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태어나고 죽는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자연의 이치는 없을 것이다. 생명이 태어나는 것도 신기하지만, 죽음이라는 것은 의식의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기에 신비의 베일 속에 가려있다. 물론 아무도 가 볼 수 없고 또 가보지 않은 곳이기에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프랑스의 문호 앙드레 지드는 “나는 육체에서 잘라 낸 영혼을 믿지 않는다. 나는 육체와 영혼은 동일한 것이며, 육체의 생활이 이미 없어졌을 때에 양자는 함께 끝난다고 생각한다” 고 말하면서 사후 세계를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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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레사 수녀는 죽음을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했다. 국제신문DB |
과연 지드의 말처럼 영혼이 육체와 동일하며 육신의 죽음과 함께 영혼은 없어지는 걸까? 아니 육체와 구분된 영혼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걸까? 이것을 과학이나 학문으로 규명할 수 없기에 결국 사람들은 철학이나 종교의 영역으로 넘긴다. 그런데 이 영혼의 존재를 과학으로 증명해보려는 재미있는 실험이 있었다. 1901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말기 결핵환자 요양원’에서 대형 저울 위에 간이침대를 설치한 다음 임종을 앞둔 환자를 눕혀놓고 그가 죽는 순간 저울 눈금에 변화가 있는지 지켜봤다. 그리고 환자가 죽는 순간 몸무게가 21g이 줄었음을 확인했다. 실험을 주관한 의사는 영혼이 육체를 떠났기 때문에 몸무게에 차이가 난 것이라고 하면서 영혼의 무게를 21g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실험은 사실 별로 과학적이지도 정밀하지도 못했지만, 후에 ‘21그램’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잘 알려지게 됐다.
정말 영혼의 무게가 21g일지, 아니면 “천사에게 체중이 없듯이 영혼에는 무게가 없다”고 한 게오르규의 말대로 무게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는 영혼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저 눈에 보이는 이 딱딱한 육체만이 아니라, 그 안에 정신이 있고, 그저 정신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보다 더 숭고하고 신비한 영역이 있다. 그 영혼이야말로 우리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여 숭고한 영적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영혼은 죽음과 함께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성경은 사후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심판이란 이 세상에서 살아간 삶 하나하나를 놓고 그 옳고 그름을 재판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 시간은 별로 유쾌한 시간이 아닐 것이다. 물론 “죽어봐야 알지”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위안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죽음이란 것이 너무 두려운 것이 아닐까?
너무 늦기 전에 지혜롭게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그 준비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마치 재판을 앞둔 죄수가 변호인을 고용해서 어떻게든 무죄 판결을 받거나 형벌을 경감하려고 하듯이, 우리에게 찾아올 심판을 대비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주 탁월한 변호인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다. 그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친히 채찍과 수모를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었다. 우리 대신 죄 값을 치르신 것이다.
누구든지 이 변호사를 믿고 환영하면, 그 속에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죄의 문제가 실타래처럼 풀려지고,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 죄 없는 의인으로 서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피하고 싶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테레사 수녀의 말처럼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된다.
부산중앙교회 담임목사·부산기독교윤리실천운동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