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농촌의 몰락으로
- 부관연락선 타고 日 이동 늘자
- 총독부 도항증명서 받도록 규제
- 부산 영도에서도 일부 교부하자
- 마지막 희망 찾아 노동자 몰려
- 희망고문 속 수개월씩 기다리다
- 결국 상당수 도시빈민으로 전락
- 산기슭에 움막지어 눌러앉아
- 바다 건너 일본으로 건너간
- 재일코리안의 애환도 깃들어
부산에 산 지 만 5년이 되어도 새롭게 다가오는 풍경이 하나 있다. 바로 부산 산동네의 모습이다. 예를 들면 산을 휘감은 집들과 그 사이를 오묘하게 누비는 골목의 모습, 산복도로를 어마어마한 운전기술로 오르내리는 시내버스의 모습, 가파른 계단과의 생활이 일상인 사람들 모습 등이 그러하다. 특히 이러한 풍경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역사와 마주하면서 산동네 모습은 필자에게 가장 ‘부산다운’ 풍경이 되었다. 부산의 산동네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보통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것은 한국전쟁의 피란민 유입이다. 허둥지둥 보따리 몇 개 짊어지고 전쟁을 피해 부산에 몰려든 사람들이 삶의 둥지를 틀면서 오늘날과 같은 산동네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부산 산동네의 시작은 조금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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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서구 천마산로에서 본 풍경. 천마산의 산그림자 속에 산동네가 앉아 있고 영도와 남항대교 그리고 일본 쪽으로 열린 바다가 보인다. 맑은 날에는 이곳에서도 대마도가 잘 보여 부산이 국경 도시임을 느낄 수 있다. |
■조선인은 왜 현해탄을 건넜을까
부산은 일본이 식민도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크게 발달했다. 그리고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잇는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 하고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철도가 연결되면서 동북아, 그중에서도 한반도와 일본 사이 인구 이동의 중심이 된다. 일본이 식민지배에 필요한 사람과 물자를 대량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선박 취항을 서두르면서 부산을 거친 한반도와 일본 사이 인구 이동은 활발해졌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한반도를 향해 관료, 교사 등 ‘식민자’ 일본인 이동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점차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동하는 조선인이 늘어났다.
특히 1920년대 들어 많이 증가했는데 가장 큰 원인은 농촌의 몰락이었다. 조선 농토는 대부분 일본인 지주에게 넘어갔고 많은 농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지주의 수탈이 심해지면서 조선인 소작농 중에는 농업을 포기하고 노동자가 돼 새로운 생계수단을 찾아 헤매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그중 하나가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가는 것이었다. 한편, 일본은 제국으로서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과 제1차 세계대전을 등에 업은 호황 속에서 많은 노동자가 필요한 상황이었고, 조선인 노동자가 그 수요를 채우게 된다.
■부산: 좌절과 기대가 공존하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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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시모노세키에 정박 중인 관부연락선을 찍은 옛 사진. 출처 일본 위키피디아 |
이 시기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간 조선인의 절반 가까이는 경상남도 출신이었고 그 뒤를 경상북도와 전라남도가 이었는데,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곳이 부산이었다. 1933년 8월만 살펴보더라도 일본에 건너간 조선인의 4분의 3이 이용한 항구가 부산으로 제주, 여수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중요한 사실은 부산항을 통한 일본으로의 이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조선에서 노동자를 모집·중개하는 업체가 등장했는데, 무분별한 알선이 늘자 1918년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이동을 규제하기 시작했고 이는 1920년대 이후 계속된다. 문제는 규제가 매우 자의적이고 변동이 많아 일본으로 건너가기를 희망하는 조선인 노동자에게 큰 혼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이 압축돼 나타나는 공간이 바로 부산이었다. 왜일까. 부산에는 규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규제의 핵심은 조선인 노동자로 하여금 거주지 경찰서에서 ‘도항증명서’, 즉 현해탄을 건널 수 있다는 증명서를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런저런 이유로 거주지 경찰서가 ‘도항증명서’를 발급하지 않은 경우 부산수상경찰서, 오늘날의 부산 영도경찰서에서도 일부 교부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부산에는 ‘도항증명서’에 대한 마지막 기대를 걸고 조선인 노동자가 몰려들었고 이들의 기대감이 좌절 또는 절정에 달해 표출되는 공간이 된 것이다.
