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식 쇠고기 전골 스키야키
- 옛 관서지방서 쟁기 이용한
- 생선·두부 등 요리서 변형돼
- 675년 일왕 ‘육식금지령’ 제정
- 1200년 간 육류 없는 식문화
- 일부 군인·지역 제외하고 유지
- 개항 이후 외국인 거류지 중심
- 쇠고기 수요 늘며 육식문화 형성
- 메이지 유신 뒤 들어선 日 정부
- 제국주의 정책 일환 육식 장려
- 생선을 쇠고기로 바꾼 스키야키
- 처음엔 불교 문화 등에 거부감
- 시간 지나자 즐기는 서민 늘어
- 지금은 일본인의 국민음식으로
- 체력적으로 서구 열강 지향한
- 메이지 정부 육식론 슬로건
- 단순 영양론 아닌 국가주의 산물
스키야키는 일본식 쇠고기 전골을 의미한다. 한국인들이 처음 스키야키를 접한 곳은 조선시대 초량왜관이었다. 매달 여섯 차례 양국 상인과 무역 관련 관리들이 무역업무를 마치면 일본인들이 스키야키를 끓여 조선인을 접대한 것에서 시작됐으며 조선인에게 인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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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식 쇠고기 전골 요리인 스키야키에는 일본의 다양한 역사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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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야키는 쟁기(鋤:스키)라는 말과 구운 것(焼き:야키)이라는 말이 결합된 것으로, 일본의 에도시대(1603~1868)에 농부들이 일하던 도중 배가 고프면 쟁기의 금속 철판을 이용해 생선이나 두부를 구워 먹는 과정에서 스키야키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삼(杉:스기)나무 판자에 끼워서 구웠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관서지방에서 발달한 우오(魚)스키가 원조로, 생선을 고기로 바꾼 것이 스키야키로 알려져 있다. 에도 후기에 나온 ‘초보자를 위한 요리책’(1803)에 쟁기나 조개껍질에 방어를 구워 간장과 무즙, 고추 등으로 양념하는 관서지방 방식의 우오(魚)스키가 나온다. 그리고 메이지 시대가 되자, 관서지방에서 쇠고기를 사용하는 스키야키 조리법이 생겼다. 관동 및 관서지방에서 쇠고기를 먹는 방식은 생선과 비슷하게 얇게 썰어서 삶거나 구워 먹는 것이었다.
■육식 금지령 서양 교역으로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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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생들이 쇠고기 전골을 즐기는 모습. 출처=명치양식사의 시작 |
스키야키 탄생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통적 불교문화의 영향으로 일본 천황 덴무(天武)가 675년 육식 금지령을 제정한 이후 1200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는 식문화가 유지됐다. 하지만 육식 해금까지 일본인이 고기를 전혀 먹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전국시대 전쟁터에서 먹을 것이 없었던 병사는 농가에서 소를 빼앗아 휴대하고 있던 된장으로 간을 해서 먹기 시작했다. 또한, 남만 무역이나 선교사 영향도 있어 16세기 중엽부터 포르투갈인 선교사가 일본을 방문해 기독교 전도를 했고 기독교로 개종한 일본인은 육식 금기로부터 해방돼 유럽풍의 고기 요리를 먹었다.
17세기 에도막부 시기에 나가사키 지역의 히라도 및 데지마의 외국인 거류지에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남만 요리, 네덜란드인이 전한 홍모요리 등 서양 음식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이것들이 일본에 들어온 최초의 서양요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나가사키 상류사회와 대상인들 사이에 고기와 야채를 융합한 구시이토와 히카도 같은 서양 음식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또한, 상류계급에 소는 중요한 동물이 아니어서, 고기 금지령을 따르지 않고 보약이란 명분으로 육식을 했다.
