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을 죽인 진범을 찾는 이야기
- 주인공도 조력자도 여성 캐릭터
- 발전된 여성서사 표본으로 충분
초등학생 때부터 추리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1980년대, 충무동 육교 옆에 있던 남포 문고 앞에선 해적판 동화나 추리소설을 잔뜩 쌓아놓고 몇백 원에 팔았다. 아버지가 월급을 털어 사다 주시는 그 책들은 아버지의 취향으로 걸러진 것이어서, 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을 읽을 기회가 없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여성 작가들을 믿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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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미스 마: 복수의 여신’. |
불과 몇 해 전까지 문학계에선 여성 작가들이 쓴 글들을 두고 ‘여자 냄새’가 난다고 비하했다. 영화계에선 여성이 주도적으로 스크린을 장악하는 작품이 투자를 받기 어려웠다. ‘82년생 김지영’이 베스트 셀러가 되고 영화 ‘미스백’이 흥행에 성공하기까지 대한민국 사회는 격변했다. 그동안 여성 혐오 범죄, 페미니즘 운동, 미투 운동까지, 수많은 피와 고통의 사건들이 있었다.
그리고 2018년 하반기, 여성이 원탑으로 우뚝 선 드라마, SBS ‘미스마:복수의 여신’이 좋은 시청률을 올리고 있다. 원작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미스마플 시리즈. 안락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며 사건을 해결하는 할머니 탐정이야말로 고전 문학들의 서사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여성 원탑이 아닐까. 어쩌면 이 드라마의 작가는 ‘미스 마플은 대체 누구인가’라는 의문에서 이야기를 시작했을 것이다. 세인트 메어리 미드 마을에 살고, 평생 결혼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분홍색 털실로 뜨개질을 하고 있지만 인간관계에 대해 탁월한 통찰력을 가진 미스 마플의 과거는 소설 안에서도 베일에 싸여있다.
드라마에서 ‘미스 마’로 대변되는 마지원 작가(김윤진)는 마플보다는 젊지만 비슷한 포지션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처음부터 마지원 작가의 과거를 통째로 다 드러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린 딸의 얼굴을 돌로 짓찧어 죽이고 9년간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던 여자는 치밀한 방법으로 탈출에 성공하고, 추리소설 작가 ‘미스 마’의 이름을 빌려 무지개 마을에 산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죽인 진범을 찾기 위해 그날의 증인들을 하나씩 하나씩 확보해가며, 그 와중에 일어나는 살인사건들도 해결한다. 마플이 마치 어떤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여성 사제와 같다면, 미스 마는 격정적인 과거를 그대로 드러내 신비감을 애초에 해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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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여신’이라는 부제 그대로, 무지개 마을의 미스 마플은 복수할 그 날을 위해 몸을 엎드리고 단서의 조각을 차례로 손에 넣는다. 미스 마의 주변에 포진한 사람들도 여성이 대부분이다.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조카 행세를 하는 서은지(고성희), 마을 여기저기서 모은 정보를 알맞게 흘려주는 마을의 여성들, 사건의 핵심적인 증거를 쥐고 있는 이정희(윤해영)는 비밀의 씨앗을 각각 쥐고 저마다 다른 복수심을 거름으로 준다. 자, 이제 어떤 식물이 탄생할 것인가. 이 드라마에서 남성이라는 젠더는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딸을 죽인 범인을 찾는데 모성이라는 것 이상의 동기가 없다는데 다들 납득하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고, 전문적이고, 프로페셔널한 여성이 가장 빛나는 서사를 밀어내던 시청자들은 이 순간만큼은 모성과 구구절절한 사연 덕분에 그럭저럭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그러나 미스 마에게서 모성을 떼어놓았다면 이 드라마의 6.9%라는 시청률은 가능했을까. 아직 TV에서 여성이라는 젠더는 잘난 척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이 드라마의 다음, 그 다음을 기대한다. 이 드라마가 종영된 뒤에 또 나타날 여성 서사. 실제로 잘난 여성이고, 마음껏 잘난 척을 해도 아무도 돌을 던지지 않는 이야기들. 젠더를 바꿔서 생각해보자. 이제껏 잘난 남자들이 얼마나 원탑이었던가. 아유, 지겹다. 작가·글쓰기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