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1894년 1월 탐관오리 조병갑의 수탈에 저항해 전북 정읍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도의 봉기는 민란의 단계로 본다. 본격적인 동학혁명의 시작은 조직적인 대오를 갖추고 ‘무장창의문’을 발표하는 등 혁명군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3월 20일(양력 4월 25일) 고창의 무장기포를 기점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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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고창군 고창읍 당촌마을에 있는 전봉준 생가. |
고창 무장읍은 손화중 장군이 세력을 이루었던 곳이었고, 전봉준 장군의 태어난 곳도 고창이다. 고창군에는 무장기포를 기념하는 비가 세워져 있고 해마다 4월이면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기념제와 무장읍성축제가 열린다.
동학혁명 당시 혁명의 정당성을 주장한 선언문이 많이 발표됐다. ‘무장창의문’은 그때 발표된 많은 선언문 중에서 빼어난 명문으로 평가된다. 무장창의문에서는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 제나라의 관자를 인용하여 “사유(四維), 즉 예의염치(禮義廉恥)가 퍼지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면서 “지금(1894년, 갑오년)의 형세는 옛날보다도 더 심한 바가 있다”고 강조했다.
관자는 국가를 유지하는 필수적인 4요소(四維)로 ‘예의염치’를 꼽았고, 이 가운데 하나가 끊어지면 나라가 기울고, 두 개가 끊어지면 나라가 위태롭고, 세 개가 끊어지면 나라가 뒤집히고, 네 개가 끊어지면 나라는 멸망에 이른다고 했다.
동학혁명군이 특히 주목한 것은 염치였다. 염치를 단순히 부끄러움을 안다는 개인적인 차원의 윤리를 뛰어넘어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는 중요한 덕목으로 보았다. 염치는 청렴하고 부끄러워 할 줄을 안다는 뜻이며, 청렴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뜻이다. 청렴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깨뜨릴 파(破)자를 써서 ‘파렴치’라고 한다.
무장창의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관자는 “염이란 잘못을 은폐하지 않는 것이며, 치란 그릇된 것을 따르지 않는 것”이라고 했으니, 동학군들은 결국 파렴치한 상황을 극복하고 염치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혁명의 깃발을 들었던 것이다.
그나마 염치 있는 어느 정치인이 스스로 목숨을 던졌다. 그의 죽음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파렴치한 정치 상황과 정치인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였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민들의 긴 행렬에서 무장창의문의 격한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124년 전이나 지금의 상황이 전혀 다르지 않다고 여겨졌다.
“온 나라가 어육이 되고 만민이 도탄에 빠졌으니, 어찌 백성이 궁하고 또 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데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쇠잔해지는 것이다.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방책은 생각하지 않고 밖으로 시골집을 건축하여 오직 혼자만 온전하려고 방책에 힘쓰면서 한갓 녹봉과 지위만 도둑질하고 있으니 어찌 이것이 옳은 이치이겠는가.”
천도교 ‘신인간’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