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시대에 주류 신앙된 불교
- 천상·중간·지하계로 우주 나눈
- 옛 샤머니즘과 닮은 점 많아
- 대부분 민초 최고의 소망은
- 해탈 아닌 천상계서 태어나는 것
- 고려·조선 왕실서 괄시받고
- 왜구 등에 시달린 해안가 백성
- 극락 ‘도솔천’ 환생 기원하며
- 미륵 만나면 바칠 예물로
- 나무 등 묻는 매향풍습 주도
우리 조상은 대략 반만년 전부터 만주와 한반도에 정착해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만주와 한반도에 정착하기 이전, 우리 조상은 어느 곳에서 살다가 만주와 한반도로 오게 됐을까? 현재까지 연구에 따르면, 우리 조상은 저 멀리 시베리아의 바이칼호 주변 또는 대흥안령 북쪽 지역에서 살다가 따뜻한 곳을 찾아 남하하면서 요서, 요동, 만주, 한반도 등지로 이동해 정착했다고 한다.
남하하기 이전 우리 조상의 주 생업은 당연히 목축 또는 수렵, 어로, 채집이었다. 바이칼호 주변이나 대흥안령 북쪽 지역은 농업을 주 생업으로 삼기에는 너무나 추웠기 때문이다. 주류 종교는 당연하게도 시베리아의 샤머니즘이었다.
샤머니즘에서는 우주가 천상계(天上界), 중간계(中間界), 지하계(地下界)로 구성된다고 생각한다. 그중 천상계가 제일 좋은 곳으로 상상되었다. 천상계에 사는 천신(天神)은 고통도 없고 죽음도 없이 신통력을 발휘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중간계에 사는 인간의 최대 꿈이자 소망은 천상계 천신들의 축복을 받거나 인간 스스로 천상계에 태어나는 것이었다. 그런 샤머니즘적 소망이 신라 때 선도(仙道) 또는 풍류도(風流道)라는 신앙으로 표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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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614호 사천 매향비(왼쪽 사진). 경남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에 있다. 오른쪽 사진은 제주도에 있는 복신미륵(福神彌勒) 가운데 동미륵(東彌勒). |
■향목을 개펄에 파묻고
삼국시대에 불교를 수용하면서 우리 조상의 주류 신앙은 기왕의 샤머니즘에서 새로이 불교로 바뀌었다. 그런데 불교는 세계관이나 내세관에서 샤머니즘과 통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불교는 중생이 업에 따라 천(天), 아수라(阿修羅), 인(人), 축생(畜生), 아귀(餓鬼), 지옥(地獄)의 6도(道)를 윤회한다고 하는데, 천은 샤머니즘의 천상계에 해당하고, 인과 축생은 중간계에 해당하며, 아수라와 아귀 그리고 지옥은 지하계에 해당한다. 따라서 불교의 세계관은 샤머니즘 세계관과 별로 충돌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 이론상 최고의 소망은 6도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것이라 하지만, 실제 사람들은 해탈이 아니라 천에 태어나기를 소망했다는 점에서 샤머니즘의 소망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과거 천 년간 바닷가에서 성행한 매향(埋香) 풍습이었다.
매향(埋香)은 말 그대로 향목(香木)을 바닷가 개펄에 파묻는 풍습이었다. 매향에는 향나무를 위시하여 소나무, 참나무, 상수리나무 등 바닷가에 흔한 나무를 사용하였다. 매향을 한 뒤에는 기념비를 세웠는데 그 비석이 바로 매향비(埋香碑)였다. 현재 매향비는 20여 개가 알려졌는데, 멀리 신라 때부터 가까이 조선 시대 때 세워졌다. 매향 장소는 서해안과 남해안 등의 바닷가이다. 즉 과거 천 년간 바닷가 사람들이 매향을 하고 매향비를 세웠다. 그 같은 매향 풍습은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고 오직 한국 바닷가에서만 나타났던 특별한 풍습이다.
