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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월요일에는 홀로 ‘오후의 홍차’…나의 은밀한 회사생활 철칙

제4회 부산 푸드스토리 공모전 - 카페&커피 이야기 대상- 오후의 센텀 /이우화 (36·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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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07-22 19:28:41
  •  |  본지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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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좋게 취업한 문화재단 홍보부
- 미래도시 같은 센텀이 직장이다

- 고객 응대로 머리에 열 나지만
- 드디어 기다리던 점심시간
- 월요일이라 혼자 빠져나왔다
- 동료에겐 필라테스 핑계 대고
- 수영교 건너 아지트로 간다

- 빅토리아 시대 옮긴 듯한 실내
- 다르질링에 롤케이크 한입
- 아 ~ 달콤하구나 혼자만의 시간
- 이 여유로 세상 행복 빌어본다

월요일 오전 8시 05분, 수영교차로, 39번 버스의 가격은? 만원, 오늘도 만원! 미국처럼 총기가 합법화였다면 지금 이 버스 안에서 몇 명은 죽어 나가겠지만 다행히도 한국은 그런 거 없지. 망할 수영교에서는 언제나처럼 차들끼리 얽히고설키고 하지만 훗훗, 나는 알고 있지. 오늘은 지각하지 않을 거라는 걸. 이 정도면 안정권이야. BB크림 만세! 역시 눈화장 따윈 하지 않는 게 진리!

   
부산 수영구에 위치한 카페 ‘오후의 홍차’. 고풍스러운 의자와 테이블로 가득한 실내가 여유롭고 한적하다.
창밖을 보면 베스킨라빈스 알바생이 한 스쿱 푸는 모양을 그대로 따온 것 같은 영화의전당 건물이 보이고, (기둥 없이 지붕으로만 지은 건물이라고 들었는데, 아니 그게 말이 돼?) 보자 보자, 신세계 백화점은 오늘도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구먼. 올해가 가기 전에 아이스링크를 한 번 타보긴 해야 할 텐데…. 에이, 무리지. 아무래도 그것까진 무리! 그러고 보면 센텀시티는 온통 건물로 가득차서 자연이라고 해야 하나, 뭐 그런 거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산들이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다. 워낙 나지막해 보이는 산들이라 대자연의 신비 같은 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고, 현대 아이파크만 혼자 2050년을 살면서 미래도시의 신비를 뿜어내고 있군.

짜잔. 사무실 도착. 여기는 A 문화재단 건물. 모 대기업 산하 문화재단. 들리는 소문에는 회장의 셋째(둘째도 아니고?) 아내의 아들이 재단주라고 하는데, 아침드라마 같은 이야기야 넷플릭스만 보는 내가 알 바 아니고, 어쨌거나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면 따박따박 월급을 꽂아 주는 곳이니, 억지로라도 사랑해야지. 회장의 셋째 아내의 아들도 사랑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문과라서 죄송하니, 취직 같은 건 당연히 안 될 줄 알았건만 정말 운 좋게, 참으로 운이 좋게 합격했다. 자기소개서가 결정적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첫 문장이 “정말 취직하기 쉽지 않네요” 였던 건 도수 3%의 알코올음료 때문이었지…. 될 대로 되라, 쌍씨읏 더하기 야 더하기 디귿 받침! 그런 마음이었는데 역시 회장의 셋째 아내의 아들은 세상사의 피곤함을 깨우치셨는지 나 같은 사람까지 구제하여 문화재단 홍보부 사원으로 떡하니 입사시켜주시니, 감사, 압도적으로 감사, 히히.

홍보부라 해도 모든 일이라는 게 결국은 끝에 가면 고객응대의 세계로 빠지게 되는 것이 진리. 제조업도 서비스직. IT도 서비스직. 서비스직도 서비스직. 문화재단에서는 연 단위로 회원들을 받아 뮤지컬과 각종 전시회에 특별입장권을 주고, 할인 행사도 하는데 100명 한정으로 운영되는 골드 회원들, 어휴 그 분들은 얼마나 무서우신지. 구찌 입고 프라다 메고 화내면, 스파오 입고 가끔 할머니 농사일 도우러 양산에서 밭 매는 저로서는 너무 무섭답니다. 그래도 아직 마음 어딘가에 장난기 같은 게 살아남아(선배들 말로는 얼마 안 남았다던데…) 있어서 그럭저럭 버티는 거 같긴 한데 씩씩거리며 서 있는 요런 아저씨를 만나면, 어쩐지 정이 뚝 떨어지고 말 것 같다. 어휴, 저 눈. 저 살쾡이 같은 눈.

