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운 최제우는 노래했다. “우리 선조 험천 땅에 공덕비를 높이 세워 만고유전 하여보세. 송백 같은 이내 절개 금석으로 세울 줄을 세상 사람 뉘가 알꼬.” 또 노래했다. “선조의 충의와 절개는 용산에 남아 있네. 해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우리 임금님 성덕을 다시 돌아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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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이 1699년 경주 내조면 이조리에 세워준 용산서원. |
수운이 언급한 ‘선조’는 최진립으로 수운의 7대조이다. ‘용산’은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있는 용산서원으로, 임금이 친히 ‘숭렬사우(崇烈祠宇)’로 글을 내린 사액사당이었다. 당시 무신으로 사액 사당을 받은 이는 이순신과 김시민 장군뿐일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1568~1636)에 대해 살펴보자.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최진립은 경주 이조리에 쳐들어온 왜구를 밤에 급습해 물리친 후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큰 공을 세운다. 1636년 청의 침입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69세로 공주영장이었던 최진립은 주위의 만류에도 기세를 꺾지 않고 출정을 서두른다. 경기도 용인 험천(지금의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전투, 조선 군대는 청나라 철기병에게 패퇴하고 모든 장수들이 퇴각했지만, 최진립은 끝까지 항전하다 장렬히 순국했다.
두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최진립에 대해 나라에서는 제문을 지어 추모했다. 비장한 최후와 ‘북벌론’의 대두로 최진립은 국가 영웅으로 떠오른다. 1740년에 세워진 ‘최진립 신도비’는 추모 사업이 얼마나 거국적이었는지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청백리로 뽑힐 만큼 청렴한 관리였던 최진립. 그의 후손들이 부자가 된 것은 최진립의 손자 최국선(1631~1681) 때부터로 토지 매입, 이앙법 그리고 자율적 농업 경영 덕분이었다.
마지막 최 부자로 불리는 최준(1884~1970)은 독립운동가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을 운영하며 임시정부 재정부장을 맡아 독립운동 자금줄 역할을 했다. 경북 경주시 교동의 최 부잣집은 구한말 의병과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의 은신처가 되었다. 동학과도 인연이 많다. 최준은 “동학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이 자신의 집에 한참 숨어 살기도 했고, 동학 3대 교주 손병희도 경찰을 피해 자주 왔다 갔다”고 했다. 최 부잣집 6훈은 동학의 좋은 가르침이기도 하였다. 최 부잣집 6훈은 다음과 같다.
“벼슬은 하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쌓지 마라!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천도교 ‘신인간’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