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1세대 연극인 허영길 연출가. 국제신문 DB

‘1960, 70년대에 창단한 극단은 동인제 극단이 대부분이었지만 1978년에 창단한 극단 부산레퍼토리시스템은 직업 극단을 표방했다. 비록 적은 돈이지만 공연 수익금을 출연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연극 경력에 따라 분배하고, 철저한 직업의식으로 극단을 운영해 나가자는 생각이었다. 어찌 보면 이때부터 프로듀서시스템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연출가 허영길은 극단 전위무대 소속이면서 호구지책으로 부산시민회관 무대 주임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 소설을 쓰면서 연극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던 신태범이 시민회관 업무계에 근무하고 있었으니,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극단을 창단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두 사람은 당시 수산대를 졸업하고 전위무대에 있던 배우 이상복, 서울예전을 졸업한 연출가 김경화, 연출가 이기원 그리고 남성초등학교에서 아동극을 지도하고 있던 배우 김의섭을 규합, 신태범을 대표로 극단 부산 레퍼토리시스템을 창단했다. 그해 5월에 윤대성의 ‘출발’과 ‘너도 먹고 물러나라’를 창단 공연으로 갖고, 연이어 9월에 ‘이 대감 망할 대감’과 ‘아리랑 고개’, 11월에 김금지의 ‘생명의 소리’를 연거푸 공연했다. (…)

지금 부산 연극계에서 배우와 연출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연극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극단 레퍼토리시스템 출신들인 것만 보아도, 이 극단이 직업 극단을 표방하면서 그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작품 활동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부산 레퍼토리시스템이 창단되면서 1970년대는 막을 내리고, 부산 연극계는 극단들이 난립하는 춘추전국시대의 1980년대를 맞는다.”(2005년 국제신문 11월 21일 자 29면 김문홍의 부산 연극 이야기 <6> 직업 극단 표방한 부산 레퍼토리 시스템 중)

지난 14일 향년 78세로 별세한 원로 연극인 허영길 연출가는 김문홍 연극평론가의 위와 같은 회고처럼, 부산의 연극예술에 뚜렷하고 큰 발자국을 남겼다.

허영길 연출가는 1963년 부산의 극단 전위무대 연출부로 연극에 입문했다.

1978년 극단 레퍼토리 시스템을 창립해 대표를 맡았고, 1994년 극단 세이(Say·현 극단 사계)를 창단해 대표와 상임연출로도 활동했다. 그는 부산 연극예술에 르네상스 시기가 펼쳐진 1970년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부산요트대회 개·폐회식 총연출을 맡기도 했다.

부산시립극단 예술감독을 지냈고 부산연극협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수차례 부산연극제와 전국연극제에서 연출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07년 부산시 문화상을 받은 데 이어 2008년 한국 연극 100주년 기념사업 중 하나인 ‘대한민국 연극 퍼레이드’에 부산 대표로 초청받아 ‘뇌우’를 출품, 최고의 호평을 받았다. 2014년에는 KNN 문화예술대상을 수상했다.

고인은 2009년 대장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무대를 떠나지 않고 여전히 현역으로 남아 후배 연극인들의 귀감이 됐다.

투병 중이던 지난 5월 극단 사계 80회 정기공연 ‘무대 뒤에서’의 연출을 맡을 정도로 열정을 보여줬고, 2016년 부산시립극단의 ‘영월행 일기’와 같은 해 극단 사계의 ‘챙’ ‘2인극 챙’ 등 꾸준한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부산연극협회는 고인의 업적과 뜻을 기리며 대한민국연극인장으로 장례를 엄수한다.

손병태 부산연극협회장은 “허영길 연출가는 부산 연극의 토대를 다지신 1세대 연극인이시다. 지난 6월 협회가 마련한 ‘허영길 연출전’을 통해 원로 연극인의 힘을 보여주셨고 후배들에게 많은 자극과 가르침을 전하셨다. 별세 소식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부산 연극을 위해 크게 공헌하신 고인의 장례를 대한민국연극장으로 치를 것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부산연극협회는 16일 오전 10시 부산연극협회 사무실이 있는 부산예술회관 앞 마당에서 30분가량 영결식을 진행한다. 16일 오전 발인. 장지 부산 기장군 정관면 부산추모공원. 안세희 기자 ahnsh@kookje.co.kr