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상- 더티 초콜릿
송민하 (25·대학생)
<1장> 성환은 햇살이 감은 눈꺼풀 위로 무겁게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간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온몸이 젖은 솜처럼 무겁다. 찬장에 인스턴트 커피 사다 둔 게 아직 남았던가, 느릿느릿 침대에서 일어나는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띈 것은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테이크아웃 컵이었다. 그래 맞다, 지은이는 어젯밤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하나 남은 인스턴트 커피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제는 지은이 부산으로 여행 온 지 딱 일주일 되는 날이었다. 둘에게 이번 만남은 특별했다. 얼마 전 성환이 서울에서 청혼을 거절당한 이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으니까. 성환은 자신이 취업하고 제대로 자리 잡았을 때 다시 청혼해 달라는 그녀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말마따나 그녀는 꽤 오랫동안 취준 중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벌써 20대의 반을 연인으로 보냈고, 성환이 승진하면서 부산으로 내려온 후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사랑을 키워오지 않았던가. 성환은 나름 번듯한 무역 회사에 다녔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친구 하나쯤은 책임질 수 있었고, 이번에 지은을 부른 것도 이를 증명하고 싶어서였다. 성환은 매일 퇴근 후 집 앞 카페에 가자는 그녀를 데리고 카페 대신 부산 여기저기를 다녔다. 카페보다 훨씬 나은 곳들. 특히 하얏트 호텔에서 광안대교 야경을 내려다보며 했던 저녁식사는 꽤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괜찮았다. 어제 전까지는.
어제는 지은이 가고 싶다던 카페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러나 성환은 갑작스레 잡힌 회식 자리에서 통 벗어날 수가 없었고 술까지 잔뜩 마셔버렸다. 결국 그는 지은을 몇 시간이나 카페에서 혼자 기다리게 했고, ‘미안한데, 먼저 자라’는 문자를 보내야 했다. 답장은 없었다. 술에 잔뜩 취해 새벽에 돌아온 그는 현관에서부터 지은의 이름을 불렀지만, 지은 대신 그를 반긴 것은 식탁 위의 테이크아웃 컵 하나와 그 옆에 놓인 쪽지 한 장이었다.
‘네가 이 핫초코가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될 때까지 우리 연락하지 말자’. 쪽지에 적힌 것은 그게 전부였다.
삐비비, 삐비비, 성환의 생각을 멈춘 것은 알람 소리였다.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 아직 숙취로 머리가 아팠다. 손에 들린 인스턴트 커피는 이미 식어 빠진 지 오래다. 그는 커피를 싱크대에 쏟아버리고 마찬가지로 식어 빠진 핫초코를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자 다 꺼져버린 우유거품 위에 초콜릿 조각들이 잔뜩 떠 있다. 모양새가 볼품없는 것 치고는 맛이 괜찮다. 남은 핫초코를 입에 털어 넣으며 성환은 생각했다, 지은을 되찾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 핫초코의 비밀을 풀어야겠다고.
<2장> 며칠 간 바쁜 일상이 반복되었다. 성환은 그런 와중에도 마음 한 켠으로는 지은과 핫초코에 대해 생각했다. 단서는 우유거품 위에 초콜릿 조각이 떠있는 모양새와 그가 기억하는 맛 뿐이다. 일을 마치고 귀가하자마자 포털을 샅샅이 검색한 지도 벌써 며칠이 흘렀다. ‘부산 카페’ ‘부산 핫초코’ ‘부산 커피’ 등. 피곤하고 귀찮은 마음이 슬며시 들었다. 그런데 왜 하필 핫초코일까? 어디서 이 핫초코를 사왔을까? 원래 핫초코를 좋아했나? 아닌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지은이가 좋아하는 커피가 뭐였더라? 카페는 어떤 분위기를 좋아했지? 그런 것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날씨가 좋은 월요일이었다. 성환은 일이 일찍 끝나 기분 좋게 운전대를 잡았다. 이날부터 그가 시도한 것은 검색해서 목록으로 만든 유명 카페를 순서대로 하나하나 가보기였다. 첫날 가장 유명한 세 카페에 갔다. 다음날은 네 곳, 그다음 날은 세 곳…. 하지만 그 어디에서 핫초코를 시켜보아도 지은이 사온 것과는 모양도 맛도 다른 핫초코였다.
