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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 수십 년 삶의 흔적을 쉽고 담백한 언어로 녹인 시인 /박진명

마개 없는 것의, 비가 오다- 이승재 /소요유 /9000원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9-21 18:01:55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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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왔던 인연·인생의 작은 행복 등
- 이승재 시인이 겪은 삶의 희노애락
- 담담하게 길어 올린 첫 시집 감동적
- 읽다보면 흘려보낸 매 순간 아쉬워

어렵게 잡은 약속인데 아내가 바빠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한때 시를 쓰고, 여전히 시에 대한 애정이 있는 나를 추어올린다고 아빠는 시를 쓰는 사람이니 대단한 사람이라고 아이는 띄워준다. 시가 무어냐는 아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아이가 이해했을까 싶지만, 아이의 마지막 반문에 무릎을 탁 쳤다. “시는 쉬(오줌)야?”
   
시집 ‘마개 없는 것의, 비가 오다’를 펴낸 이승재(오른쪽) 시인이 지난해 5월 부산 부산진구 양정동 골방프로젝트에서 출판기념회를 열고 있다. 소요유출판사 제공
아이의 언어유희에 피식 웃고 그냥 지나치지 못한 것은 도시적 감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격지심에 애써 도시의 언어, 젠체하는 언어를 흉내 내느라 보냈던 청춘이 떠올라서인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간간이 시도 아니고 수필도 아닌 글을 쓰고 있는 요즘은 오히려 흉내 내는 것보다는 내 삶의 순간들에 더 귀 기울일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싶다. 그리고 산복도로, 영도, 거창의 할머니들이 삶에서 길어 올린 시들을 만나면서 시를 쓸데없이 너무 무겁게, 거창하게 바라보느라 쓰는 일에 게을러만 졌구나 싶어진다. 삶에서 길어 올린 시들에 마음이 자주 녹는다. 이쯤 되고 보니 인생의 희로애락을 통과하는 누구라도, 화려하지 않은 담백한 언어로도 감동적인 시집 한 권쯤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소요유 출판사의 첫 번째 시선인 ‘마개 없는 것의, 비가 오다’가 바로 그런 시집이다. 일찍부터 생계를 꾸려야 했던 이 시집의 시인은 사십 즈음 야간대학에서 공부하고, 20년 넘게 시를 써왔다. 이 시집은 그간의 시들을 묶어낸 그의 첫 시집이다. 시인의 소개 글에서 그는 자신의 시들에 대해 ‘습작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그가 통과한 삶의 굴곡, 만나왔던 인연, 작은 행복에도 오래 머물러 길어 올린 언어가 담백하면서도 감동적이다.

   
“일이 끝나 / 어두워지는 거리를 지나 /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 아내의 식탁으로 초대되어 가는 길이다 / 저무는 길 따라 크고 작은 일상들 / 하루해처럼 저물어 / 손발을 씻고 앉는 저녁식탁 / 나는 한 마리 착한 짐승이 되어 있다.” ‘저녁기도’라는 시에서는 “밥과 반찬을 나누는 일이” 기도보다 더 절실한 기도인 시간이 된다. 또 “딸의 손잡고 큰길가 쓰레기 집하장으로 가며 네 살 된 딸이 말했다 딸이 나무가 바람을 만든다고 말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은, 나무가 만든 바람이 태어난 순간이고 머물지 않는 바람은 이내 세상으로 나아갔다”(‘나무가 만든 바람’ 중)에서처럼 아이의 말이 세계를 여는 열쇠가 되는 것을 발견한다.

2부에서는 장인(‘동장님, 동장님, 우리동장님’), 장모(‘손성교 여사님’)뿐 아니라 서동에서 “구두 닦는 마사장”, 양정에서 골방이라는 공간을 운영하는 기타 치는 신건우(‘그의 기타이야기’), 집배원 장우진씨(‘모전우체국 조지 클루니, 장우진 씨’) 등 다양한 인물에 대한 시에 애정과 더불어 자신의 삶을 풀어놓는다. 특히 서동에서 과일노점상 하는 박 씨에 대해서는 8편의 연작시를 통해 범부의 노동과 삶을 깊이 들여다본다. “노점상 박씨 노점상회는 문이 없어 / 오가는 사람 모두 손님이라 / 없는 문을 열고 들어와 / 없는 문을 밀고 나가는 사람들”(‘노점상 박씨 1’), “트럭 적재함 뒷문을 고리에 걸어놓고 / 그 위에 올라앉아 / 세상을 두루 살피는 박씨 / 그러던 어느 날 / 공중부양 중인 박씨를 발견하고 /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노점상 박씨 4’)

   
3부에서는 마냥 어둡지만은 않은 가족사를 비롯해 ‘바다’ ‘고향’ ‘아버지’ ‘항구’ ‘어머니’와 고향을 공유하던 동무들을 더듬다 보면 시인이 통과한 삶 한 편에서 지나치고 만 내 삶도 언뜻 보이는 듯싶다. 삶을 녹인 쉽고 담백한 언어로 채워진 한 권 시집 앞에서 등단이라는 잣대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내 삶에서 돌아보지 못하고 건너뛴 순간들과 완성하지 못한 시(쉬) 한 권이 부끄럽고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기획자·청년정책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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