“아니, 우리 여편네(아내라고 하면 얼마나 좋은가)가 나 몰래 골드회원, 이거에 가입해가지고(아니 아내 분도 생각하고 결정한 거 아닌가요), 이거 뭐야 연회비가 100만 원(그래서 골드잖아!) 짜리를, 이거 완전히 쓸데없는 짓을 해가지고, 이거 담당 누구야, 담당 누구냐고.”

누구긴 저지요. 그 말인 즉, 월요일 오전 업무는 순탄치 않을 거라는 거. 보자 보자, 홍보업체에서 온 이메일들은 다 확인했지, A 호텔에서 숙박비 연계 할인율을 낮추자고 했어, 흠, 그건 팀장님께 보고 드렸는데, 어이쿠, 이런 사람은 정말 상대하기 힘들다.

“네, 제가 그 아내 분 회원 접수를 했는데…”

“당신은 무슨 권리로 이런 걸 접수받아!”

윽, 된통 깨졌다. 고객님, 고객사마, 젠장 망할 고객님한테 욕을 듣고 있는 동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들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재단의 첫 번째 방패막이잖아. 여기서 내가 따지기 시작하면 우리 회장님의 셋째 아내의 아들이 곤란해지는 거지. 일이란 게 무엇일까. 일을 잘한다는 게 무엇일까. 장기의 ‘초’와 ‘한’을, 체스의 ‘킹’을 지키는 게 일인 걸까. 진짜 일이란 게 무엇일까.

결국은 팀장님까지 나서서 골드회원 한명을 잃는 걸로 결론을 보았지만, 알고 보니 그 아저씨가 K건설 사장님이라나, 뭐라나. 그러니 마냥 함부로 할 수는 없고. 으, 머리에 열이 오르고, 어느새 시간은 열두시, 앗, 그래도 점심시간이잖아.

“미영 씨는 오늘 운동가지?”

   
힘겹게 입 꼬리를 들어올리며 “예. 점심들 맛있게 드세요” 라고 대답하고 건물 밖을 나오니 아, 여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인간관계란 것이 있으니 매번 같이 먹는 점심을 생략할 순 없지만, 일을 시작하면서 내 나름의 철칙을 정한 것이 있었다. 월요일 점심은 나의 시간. 월, 목 필라테스 점심 반에 끊었다고 거짓말했지만, 그래도 목요일은 가니까, 반만 미안해하기로 하지요.

그래서 나의 꿈결 같은 장소로 걸어간다. 길 잃은 고양이들처럼 한데 모여 롯데 백화점과 신세계 백화점 사이의 그늘 속에서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는 흡연자 클럽을 지나고 있노라면, 그들의 얼굴에도 나의 오전과 비슷한 것이 담겨있음을 느낀다. 무언가 한마디 건네고 싶지만 각자의 외로움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 이곳 인간관계의 규칙.

인어공주가 필라테스 상급반도 절대 흉내 내지 못할 자세로 돌고래를 타고 진주인지 배구공인지 모를 것을 멋들어지게 들고 있는 조각상이 보인다. 아, 수영강의 냄새.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여름 수영강의 냄새. 수영만 바닷물이 미묘하게 섞여, 기분 좋은 소금기가 코끝에 머무른다. 그리고 바람. 여름과 바람, 이 두 단어가 합쳐지면 갑작스럽게 세상에서 두 번째로 좋은 기운이 생겨난다. 섬머 브리즈! 여름 햇살은 건강히 내리쬐고, 수영강은 푸르고, 바람은 불고, 아!

서울로 떠난, 혹은 빨려 간 친구들이 한강 운운하며 자랑을 하지만 흥, 가소로울 뿐이다. 박기량이, 롯데자이언츠가, 그리고 이곳 수영교를 건널 때의 여름 바람이 부산에 있는 한 당신들의 서울은, 글쎄, 내가 보기엔 한 수 아래올시다, 하하.
아무래도 인어공주를 잡아먹고 싶어서 안달인 것 같은 범고래 조각상까지 지나 조금 더 걸어가면 짜잔, 나의 월요일 점심을 책임질 곳이 나온다. 입사하기 일주일 전, 나는 이곳 센텀시티 주변을 계속 걸었다. 답사라고 해야 되나, 뭐, 그냥 정처 없이. 와, 캐딜락 영업소다, 와, 튼튼한 양파망에다 색칠한 것 같은 미술작품이다, 와, 센텀고등학교 얘들은 자기들 학교를 ‘쎈고’라고 부를까 하면서. 그때 우연히 멈추어 서게 된 곳. ‘오후의 홍차’. 여름의 바람보다 더 좋은 조합은 바로 여기 있었다. 오후 그리고 홍차. 입에다 그 단어를 머금고서 몇 번이나 우물거려보았다. 오후의 홍차, 오후의 홍차, 아, 마음이 어느새 다정해져 있었다. 그 때 정했다, 입사하게 되면 일주일에 한 번 나만의 비밀시간을 가지리라. ‘오후의 홍차’에서 오후의 홍차를 마시며 내면의 불안 같은 것 잠시 내려놓으리라.

