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 투병 중 별세… 향년 84세
- 1960년 ‘광장’으로 문단 데뷔
- 남북 아닌 중립국 택한 주인공에
- 분단의 현실과 현대사 성찰 투영
- 문학인장으로 25일 영결식

‘광장’으로 한국 현대문학에 큰 획을 그은 거목, 소설가 최인훈이 대장암으로 투병하던 중 23일 별세했다. 향년 84세.

	한국 문학의 기념비적 작품 ‘광장’을 남기고 떠난 최인훈 소설가. 국제신문 DB

1936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때 월남해, 전후 한국의 전근대적인 현실과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세계를 치열하게 고뇌했다.

문학계는 “근대성에 대한 관심, 이데올로기에의 저항, 새로운 형식의 추구를 기본 바탕으로 신비주의와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이뤄낸 걸출한 작가”라고 그를 평한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그를 두고 “문학작품을 썼다기보다 차라리 ‘문학을 살았다’라는 표현에 적실한 작가”라고 말했고,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한국문학은 ‘전시체제’를 벗어나 새로운 비약을 시작하고 있었다. 선두에 선 작가는 최인훈이었다”고 평했다.

소설, 희곡, 평론, 에세이 등 다양한 형식의 문학작품을 써냈지만 그의 대표작은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광장’이다.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 76명이 포로들이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국으로 추방되는 것을 목격하며 이 소설을 떠올렸다고 한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인민군 석방 포로인 주인공 이명준이 남과 북 모두를 거부한 채 중립국 인도로 가는 배 타고르 호를 타고 동지나해를 지나는 장면의 서술로 ‘광장’은 시작된다.

해방-전쟁-분단의 한국 근현대사를 사는 이명준의 깊은 고뇌를 그리며, 이데올로기와 체제와 관해 냉철하고 치열한 성찰을 하고 새로운 전후시대 이념의 필요성과 필연성을 알렸다. 이념의 이항대립을 극복하려는 개인의 역정은 그로부터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 유효한 문제의식을 던진다.

1960년 ‘새벽’지에 ‘광장’을 발표하면서 그는 작가의 말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남겼다.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낀다.” 명문으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 글은 ‘광장’이 4·19 정신에 의거해 탄생했음을 천명한 것이다.

이 소설은 삶의 일회성에 관한 첨예한 인식, 개인과 사회·국가 간의 긴장과 갈등, 인간의 자유와 사랑 등 ‘인간의 본질’에 관한 폭넓은 성찰 당대 지식인은 물론 일반 독자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며 60년 동안 한국 최고의 소설로 꼽히고 있다.

최인훈은 신구문화사·민음사·문학과지성사 등 여러 출판사를 통해 ‘광장’의 내용을 10여 차례 수정했다. “정신력이 살아있는 동안에 한 글자라도 좋은 모습으로 후대 독자에게 보이려고” 끝없이 자신의 작품을 고쳐나간 것이다. “광장은 내 문학적 능력보다는 시대의 서기로서 쓴 것”이라는 그의 말을 책임지려 했다. ‘광장’은 지난 2015년 출간 55주년을 맞아 마지막 개정판이 나왔고, 전체 240쇄를 찍었다.

최인훈은 광장 말고도 ‘회색인’ ‘서유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태풍’ 등의 장편과 ‘가면고’ ‘구운몽’ ‘열하일기’ 등 중편, ‘국도의 끝’ 등 단편을 발표했는데, 이들 작품은 대개 전쟁과 전후시대를 주요한 화두로 삼았다. 전쟁 때 월남해 한평생 이 문제에 관해 사유하고 써온 셈이다.

수많은 문학청년이 그의 영향을 받아 작가가 됐고, 학자들은 그의 작품을 계기로 평론의 기반을 다졌다. 지난 2009년 독자와의 만남에서 그가 남긴 말은 후배 작가들을 강하게 자극한다. “창작하는 사람에게 은퇴란 없습니다.”

유족으로 부인과 남매가 있으며, 빈소는 대학로 서울대병원에 마련됐다. 장례는 문학인장(장례위원장 김병익)으로 치러진다. 25일 오전 8시에 영결식이 거행되고 장지는 경기도 고양시 자하연 일산 공원묘원에 마련된다.

신귀영 기자 ky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