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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리의 TV…태래비 <17> MBC 드라마 ‘시간’

클리셰 범벅인 막장드라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다니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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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08-28 19:08:45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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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질 더럽고 시한부인 재벌남
- 가난하고 착해빠진 여주인공…
- 판에 박힌 한국드라마 전개에도
- 대한민국 현실 같아 끌리는지도

이럴 리 없다. 나는 모니터 화면에 시선이 묶인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럴 수는 없다.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은 꽥꽥 소리 지르며 여자 주인공 팔목을 폭력적으로 낚아채고, 하지 마! 해! 같은 명령어를 거침없이 쏟아낸다. 여자 주인공은 간간이 저항하긴 하지만, 대체로 남자의 보호 속에서 난관을 헤쳐나간다. 남자는 재벌의 아들이고, 여자는 그 기업의 가난한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MBC 수목 드라마 ‘시간’의 한 장면. 온갖 상투적 설정과 표현이 뒤범벅인데도 내겐 왜 재미있는 걸까?
와, 몇 줄만 썼는데도 클리셰란 클리셰는 다 갖췄음을 확인 할 수 있다. 클리셰(cliche), 판에 박은, 진부한, 상투적인. 이 드라마는 이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갖고 있다. 게다가 재벌남은 성질도 더럽고 가난한 ‘여주’는 착해빠졌다. 정말이지 판에 박힌 그대로다. 그런데 왜 내가 ‘이럴 수가’를 반복하느냐고? 내가 이 드라마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MBC 수목 드라마 ‘시간’은 한 호텔 스위트룸 풀 파티가 끝난 뒤 풀장에서 한 여성이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파티에 참석한 재벌 아들 천수호(김정현)의 친구들이 다 떠난 뒤, 침대에서 잠들었던 천수호가 깨어나 시신을 발견한다.

풀장엔 오만 원짜리 지폐가 수십 장 떠 있고, 시신의 손은 지폐 몇 장을 꼭 쥐고 있다. 누가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다. 회사 법무팀은 자살로 몰아간다. 당연하다. 재벌이니까. 살인이어서는 안 되니까. 세상에 지폐 다발을 쥐고 죽는 자살이 어디 있냐 싶은 게 당연하지만, 이 세상에선 자살이 당연하다. 입막음하려 한 증인들에게 10억, 20억쯤 턱턱 쥐여 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한국 재벌이니까. 그건 드라마의 사실이 아니라 대한민국 현실이니까.

확실한 건, 천수호는 그 여성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모두 그를 범인으로 확신함에도 말이다. 그는 제 아버지의 계열사 백화점에서 안내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무릎 꿇게 하고, ‘내가 누군지 알아?’를 입에 달고 사는 꼴불견이고, 경영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빈껍데기다. 핏줄이 갑이다. 여자 주인공 설지현(서현)은 죽은 여성의 친언니다. 철없는 어머니 때문에 빚도 많았는데 동생이 죽어버린다. 죽음의 실상을 밝히고 싶지만 집요함도 능력도 없다. 죄책감을 잔뜩 짊어진 천수호가 함부로 퍼붓는 도움을 받아 간신히 하루하루 버틸 뿐이다.

재벌남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과연 죄책감뿐일까? 사실, 천수호는 죽을병에 걸려 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아이고, 총체적 난국이다. 그럼에도 나는 왜 매회 이 드라마를 챙겨 보고 유료 다운도 받고 한 회 한 회 소중히 외장하드에 보관하는 것인가? 한국 드라마 재미없어서 안 본다던 내가.
   
사실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에 일곱 살짜리 아이를 가진 마초에게 약하다. 항상 그런 남자를 사랑한다. 페미니스트이면서, 언어폭력에 민감한 나는 그런 남자들과 항상 사랑에 빠졌다. 어쩌란 말인가? 내 취향이 그런걸. 페미니스트지만 사랑해 마지않는 꾸밈 노동(자발적으로, 오직 자발적으로)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 있듯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재벌가에 적응 못 하고 마음의 병을 앓다 죽어버린 엄마를 가진 천수호가 불쌍하고, 불의에 맞서고 싶지만 능력도 뭣도 없는 설지현에게 빙의한다. 그리고 꽥꽥 소리 지르며 사랑을 고백하는, 그게 사랑인 줄도 모르고 응석을 부리는 천수호라는 마초를 귀엽다고 느낀다. 그래서 ‘시간’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본다. 다만 이들을 현실에서 만난다면, 천수호 같은 놈은 뺨따귀를 올려붙이고 설지현 같은 애들에겐 정신 차리라고 소리 지르겠지.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니까.

작가·글쓰기 강사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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