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이제 슬슬 뜨거운 한낮을 보냈던 옷들을 장롱 속에 정리해 넣기 시작할 시기다. 배우로 살아온 세월로나 자연인으로서나, 내게도 가을이 온 것 같다. 옷장에 남겨 둘 옷들처럼, 배우의 길 위에서 만난 연출 몇을 두 번의 지면을 통해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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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현철(왼쪽)과 김숙경 연출가. 국제신문DB |
연극판에 들어선 지 7년 차 되던 해, 한 선배 연출에게서 절망적인 말을 들었다. “너 이제껏 배운 것 다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게 어때? 아무래도 넌 기초부터 잘못된 것 같아.” 내가 나 때문에 벽 앞에 선 것 같은 날들이 계속되던 그때, 믿었던 것들을 버리고 벽을 뚫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사유와 성찰의 질문을 할 연출과 자극을 만나는 일이 절실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한참 그런 연출을 만나지 못했고 외로운 방황을 계속해야만 했다.
연출가 구현철은 그런 의미에서 나를 다시 배우의 길로 끌어준 이다. 그를 작품으로 처음 만난 건 2005년 ‘길’(작 안민수)이다. 첫 과제는 ‘혼자 놀기’. 한 번 대본읽기를 한 후 곧장 세부 연기를 요구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절름거리며 우스꽝스러운 꼴로 들키기 시작했다. 매일 오디션장에 서는 것 같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내가 아는 방식으론 어림없는 연출이었다.
신체 감각과 정서와 공간에 최대한 예민해지기. 통념과 전형은 버릴 것. 연출가 구현철과 만나는 데 기본으로 가져야 할 무기다. 구현철의 무대에는 필요 없는 건 있을 필요가 없다. 말이든 오브제든 군더더기 같은 것은 모두 제거하고 고갱이만 남기를 요구한다. 그의 디렉션은 참 어렵다.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이해하므로 더 어렵다. “가벼운데 무거운. 무거운데 가벼운.” 역설적인 그의 디렉션은 필기가 부적합하다. 긴장과 이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어야 한다.
구현철이 자주 말하길 ‘연출은 배우 수발드는 일’이다. 그는 그 말에 책임지려는 연출이다. 내가 만난 어떤 연출보다 배우의 심리와 몸 상태를 이해한다. 권위를 앞세워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쉬운 방법 대신, 인식하고 공유할 때까지 언어로 설득하는 어려운 과정을 택한다. 그래서 배우의 질문을 매우 환영한다. 함께 이야기 나누고 작품에 기여하는 배우의 역할을 지지한다.
작품에서 그는 집요하다. 배우로 하여금 절대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게 만든다. 그가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때때로 스스로와 스태프들의 고통이 되기도 한다.
직접 대본을 쓰는 연출은 많다. 그러나 희곡이라는 문학 영역에 올렸을 때 좋은 대본은 많지 않다. 김숙경은 그런 몇 안 되는 좋은 희곡을 쓰는 연출이다.
김숙경 연출이 처음 출연 제의를 해왔을 때 흔쾌히 동의한 이유는 희곡 안에 놓인 언어 때문이었다. 연극 언어는 음악적이어야 한다. 소리를 얹어 발화하는 순간 공간에서 음악처럼 흘러야 맛있다. 읽어서 리드미컬하게 물 흐르듯 입에 감기는 대사. 김숙경의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 그랬다. 흔히 일상의 언어를 무대로 가져올 때 간과하는 게 음악성이다. 무대 위 언어는 일상을 답습·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동기화(動機化)한다. 무대를 거니는 언어는 그래서 음악적이기도 사실적이기도 해야 한다. 일상을 닮았으나 선별되고 추출된 것이어야 한다. 김숙경의 대사는 그러기 위해 어렵고 힘들게 숨을 고르며 찾은 말이 분명하다.
김숙경 연출은 평형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다. 신기할 정도로 생활 속에서도 연출작업에서도 일관되다. 우리가 바라보는 가치나 관념에 대해 평형을 유지하며 질문을 던진다.
연출로서 김숙경은 이야기를 텍스트와 무대형상화의 경계에서 특유의 섬세함으로 다림질하듯 반듯하게 펼쳐놓는다. 그래서 관객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가지만, 극장 밖으로 나설 때 질문이 남게도 한다. 고정 관객이 많은 이유다. 그렇다고 고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연출적 고집을 부릴 때도 배우가 대놓고 불쾌감을 보이기 어렵게 한다. 정중하나 집요하게 반복한다.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게 그러면서 소묘처럼 섬세하게 인물을 표현하기 원한다. 말과 공간 속 공백은 밀도를 내포하여 묘사하기 원한다. 그래서 그이의 작품을 대할 때는 더듬이를 잘 세워야 한다. 가끔 나는 김숙경 연출이 그런 고집을 좀 더 부려도 좋다고 생각한다.
진선미 연극인·연극 비평지 봄 발행인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