1858년 미·일 수호통상조약 체결로 개항한 일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 등과 외국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교류를 했다. 외국인 거류지를 드나들던 일본인 통역사 및 관리인들이 쇠고기를 섭취할 기회가 증가했다. 외국인과의 무역 및 교류가 증가함에 따라 외국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쇠고기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나 쇠고기 부족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외국인이 막부에서 사육하는 소를 제공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막부는 육식 금지령이 시행되고 있었던 시기여서 몇 차례 거절했다. 쇠고기 확보가 어려웠던 미국의 초대 총영사 해리스는 영사관이 사용하던 시모다(下田) 교쿠센지(玉泉寺) 경내에 소를 기르기 시작했지만 부정 탄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과 문화적 갈등을 겪는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육우 축산 산업이 없었기 때문에 구미나 중국, 조선에서 소를 수입해 선상에서 해체했다. 결국 1865년 외국인을 위한 쇠고기 가공 처리시설이 요코하마에 설치됐고 1866년에는 고베에서 생산된 쇠고기가 요코하마나 도쿄 등으로 공급되기 시작했다.
■체격 열등감 없애려 육식 장려
메이지 시대가 시작되기 이전인 1862년 외국인 거류지인 요코하마 이리후네쵸의 이세쿠마라는 술집에서 쇠고기 찜 판매가 시작됐다. 쇠고기 수요가 증가하자 메이지 시대 초기 도쿄 시바쓰유쓰키쵸(芝露月町)에 최초의 쇠고기 전골집, 1869년 고베 모토마치에 쇠고기 스키야키집 겟카테이가 문을 열었다. 메이지 정부의 쇠고기 해금 발표 이전에 외국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쇠고기를 먹는 육식문화가 형성되고 있었다.
1868년 도쿠가와 정권이 몰락하고, 서양문물을 바탕으로 한 근대국가 기틀을 형성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화 및 근대화의 일환으로 부국강병, 식산흥업(殖産興業)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까지 따라 하는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즉, 메이지 정부는 서구 열강국가와 같은 근대적 국가를 만들기 위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체력적 열등감을 없애기 위해 육식을 통해 육체적으로 서구인과 같은 체격을 가질 수 있도록 육식문화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일본 서민의 서양 문화 반감, 불교문화 영향, 쇠고기 요리에 대한 비호감 및 거부감 등으로 육식문화는 갈등을 겪었다.
에도 말기부터 메이지 초의 통속 문학 작가 및 신문 기자로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을 받은 가나가키 로분(假名垣魯文)은 ‘쇠고깃집 잡담 아구라나베’라는 저술을 통해 육식을 장려했다. 또한 문명 개화론자인 가토 유이치(加藤祐一)는 쇠고기 및 돼지고기 등의 육식을 강조했다. 부국강병 및 문명개화 정책의 영향으로 메이지 초기에는 서민들 사이에서 육식문화에 대한 거부감으로 갈등 현상이 나타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쇠고기를 이용한 일본식 쇠고기 전골(관동지방) 및 스키야키(관서지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육식론은 제국주의와 밀접
관동지방의 쇠고기 전골은 간장, 설탕, 멸칫국물, 미림 등으로 만든 양념 국물인 와리시타(割り下)에 쇠고기나 야채 등을 넣고 한 번에 끓인 뒤 달걀에 찍어 먹는다. 반면 관서지방의 스키야키는 와리시타를 사용하지 않고 냄비에 쇠고기를 굽다가 간장과 설탕 등으로 간을 한 후 물기가 나오기 쉬운 야채부터 순서대로 넣고 조리해 역시 달걀에 찍어 먹는다. 관동대지진(1923년)으로 도쿄의 쇠고기 전골 음식점 상당수가 피해를 보고 문을 닫았다. 이후 관서지방의 스키야키 음식점이 관동지방에 전해지면서 관동지방의 쇠고기 전골이란 용어도 스키야키로 통합돼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후 스키야키는 메이지 시대에 서민들에게 육식에 대한 저항감을 줄이는 대표적인 요리가 됐다.
메이지 시대부터 서양식의 문화수용을 바탕으로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추진하던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은 청·일 전쟁 후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메이지 시대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육식론은 단순한 영양론이 아니고, 청·일, 러·일 전쟁기에 보여준 내셔널리즘의 한 방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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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미희
부경대
HK 연구 교수 |
이처럼 침략의 역사적 사실과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일본의 육식문화는 군대 급식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고, 이런 일본 군대가 제국주의 정책 및 조선의 침략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통찰력과 지혜가 있었다면 조선이 침략당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통찰력과 지혜는 지금도 필요하며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공미희 부경대 HK 연구 교수
※공동기획:부경대 HK+ 사업단,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