 가득 찼던 것은 아니다. 오사카에서도 생활환경이 열악해 ‘버려진’ 곳과 같았던 이쿠노(生野) 지역에 제주인들은 모여 살기 시작했고, 고된 일상 속에서도 소소한 즐거움과 따뜻함을 느끼는 커뮤니티를 이뤘다. 이 과정에서 재일제주인의 ‘제주인’으로서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 유대감이 강해졌다.
물론, 모여 살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제주인’ 정체성은 차별의 산물이기도 했다. 일본의 제주인은 ‘조선인’이자 ‘섬사람’으로서 이중적인 차별을 겪게 된다. ‘일본인’에게서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육지 사람’ 조선인으로부터는 ‘섬사람’이라는 이유로 멸시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이중 차별 상황이 제주인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제주인’으로서 명확히 인식하게 했다.
■감귤 묘목의 ‘달콤함’을 고향으로
‘제주인’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고향 제주도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바다를 건넌 감귤 묘목으로 나타났다. 1961년 일본에서는 ‘재일본 제주개발협회’가 만들어졌다. 이름에 포함된 ‘개발’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이 단체는 ‘육지’보다 상대적으로 낙후돼 있던 제주도의 발전을 위해 재일제주인 유지들이 모여 만들었고 그 원동력은 ‘제주인’으로서 자부심과 애향심이었다.
왜 감귤이었을까? 재일제주인은 상대적으로 감귤 재배가 선진적으로 이뤄지고 있던 일본에 살면서 그 맛과 수익의 ‘달콤함’을 알았다. 게다가 따뜻한 지역에서 잘 자라는 감귤은 제주도의 온화한 기후에 안성맞춤이었다. 감귤 묘목을 기증하는 것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의미도 있었다. 고향의 삶이 나아지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히 수입을 보장하는 산업, 그중에서도 농업 전반을 이끌어 갈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감귤 묘목을 보낸 것이다.
감귤 묘목은 기증받은 뒤 최소 5, 6년은 정성 들여 키워야 비로소 결실의 달콤함을 맛볼 수 있었다. 재일제주인은 이 과정을 지원하고자 감귤 재배 기술을 배울 제주도 사람을 일본 정부의 연수 프로그램에 초청하는 데도 힘썼다.
■감귤 묘목은 그리움을 싣고
재일제주인의 노력으로 바다를 건너온 감귤 묘목은 제주도의 감귤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렸다. 1965년 1000t 정도에 불과했던 생산량이 1970년 5000t 가까이로 증가했으며, 1975년에는 무려 8만t 이상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당시 감귤은 수익성이 매우 좋아 감귤나무 몇 그루만 있으면 자녀를 대학까지 보낼 수 있다 하여 ‘대학 나무’라 불리기도 했다. 그만큼 감귤이 제주도민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었다는 표현일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제주도 하면 감귤, 감귤 하면 제주도’라는 공식 뒤에는 제주도에서 바다를 건너 일본에 정착한 재일제주인의 삶의 역사와 고향 사랑 그리고 그리움이 있다.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주말에는 겨울의 끝을 잡고 재일제주인의 ‘따뜻한’ 마음을 생각하며 감귤을 먹어봄이 어떨까.
최민경 부경대 HK 연구 교수
※공동기획:부경대 HK+ 사업단,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