짜잔, 그래서 오늘도 여기에. 보통의 엘리베이터보다 조금 더 정제된 은색 빛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4층 버튼을 누르고 벌써부터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다듬는다. 으, 좋아, 이 긴장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알록달록 색이 칠해진, 약간 과하다 싶은 장식과 거울이 달린 화장실에 들러 그 사이 어디라도 못생겨진 거 아닌가 검토한 뒤에 카페로 입장한다.

모던. 그리고 또 모던. 센텀시티 주변 건물답게 22세기 분위기가 나는 외양과 달리, 의자와 테이블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것이라고 해도 무리 없을 만큼 점잖고, 고풍스럽다. 그 오묘한 부조화가 어쩐지 마음에 든다. 이곳은 센텀시티이지 않는가. 푹신한 벨벳소파 같은 것이 있었다면 오히려 더 어색했을 것이다. 친절한 점원의 안내를 받아 메뉴판을 펼치면 다르질링, 우바, 기문 홍차 3대장과 함께 빼놓으면 섭섭한 얼그레이 같은 블렌딩 홍차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고 메뉴판 뒤까지 훑으면 커피 종류도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는 아무래도 홍차지. 평소엔 오리지날 로얄 밀크티를 자주 먹지만, 어쩐지 오늘은 클래식하게 가고 싶어진다. 그래, 가즈아, 다르질링으로. 물론 얼그레이 롤케이크와 함께. 배는 채워야 되니까.

눈으로 직접 마주하는 수영강과 달리, 창밖으로 보는 수영강은 후각이 생략되어서인지, 마치 유화를 보는 것만 같다. 수채화의 서정과는 확실히 다르다. 바다의 근육이 강물에 배여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어딘지 힘이 불끈 솟는 기분. 그러고 보면 부산시립미술관도 이곳 근처인데, 생각보다 가는 게 쉽지 않네.

잠깐 눈을 돌려 사람들을 보면 홍차라고 해서 나이 든 분들만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조그마한 책장 뒤편의 원목 테이블 쪽에는 아무래도 ‘센고’ 아이들인 것 같은 남자아이들이 홍차를 홀짝거리며 자기들끼리 떠드는데, 그 모습이 어쩐지 우습고 또 마음에 든다. 하지만 역시나 가장 느낌이 좋은 건 은발의 신사 숙녀분들. 부담스럽지 않은 흰색 톤의 투피스 정장을 입으신 할머니와 세상 모든 게 궁금하기만 할 꼬마 숙녀가 나란히 앉아 있다. 저 아이는 커서도 이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 때였는지 기억하려나.

어쩐지 마음이 푸근해져 있을 때쯤 티팟이 등장한다. 기다림이라는 향신료를 첨가한 뒤 차를 따르면 다르질링의 오묘한 갈색이 신비를 머금고 나타난다. 혀끝에 닿으면 어딘지 모르게 푸르른 과일의 맛이 나타나고 쌉싸래한 얼그레이 롤케이크는 어른의 단맛으로 입안을 맴돈다.

그리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면, 거대한 센텀시티의 모습이 보인다. 사람이 그렇게 많이 일하고 있는데도 어쩐지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은 곳. 번화하지만 번잡하지는 않아서 서면과 남포동 같은 복작거림은 없는 곳. 수많은 사람이 아직 정확히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면서도 어쨌거나 일 하고 있는 곳. 나 또한 방금까지 저곳에 있었지.

차를 넘기며 한참을 센텀시티를 바라보다 보면 이상하게도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저곳에 사람들이 있으니까. 싸우기도 하고 치졸해지기도 하고 피곤해지기도 하면서. 그러나 어쨌거나 성공을, 혹은 행복을 바라면서.

다르질링의 따뜻한 기운이 피를 따라 온 몸에 퍼진다. 기분 좋은 땀방울 같은 것이 맺히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만 더 있다가 일하러 가야지, 저기 저 많은 사람들처럼, 오후의 센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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