“성환 씨, 그러지 말고 성환 씨 집 근처 전포동 카페거리에 있는 카페에 전부 가보는 건 어때요?” 하루는 회사 옆자리 동료가 조언을 했다. 꽤 그럴 듯했다. 그러나 역시나였다. 전포카페거리 어디에서도 지은의 핫초코는 찾을 수 없었다. 몇 번째 카페였을까, 성환은 역시 지은의 것이 아닌 핫초코를 받아 들고 지쳐서 앉아있었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커플들이 가득했다. 마주 앉아 손을 꼭 잡고 있는 커플, 다정히 붙어 셀카를 찍는 커플, 신나게 웃고 떠드는 커플. 성환은 그들의 모습에서 이제 막 연애를 시작했던 이십대 초반, 카페에 앉아서 지은의 얼굴만 보고 있어도 행복하던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괜히 씁쓸한 기분이 들어 그는 도망치듯 카페를 나왔다.
핑크빛 입간판이 그의 눈에 띄었다. 초콜릿 전문 카페. 그리고 ‘비체린’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음료 사진이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그는 이끌리듯 카페로 들어섰다. 쿠키 초콜릿, 모카 초콜릿, 코코넛 밀크 초콜릿 ….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종류의 초콜릿 음료가 메뉴판에 잔뜩이었다.
“비체린 한 잔 따뜻하게 주세요.”
성환은 기대감에 휩싸였다. 이번에야말로 지은의 핫초코를 찾은 것 같았다. 그는 눈을 잠시 감았다. 지은이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핫초코를 찾았다고? 그러면 지은이는 뭐라고 할까? 우리 사이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진동벨이 징징 울렸다. 성환은 음료를 받아 들었다. 흰 우유거품 위에 곱고 진한 색의 초콜릿 파우더. 지은이 사온 핫초코와 아주 비슷해 보인다. 한 입 마시니 풍부한 거품과 진한 초콜릿 맛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쌉싸름한 커피 맛. 이게 뭐야? “네 고객님, 비체린은 원래 초콜릿이 든 커피음료인데요.” 성환의 질문에 갸우뚱한 표정으로 직원이 대답했다. 성환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도망치듯 카페를 나왔다.
<3장> 머리가 복잡한 그는 무작정 집을 향해 걸었다. 희망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무의미한 노력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지은이 원망스러웠다. 집 근처 길목에 다다랐을 쯤 한 예쁜 카페가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고 있었다.‘유월커피’. 이렇게 가까운 곳에 이렇게 예쁜 카페가 있었나? 부산에 온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갔다. 여태 집 주위를 둘러볼 여유조차 없이 살아온 것 같다. 그래, 새 차를 뽑은 감상에 취해 주위를 거닐 생각 따윈 못 했었지. 성환은 카페에 들어서며 주인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아무거나 추천 메뉴 하나만 주시겠어요?”
잠시 후 주인은 음료를 건네며 설명했다.
“이 핫초콜릿은 저희 카페 시그니쳐 메뉴예요. 참 맛있는데 모양이 아주 지저분하죠? 그래서 더티 초콜릿이라는 이름이 붙었어요.”
하얀 거품 위에 초콜릿 부스러기가 잔뜩 올라가 있는 모양의 음료였다. 지은의 핫쵸코와 똑같았다. 차이점이라면 테이크아웃 잔에 담겼던 지은의 핫초코와 달리 머그잔에 담겨 있고, 머그잔 주변이 흘러내린 우유거품과 코코아가루로 지저분하다는 것. 한 입 맛보았다. 성환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지은이 사온 그것이었다. 더티 초콜릿을 마시며 성환은 지은이 데이트 장소를 하필 집 앞 카페로 정했는지, 그리고 이 지저분해 보이는 것을 사왔는지 생각해보았다. 옆자리 커플이 더티 초콜릿 한 잔씩을 앞에 두고 서로 입가에 묻은 초콜릿 파우더를 가리키며 장난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지은이 바란 사랑은 자신이 생각하던 것처럼 부산의 전망이 내려다보이는 파인 다이닝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집 앞 작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두고 대화를 나누는 것임을.
더티 초콜릿은 화려하지 않지만 그 무엇보다 진하고 달콤한 맛을 선사했다. 지은은 바로 그런 더티 초콜릿 같은 사랑을 원한 게다. 한 때 두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이튿날 성환은 곧장 연차를 내고 서울로 갔다. 그리고 조금 전 지은에게 다시 청혼했다. 지금 그들의 손에는 더티 초콜릿 한 잔씩이 들려있다. 물론 더티 초콜릿은 더이상 뜨겁지 않다. 서울까지 오는 길에 식어버렸으니.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들의 사랑은 두번 다시 식지 않을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