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설게 배치한 언어에서
- 새로운 의미 사유하게 돼
- “시의 힘은 고립에 있어”

시를 통해 언어에 관한 철학적인 탐구를 해온 허만하(86) 시인이 새 시집 ‘언어 이전의 별빛’(솔출판사)을 냈다.

새 시집 ‘언어 이전의 별빛’을 펴낸 허만하 시인. 국제신문 DB

허 시인은 1957년 조지훈, 이한직,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문학예술’을 통해 등단했고, 1969년 첫 시집 ‘해조’를 냈다. 경북대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부산 고신대 병리학 교수로 정년퇴임한 1997년까지 ‘의사 시인’이라는 명성으로 유명했으며 부산 시단에서 큰 역할을 했다.

그는 1999년 펴낸 두 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로 뛰어난 문학성을 더욱 널리 인정받으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때에 이르러 시인으로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첫 시집을 내고 30년 만에야 두 번째 시집을 펴냈던 시인은 퇴임 후 시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꾸준히 시작을 발표하며 이산문학상, 목월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청마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 쟁쟁한 문학상을 휩쓸었다. 꽉 짜인 힘 있는 시어에 담긴 강고한 관념과 사유는, 감성이 흘러 넘치는 동시대의 서정시들을 압도했다.

그의 이번 시집은 감성과 관념의 그릇인 언어 자체에 천착해 온 그의 수십 년 작업이 결실을 봤다고 해도 좋을 만한 작품들이 실렸다. 제목 자체가 ‘언어 이전의 별빛’이다. 우리의 언어가 드러내는 일상적인 의미를 거부하고 ‘낯설게’ 배치함으로써 언어가 의미하는 존재들을 다시 사유한다.

‘높낮이가 없어 보이는 평지에서 큰 강은 강폭을 앞세워 온몸으로 지표를 쓰다듬으며 의젓하게 흐른다. 같은 궤도를 밟는 낮달이 밤 달을 추월하지 않듯이, 같은 바다를 찾는 은빛 물길 속도는 앞서가는 물길을 추월하지 않는다. 흐름은 시간의 지속처럼 정확하다// 나의 관념은 흐르지 않는다. 한 자리에서 가늘게 떨 뿐이다. 페름기 죽은 시간이 가지런히 쌓여 있는 석탄층 검은 침묵 안에서, 시간 이전의 별빛처럼 최초의 표현을 위하여 보일락 말락 섬세하게 떨고 있을 뿐이다’ (‘시간 이전의 별빛처럼’ 전문)

시에서처럼 검은 침묵 속에 스스로 갇혀 ‘최초의 표현’을 찾는 것, 그것이 어쩌면 시인 허만하가 시를 통해 오랫동안 추구한 작업일 지 모른다.

그는 이번 시집의 머리말에서 “시의 힘은 오로지 고립에 있다”고 선언하며 “나를 시인으로 길러준 정신의 변방에 감사한다”고 덧붙인다.

이미 일상화된 언어의 의미가 아닌 혼자만의 고독한 사유를 통해 얻어낸 ‘순수한(최초의) 언어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시작(詩作)이라 여겨온, 허만하의 무거운 작품들이 이 시집에 담겼다.

신귀영 기자 ky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