■미륵과 도솔천을 꿈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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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을 그린 고려 시대의 불화. 신명호 제공 |
현재 알려진 매향비 20여 개는 대부분 고려 말, 조선 초에 세워졌다. 예컨대 보물 614호 경남 사천 매향비는 우왕 13년(1387년) 8월 세워졌다. 사천 바닷가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이 매향비에는 매향 시기, 매향 장소, 매향 목적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매향 목적은 청정법(淸淨法), 무생인(无生忍), 불퇴지(不退地)를 얻고, 먼 훗날 미륵이 하생할 때 바닷가에 파묻었던 침향(沈香)을 가지고 미륵님을 만나 도솔천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즉 매향의 최종 목표는 도솔천에 태어나기 위함이었다.
도솔천은 불교의 천(天) 중에서 즐거움과 기쁨이 넘치는 곳, 즉 극락 중의 극락이었다. 그래서 불교가 수용되던 삼국시대에 우리 조상이 가장 가고 싶어 했던 천이 바로 도솔천이었다. 그 도솔천의 통치자가 미륵이었다. 도솔천에 가려면 우선 미륵을 만나야 했고, 미륵을 만날 때 최고의 예물이 바로 침향(沈香)이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바닷가 사람들이 개펄에다 매향을 했던 것이다.
후삼국 시대를 전후로 주류 불교는 교종(敎宗)에서 새로이 선종(禪宗)으로 바뀌었다. 공(空)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선종은 미륵이나 도솔천을 헛된 꿈으로 치부한다. 그래서 고려 시대가 되면 왕실이나 상류층은 미륵이나 도솔천을 잘 믿지 않았다. 반면 바닷가 사람들은 여전히 미륵과 도솔천을 믿고 소망했다. 나아가 조선 시대가 되면 왕실과 양반들이 성리학을 신봉하면서 불교 자체를 탄압하였지만, 그때도 바닷가 사람들은 여전히 미륵과 도솔천을 소망하며 매향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조선 시대 유교와 양반이 바닷가 사람들에게 꿈과 소망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방 시베리아에서 목축과 수렵, 어로, 채집을 하며 살던 우리 조상이 요서, 요동, 만주, 한반도로 이주해 정착하자 주 생업은 농업으로 바뀌었다. 농업이 주력 생업이 되면서 다른 생산 활동은 평가절하됐다. 대표적인 것이 어업과 상공업이다. 특히 바닷가 어업은 시간이 가면서 더더욱 평가절하됐다. 육지 중심 세계관인 성리학이 만연했던 조선 시대에는 더더욱 그랬다. 조선 양반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하며 농업을 국가 산업의 근간으로 인정했지만, 어업은 언급 자체가 없었다. 이는 정책 배려가 전혀 없었다는 뜻과 같다. 게다가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왜구와 홍건적이 창궐했다.
■그렇게 소원을 빌고 복을 빌고
왜구가 창궐하면서 가장 먼저 생존 위협을 당한 사람들은 바닷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국가권력은 바닷가 사람의 생존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선 자신들부터 살고자 했고, 여력이 생기면 농민을 보호하고자 했지만, 바닷가 어민에 대하여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이런 상황에서 바닷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 하나가 매향이었다. 예컨대 우왕 13년(1387년) 8월에 세워진 사천 매향비에는 “무상묘과(无上妙果)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과 소원이 함께해야 한다. 실천은 있지만 소원이 없다면 그 실천은 외롭게 되고, 소원은 있지만 실천이 없다면 그 소원은 헛되게 된다. 소원이 없다면 결과가 없고, 실천이 없다면 복이 없다”고 하였다. 이런 구절로 본다면 사천 매향비의 핵심 용어는 소원이고, 그 소원은 복이다.
복에는 이 땅의 복도 있을 것이고, 저 하늘의 복도 있을 것이다.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첫 번째 소원은 당연히 이 땅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일 테지만,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저 도솔천을 소원했다. 만약 이 땅에서도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미륵에게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 권력자들에게 기도하고 간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땅 권력자들에게 기도하고 간구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미륵에게 기도하고 간구했다. 그런 일이 어찌 사천 바닷가에서만 있었으랴? 모르기는 몰라도 한반도 바닷가 곳곳이 그랬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천 년간 바닷가에서 성행한 매향 풍습은 이 땅의 꿈을 빼앗긴 바닷사람들의 꿈을 향한 함성이라 할 만하다.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 공동기획:부경대 사학과·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