부산은 일본을 향해 열리고도 닫힌 모순된 공간, 좌절과 기대가 공존하는 공간이었으며 조선인 노동자는 ‘희망고문’ 속에 짧게 수일, 길게는 수개월 부산에 머물렀다.
■부산에 ‘갇혀’ 산동네에 자리 잡다
일본에 가는 것을 꿈꾸며 부산에 머물던 조선인 노동자의 삶은 어땠을까. 고향을 떠나며 가지고 온 얼마 안 되는 돈은 생활비로 순식간에 사라졌을 것이고,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부산수상경찰서에서 ‘도항증명서’를 교부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준다는 ‘기생충’ 같은 알선업체의 유혹도 치명적이었다. 이렇듯 그들의 경제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결국 현해탄을 건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 부산에서 오랜 기간 머물던 조선인 노동자는 도시빈민이 된다. 아마 처음에 부산에 왔을 때는 부관연락선을 타는 날까지 짧게 여관 같은 곳에서 머무르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돈이 떨어지면서 여관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도시빈민으로 전락한 조선인 노동자는 결국 산기슭에 거처를 마련하게 되었다. 바로 여기 부산 산동네의 시작이 있다.
당시 신문에는 이러한 산동네의 상황에 대한 기사가 종종 실렸다. 1938년 9월 12일 동아일보는 “부산부내 산기슭에 움막살이와 주택은 하층계급의 살림살이가 얼마나 참담한가를 여실히 표현”한다며 “하층 계급의 생활하는 무리는 내지(일본) 도항을 목적하여 부산에 와서 오도 가도 못 하고 부득이 산기슭에 움막을 맨 자”라고 밝힌다. ‘움막(살이)’은 이들의 삶의 모습을 응축하는 표현일 것이다.
■재일코리안의 애환과 산동네
이처럼 부산 산동네의 시작은 일제강점기로 그 역사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 중심에는 일본으로 건너간, 건너가려 했던 조선인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1945년 일본 패망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은 200만 명에 육박하게 된다. 물론 이중에는 1930년대 후반 이후, 강제징용으로 일본에 온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 이들에게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1946년 3월까지 약 130만 명이 다시 한번 부산을 통해 한반도 땅을 밟는다.
그렇다면 나머지 70만 명 조선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러 사정으로 일본에 남은 조선인과 그들의 자손은 오늘날 일본에서 재일코리안, 이른바 재일교포로 살아간다. 이들의 삶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오랜 기간 일본사회에서 재일코리안에 대한 주거, 교육, 취업, 결혼 등 각종 사회적 차별과 멸시는 만연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재일코리안은 어려운 와중에도 자녀 교육에 큰 열정을 쏟았고 이를 바탕으로 기본적인 사회적 권리 쟁취에 힘써, 일본 사회의 재일코리안 나아가 외국인 전반에 대한 인식과 정책의 변화를 끌어냈다.
부산 산동네는 바로 이들 재일코리안 형성의 역사가 깃든 곳이다. 근래 부산의 산동네를 재발견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아기자기한 가게도 생기고, 부산을 여행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빈번하게 소개되면서 산동네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부산 산동네를 걸을 때, 1920년대 그곳의 ‘움막’에 살면서 부두에 정박돼 있던 부관연락선을 바라봤던 사람들 그리고 재일코리안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다. 근대 동북아해역에서 인구 이동의 중심을 차지했던 부산 그리고 그곳에서 바다를 건너려던 사람들의 애환 어린 모습이 투영된 공간으로서 산동네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최민경 부경대 HK 연구 교수
※공동기획:부경대 HK+ 사업단,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