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가상현실 창안한 저자
- 상용화 과정·52개 정의 보여줘
- 오락·의료·국방까지 무한 확장
- 우정·가족·사랑의 창조 강조
가상 현실(VR·Virtual Reality)이 현실에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흔히 VR을 떠올리면 커다란 헤드셋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오락을 즐기는 모습을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VR은 훨씬 더 광범위한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참전 군인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치료하는 데 VR이 활용되며 특히 수술 연습용으로 VR은 널리 보급돼 있다.
| |  |
| ‘가상 현실의 탄생’을 쓴 재런 러니어의 1980년대 후반 모습. 오른쪽 사진은 헤드셋을 쓰고 VR(가상 현실)을 연구하는 장면. 열린책들 제공 |
신간 ‘가상 현실의 탄생’이 나왔다. 이 책을 유심히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저자 재런 러니어 때문이다. 책에 실린 저자의 이력을 보면 컴퓨터 과학자이자 철학자, 시각 예술가, 작곡가, 영화감독 그리고 저술가로 소개돼 있다. 가장 중요한 경력은 1984년 VR 스타트업인 VPL 리서치사를 창업해 VR을 상용화했다는 것이다.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를 이용해 네트워크로 연결된 여러 사람이 가상 세계를 탐험하는 첫 프로그램과 그런 시스템 안에서 이용자를 대표하는 최초의 아바타를 개발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저자를 ‘VR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책의 원서 제목은 ‘Dawn of the New Everything’(새로운 모든 것의 새벽)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VPL 리서치사를 떠난 1990년대 중반까지의 시기를 이 책에서 다룬다. 즉 VR이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졌으며 상용화됐는지 보여준다.
책을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VR에 관한 저자의 정의다. VR이 지닌 의미를 52개의 정의로 보여준다. 가령 ‘다른 장소, 다른 몸,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한 다른 논리의 환각을 만들어 내는 오락용 제품’이란 단순 명료한 정의를 내리는가 하면 ‘다른 사람의 처지에 서게 해주는 매체이자 공감을 늘리는 길’ 또는 ‘VR=-AI(VR은 음의 AI)’처럼 수학 공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이토록 소름 끼치는 매체는 일찌감치 없었다”고 VR을 찬양한다. 단순하게 오락기 정도로 VR을 생각한다면 완전 오산이다. 심지어 저자는 VR이 컴퓨터와 기계가 만들어 낸 철저한 환상인 동시에 인지와 지각의 측면에서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가장 심층적으로 연구하는 장치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생각할수록 VR이 어려워진다. 책도 마찬가지다. 저자의 삶은 VR처럼 비현실적이다. 어린 시절 미국 뉴멕시코주의 사막에서 텐트를 치고 생활한 것도 모자라 돔 형태의 집을 직접 설계해 살았다. 학비가 없어 염소젖으로 만든 치즈를 팔아 대학을 다녔으며 히피처럼 떠돌다 실리콘밸리까지 가게 됐다. 한마디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이력이다.
이 책을 소개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한 확장이 가능한 VR의 미래를 예측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엉뚱한 저자는 VR의 미래를 언급하면서 정작 중요한 것은 현실의 우리가 만들어 내는 기적, 우정, 가족이라고 강조한다. VR의 시대에 우리가 만들어 내야 할 것은 사랑의 창조라는 것이다. 이 정도로 엉뚱했으니 남들보다 앞서 VR을 상상하고 상용화한 것이 아닐까. 김희국 기자 kuki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